아연실색이 일본말이라구?

2013.08.31 05:46:33

[≪표준국어대사전≫ 안의 일본말 찌꺼기(62)]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뭔가 뜻밖의 일에 너무 놀랄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아연실색하다'와 '아연질색하다'라는 표현이 모두 쓰이고 있는데, 이 중에서 맞는 표현은 '아연실색(啞然失色)하다'입니다. '아연실색'은 뜻밖의 일에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놀란다는 것으로, 여기서 '실색'이란 말의 '실(失)'은 잃어버린다는 뜻이고, '색(色)'은 얼굴빛을 뜻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것을 '아연질색하다'라고 하는 분들이 상당히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나 물건 또는 일을 몹시 싫어할 때 'OO는 질색(窒塞)이야.' 이렇게 말할 때가 있는데, 아마도 이것을 연상해서 '아연질색'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만,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월간 교육평론-

 ‘아연실색’의 예문을 찾다보니 ‘아연실색’이냐 ‘아연질색’이냐를 놓고 설명하는 글은 있어도 ‘아연실색’의 유래를 설명하는 글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아연실색(啞然失色) : 뜻밖의 일에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놀람. ‘크게 놀람’으로 순화하라.”고만 할 뿐 순화해야 할 까닭을 밝히지 않는다. 무슨 곡절이 있는 말일까? 혹시 일본말이라서? 그렇다. 관보 제13,269호(96.3.23)에 보면 일본말로 규정해 놓고‘크게 놀람’으로 고쳐 쓰라고 해 놓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말은 일본말이 아니다.

   
▲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순화"하라는 것은 일본말을 유래로 볼 때 쓰는 말이다.

 《일본국어대사전》에는 ‘あ‐ぜん【唖然】〔形動タリ〕思いがけないことに驚き、あきれて物も言えないさま。あっけにとられるさま’ 라고 풀이했는데 번역하면 “아젠 : 생각지 않은 일에 놀라고 질려서 말 못하는 모습. 질린 모양”이다. 곧 아연이란 말은 있지만 ‘아연실색’이란 말은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아연실색이란 말이 나온 걸까?

 조선왕조실록에는 ‘아연실색’이란 말이 모두 25번 나온다. 물론 원문에는 없고 모두 한글 번역본에서만 나온다. 고종실록 30권, 30년(1893) 10월 21일 기사를 보자.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나에게 있어 경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동반자이니 마치 물을 건널 때 배가 필요한 것과 같은 정도일 뿐만이 아니다. 서로 버릴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비단 나만 경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경이 이런 때에 떠나겠다고 차마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사직하는 상소가 온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아연실색하였다.

領議政沈舜澤上疏辭職。 批曰: “予於卿, 相須爲理, 不啻若方涉而籍舟楫。 其不可相捨者, 有如是, 則非徒予望卿者厚也, 亦謂卿不忍言去於此時矣。 忽見巽章之來, 不覺訝然失圖

 위 예문에서 보다시피 원문에는 ‘아연실도(訝然失圖)’를 번역본에서는 ‘아연실색’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상의 ‘아연실색’은 광해군, 인조, 중종실록에는 한두 번 나오는데 견주어 고종실록에는 무려 10번이나 나온다. 구한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 풍전등화 앞에서 고종의 노심초사를 엿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25번 나오는 아연실색은 원문별로 살펴보면, 막불아연(莫不愕然), 상고실색(相顧失色), 불각실색(不覺失色), 아연실도(訝然失圖) 등 다양한 한자말로 나오지만 국역본에서는 모두 ‘아연실색’으로 번역하고 있다.

 정리하면 아연실색은 아연+실색으로 만들어진 말로 일본말은 아니다. 더욱이 왕조실록에 쓰인 아연이란 한자는 ‘아연(訝然)’으로 일본에서 쓰는 ‘아연(唖然, 아젠,あぜん)’ 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 국어사전에서는 예전에 쓰던 한자를 버리고 일본 한자인 아연(唖然)에 실색을 더해 ‘아연실색(啞然失色)’이라고 표기하면서 이를 일본말로 규정하고 있다.

낱말 하나라도 꼼꼼하게 따져서 일본말이냐 아니냐를 규정하지 못하고 ‘일본한자 하나 들어갔다'고 일본말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구태여 예전에 쓰던 訝然(아연)을 일본한자 ‘唖然(아연)’으로 바꿔 써 일본말로 정의 내리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제발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만들어주려는 국어사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