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린경제 = 제산 기자]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大山面) 대곡(大谷)마을에는 커다란 바위산이 있는데 이를 봉황대라 부른다. 하서 김인후에 따르면 통일신라 때 중국인이 썼다는 봉황대(鳳凰臺)라는 세 글자와 함께 선사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암각화(岩刻畵)가 각인되어 있다. 암각화는 1991년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3호로 지정 되어있다.
- 오늘 날 봉황대가 남원의 명소가 된 것은 속칭 울바위[鳴岩]로 알려진 탕건(宕巾)바위의 영험(靈驗) 때문이라고 본다. 울바위가 언제부터 울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에 바위가 처음으로 울어 이 마을의 이동미공이 문과에 급제할 것을 예고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바위가 울었고 그 때 마다 마을은 급제자가 나오는 경사를 맞곤 했으며 1945년 봄에도 크게 울어 8.15광복을 정확하게 예고한 바 있다.
- 광복 후 이 마을에서는 서울대 법대생이 4명이나 배출 되었으며 장관, 차관, 판사, 변호사 등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잇따라 나왔다. 자고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했거니와 이는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그러기에 더욱 신비감을 더 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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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산면 대곡리 봉황정과 봉황대 모습 - 평평한 들 녘 한 복판에 왕릉처럼 둥근 바위산이 느닷없이 불쑥 솟아올라 있다는 것은 그것이 인공의 축조물이 아닌 이상, 지각변동 때나 일어났을 법한 융기(隆起) 현상이랄 수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 이제 봉황대는 지역을 벗어나 전국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봉황대가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우산(友山) 황유주(黃留周)선생의 공덕이 크다. 우산선생은 평소 요산요수의 풍류를 즐기는 물외고사(物外高士)였다. 그는 유서 깊은 봉황대가 날로 황폐해지는 것을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고 십여 년 이상 이곳을 오르내리며 다짐하길 ‘내 생전에 반드시 봉황대를 되찾고 봉황정을 지으리라.’ 고 다짐했다. 봉황대를 되찾는 다는 것은 일제 때 봉황대 주변의 경관이 훼손된 것을 말한다.
- 우산 선생은 말년에 사재를 털어 사유화된 봉황대를 매입한 뒤 봉황정건립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계를 조직했고 계원들에 의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마침내 정사년(1977) 봄에 봉황정 건립에 착수하여 가을에 완공을 보았다.
- 봉황정이 건립되던 날 성대한 낙성잔치와 함께 전국 백일장을 열어 팔백여수의 예찬시가 모였다. 백일장에 응모한 주옥같은 ‘봉황정’에 관한 시를 앞으로 ‘한국문화신문 얼레빗’에 소개하고자 한다. 국역 번역은 필자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