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건 상소문으로 백성 살린 청백리

2013.10.24 22:28:25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13] 경북 풍기 황준량 종택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한 쪽은 큰 강이 흐르고 있는데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 집들은 모두 나무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논밭은 본래 척박해서 물난리와 가뭄이 가장 먼저 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항산(恒産, 늘 있는 수입)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운데 줄임) 그래서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하는 실정이고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워 모아야 연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거의 파산 상태의 고을을 다시 일으키고자 임금에게 올린 진폐소의 일부이다.

 

   
▲ 금게 선생의 철학과 청빈한 삶이 담긴 금계집(退溪集)

그의 글은 이어진다. “그리하여 역사(役事)를 못하고 도망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일족과 인근 이웃에 책임을 분담시켜 부세를 징수하려고 하니 이들이 어떻게 배를 채우고 몸을 감쌀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물고기를 끓는 솥에서 키우고 새를 불타는 숲에 깃들게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자애로운 부모라도 자식을 잡기 어려운데 임금이 어떻게 백성을 끌어안을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어리석고 미천한 사람이 아둔한 소견을 두서없이 함부로 말씀드렸으니 그 죄 여러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임금을 위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만은 알아주시옵소서. 한 고을의 폐단을 말씀드렸으나 다른 곳도 미루어 짐작하소서.”  

어떻게 보면 임금의 비위를 건드릴 수 있고, 그로 인해 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소문을 금계 선생은 과감히 썼다. 이 상소를 두고 나중에 영의정에까지 이른 윤원형은 단양 고을만 잡역(雜役) 면제의 특혜를 줄 수 없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선생은 슬기로운 사람이었다. 상소문에서 선생은 먼저 현실적으로 채택할 수 없는 이상론을 펼친 다음 가장 못한 정책으로 10가지 항목을 구체적으로 들었다. 하나하나가 모두 백성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좋은 방책이었다. 목재, 종이, 산짐승, 약재, 꿀 등과 관련된 열 가지의 폐단을 일일이 나열하며 그것을 없애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조정에서는 선생의 이런 치밀한 의도에 열거하는 10가지 항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백성 사랑이 투철했던 작은 고을 수령의 지혜와 4,800여 자의 명문장은 임금을 감동시켰다. 임금은 "아뢴 대로 하라"는 전교를 내리기에 이른다. 

선생은 "관(官)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법이거늘, 그들을 이 지경으로 버려두고서야 관은 있어서 무엇 하랴!"고 절규했다고 한다.  

이 상소문은 요즘 사람들이 읽어도 가슴을 울리게 한다. 450여 년 전과 견주었을 때 우리 농촌의 현실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목민관들은 금계 선생을 따를만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퇴계가 행장과 제문 써 “세상을 밝힌 최고의 유학자”로 기려
 

   
▲ 퇴계 선생이 금계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은 친필제문

“(앞줄임) 나 황(滉)이 공(公)을 농암선생의 문하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어서부터 서로 함께 놀고 따르기를 가장 오래하며 친밀히 하였는데 우둔하여 들은 바가 없었던 나로서 공으로부터 깨우친 점이 많았다.  

공이 물러나서 돌아오면 실로 서로 내왕하며 옛날의 정을 다시 가꾸자는 언약(言約)이 있었으나 공은 항상 내가 늙고 병이 들어 몸을 보존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였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 늙고 병든 자는 세상에 남아 있고 오히려 강건한 나이에 있던 공의 죽음을 슬퍼할 줄 알았으리요. 공의 언행은 쓸 것이 많으나 다 감히 기록하지 못하고 오직 그 큰 것만을 위와 같이 추려서 쓴다.(뒷줄임)” 

위 글은 조선시대 대학자로 이름난 퇴계 이황이 금계 황준량(黃俊良, 1517년 ~ 1563년) 선생을 위해 쓴 행장의 일부이다. 퇴계는 평생 명종 임금, 정암 조광조, 자신의 아버지, 농암 이현보,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그리고 금계 황준량 등 단 7명만 행장을 써주었다고 한다.  

스승보다 먼저 47살로 세상을 떠난 그를 기려 퇴계는 제문을 지어 애도했고 행장을 써서 그의 삶을 정리했으며, 그가 남긴 글을 교열해 문집으로 엮었을 뿐 아니라 관상명정(棺上銘旌, 관(棺) 위에 씌우는 명정-명정은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 일정한 크기의 긴 옷감에 보통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쓰며, 장사 지낼 때 상여 앞에서 들고 간 뒤에 널 위에 펴 묻는다.)에 '선생(先生)'이라고 썼다. 이는 퇴계에 의해 '세상을 밝힌 유학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음을 뜻한다.  

또 영남 지역에 '영유소고(榮有嘯皐)요 풍유금계(豊有錦溪)'라는 문자가 있다. 이는 '영주에는 소고 박승임이 있고 풍기에는 금계 황준량이 있다'는 말인데, 퇴계 선생보다 16살이나 나이가 어린 동갑나기인 두 사람은 영주와 풍기를 대표하는 학자라는 뜻이다. 그 정도로 인정받는 학자였지만, 금계는 더욱이나 퇴계 선생을 모신 욱양서원(郁陽書院)에 같이 모셔질(從享, 현종3년, 1622) 정도였다.
 

죽은 뒤 염습할 옷감이 없고, 널에 채울 옷가지도 없었던 청빈한 삶

 

   
▲ 작고 소박한 금양정사(錦陽精舍)

   
▲ 금계고택 옆의 불천위 사당

요즘 공직자들은 공직을 그만 둔 뒤에 꼭 뒷소리를 듣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역대 대통령들이 대부분 뇌물과 횡령, 배임죄에서 자유스럽지 못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선생은 그가 퇴임 이후 죽었을 때 20여 년의 벼슬에도, 염습((殮襲, 죽은 사람의 몸을 씻은 뒤에 수의를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에 쓸 만한 옷감이 없었고, 널에 채울 옷가지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  

선생은 무엇이든지 생기면 부모께 드리고 형제와 나누었다 하며, 백성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으니 염습할 옷감이 있을 리 만무하다.  

대개 종택이라고 하면 번듯한 본채에 사랑채를 포함한 몇 동의 기와집이 있게 마련이지만

금계 종택은 다르다. 지난 번 취재차 들른 충남 서천 이하복 종택이 초가집인 것처럼 금계 선생 집 역시 내세울 만한 변변한 집이 없다. 지금 자리한 금계 종택은 기와가 아닌 요즘 식의 종택 하나에 그나마도 좀 떨어진 곳에 금계선생이 짓다 말고 돌아가시자 후손이 간신히 마무리한 작고 소박한 모습의 금양정사(錦陽精舍)가 있을 뿐이다. 선생의 청빈한 삶이 그대로 피부에 느껴진다.
 

   
▲ 금계 선생이 학문을 닦던 금선정(錦仙亭)

   
▲ 맑은 물과 오래된 소나무의 금선계곡(錦仙溪谷)

종택 아래 개울에는 금선정(錦仙亭)이란 정자가 있다. 금선정은 금계 선생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선생이 세상을 뜬 뒤 풍기군수 송징계(宋徵啓)가 절벽에 “금선대(錦仙臺)”라 새기고, 정조 5년에 풍기군수 이한일이 정자를 지어 금선정이라 하였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소박한 정자이다. 전통건축물이 다 그렇듯 자연적인 조건에 맞춰 세워 기둥 길이가 들쭉날쭉한데 이곳에서 금계 선생은 학문을 연마하면서 훗날 관리의 신분임에도 재물에 욕심을 일으키지 않은 청빈의 삶을 실천하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이름이 금선계곡(錦仙溪谷)인 개울과 금성정은 신선이 놀았을 법한 선계(仙界)다. 몇 백 년 된 소나무가 우거졌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서니 사방에 들리는 것은 솔바람 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새소리뿐이다. 이처럼 고요한 곳에서 고요한 마음을 닦았을 선생을 생각하니 나뭇잎 살랑대는 소리조차 예사로 느껴지지 않는다.
 

후손들 마을 사람들 위해 땅 내놔 길을 내게 했다 

   
▲ 단양 향교에 있는 금계 황준량 선정비

“농민과 서민은 부도지경에 처해 살길이 막막한데 정치권은 대권욕에 아귀다툼을 벌이고 졸부들은 명품 구입에 열을 올리는 현실이 개탄스러워 역사 속에서 진정한 목민관을 소개, 경종을 울리고자 했습니다. 황준량 같은 목민관이 다시 나타나 농민들의 근심걱정을 해결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버섯재배 농민 충북 단양군 단성면 조순호(58)씨는 지난 2002년 틈틈이 쓴 원고를 모아 소설 ‘목민관 황준량’을 내 화제가 됐었다. 농민작가 조 씨는 소설을 통해 금계 선생을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으뜸가는 청빈한 관리로 그리고 있다. 그는 단양출신의 유명한 역사 인물인 삼봉 정도전과 군수를 지낸 퇴계 선생 등은 기념비가 없는데, 단양 향교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황준량 선정비’가 있어 이를 이상히 여기고 조사한 것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금계 선생은 농민이 감동을 받아 소설을 쓸 정도로 백성을 끔찍이 사랑한 목민관이었다. 

선생의 백성 사랑이 후손에게 전해진 까닭일까? 종택 앞과 개울 건너편 300여 미터의 길은 선생의 후손들이 땅을 내놓아 낸 것이라 한다. 사용료는 물론 땅값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 종손 황재천 선생

종손 황재천 선생은 지금 용인에 사는데 대학 강단에 출강하며, 오래된 소형차를 스스럼없이 탈 정도로 검소하게 살아간다. 종택에 내려가 살아야지 하면서도 쉽게 안 된다며 계면쩍어 한다. 언젠가는 금계 선생처럼 금선정에서 책을 벗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종손을 보게 될 날도 머지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종손 황재천 선생은 취재를 마친 기자에게 풍기 지방의 명물이라며 능이버섯칼국수로 맛있는 저녁을 대접했다. 그리고 서울행 고속버스가 떠날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금계 선생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종손도 간직하고 있음이라. 나도 다시 금선정에 내려가 금계 선생의 훌륭한 철학을 가슴에 새기고야 말 것이란 다짐을 해본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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