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인도교 58년 완공…'현대' 6대 건설사에 오르다

2014.06.30 10:00:27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⑧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망한 것 같았던 현대건설, 그리고 아우매제와 함께 펑펑 울었던 정주영은 고령교 복구공사의 시련을 전화위복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국내 최고의 난공사였던 고령교 공사의 실패를 곰곰이 새겨보니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장비 부족이 아니었던가? 625 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높은 실업률에 허덕이고 있었다.

당시 일꾼들을 모으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일꾼 10, 100명의 몫을 한꺼번에 해낼 수 있는 장비는 마음대로 구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장비를 갖고 있는 업체에 세를 주고 빌려 쓸 수는 있었지만, 비싼 세를 지불하면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결론적으로 고령교 공사의 실패는 경험이 모자라고 장비가 부족해서였을 뿐 실패라고 생각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불감폭호 부감풍하(不敢暴虎 不敢馮河,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지 못하고 걸어서는 황하를 건널 수 없다.” 정주영은 당시 시경(詩經)의 이 문구가 절실하게 다가왔다고 회고한다. 따라서 현대건설의 가장 큰 과제는 장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비부족을 해결하는 정주영의 솜씨는 남달랐다. 마침 미군은 매주 못쓰게 된 장비를 민간업자에게 팔았는데 보통의 건설업자는 미군과 직접 접촉 못하고 대부분 중간 상인을 거쳐 고장이 많은 장비를 비싸게 살 수밖에 없었지만 정주영한테는 1주일 단위로 매각 장비 안내서가 우송되어 왔기에 우선 정보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건 운현궁 공사와 유엔묘지에 보리를 옮겨 심은 것이 효자 노릇을 한 덕이며 오랫동안 미군공사를 하면서 쌓은 미군과의 믿음 덕분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현대건설은 국내 업체로는 유일하게 미8군에 장비 불하처에 등록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미군이 장비를 팔 때마다 그는 직접 현장에 찾아가 장비를 고를 수 있었고, 8군이 모델이 바뀌어 시장에 파는 거의 신품에 가까운 장비들을 저울로 달아 고철 값에 살 수 있었던 것도 큰 소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세기업이나마 신설동 뒷골목에서 자동차서비스 공장을 운영했기에 기계들에 대한 원리와 기능을 익혔던 것도 장비를 사는데 큰 몫을 했다.

이렇게 장비를 대대적으로 사들이면서 현대건설은 탄탄해져 갔다. 특히 한국전쟁이 끝난 뒤 미국 원조 자금을 재원으로 전후 복구공사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는데 전쟁 때와는 달리 미군은 시방서(공사 시공방법과 일정 등을 기록한 문서)에 엄격한 장비 조항을 넣었다. 제대로 된 장비가 없다면 미군 공사를 따내기가 어려운 형편이 된 것이다. 장비를 사는데 모든 힘을 기울였던 정주영의 노력은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1957년 여름, 내무부 지방국은 625 전쟁 때 폭파되었던 한강인도교 건설공사를 발주했다. 수많은 피난민이 건너다 폭격에 의해 무너진 다리와 함께 수장되었던 한강 인도교였다. 195717일 치 조선일보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625 당시 파괴된 한강철교 가운데 A선만 수리되어 현재 기차를 운행 중에 있으나 B선이 파괴된 그대로 통하지 않아 그 수리공사 추진이 요망되고 있었는데 드디어 지난 13일 영등포 UN군 공병단 토건업자들에 의한 B선 철교 복구공사의 공개입찰이 단행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공개입찰이 단행된 관계로 철교의 복구공사는 불원 착수될 모양인데 입찰결과 발표는 17일 아니면 20일까지는 행하여질 모양이다.”

'건설은 장비싸움'. 실패에서 배운 교훈. 미군서 얻은 신뢰로 건설장비를 값싸게 구입했다. 解放 최대 공사 인도교 공사 발주. 입찰서 탈락. 그러나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 장관들끼리 싸우고 회사들끼리 혈투. 1등 회사 탈락. 어부지리로 2위 가격을 낸 현대에 자동 낙찰됐다. 공사수주액의 40%를 이익으로 남겼다. 계속되는 국도 포장공사 수주. 승승장구. 정주영은 또 큰 일을 벌이기로 했다. 시멘트 산업. 과연 무난히 성공할 수 있을까.

전후 정부 재정이 없어 복구를 꿈도 꾸지 못했다가 미국의 원조자금을 받아서야 공사를 시작했는데 공사 기간 8개월, 공사 금액 23000여만 환이었다. 누구나 큰 이익이 날 공사임을 알 수 있는 조건으로 건설업계에서는 이 공사를 따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그런데 당시 내무부 장관은 공사를 조흥토건에 맡기려고 했고, 공사 승인권을 가지고 있던 재무부 장관은 흥화공작소에 주려고 했다. 당시 큰 건설공사 수주는 든든한 배경이 없으면 불가능할 때였다. 공사규모가 큰 사업인데다 한강다리를 복구하는 상징적인 사업이어서 장관을 배경으로 안고 있던 두 업체 모두 치열한 로비전을 펼쳤음은 물론 1년이 넘도록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이에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던 정부는 결국 경쟁 입찰에 부쳤다. 그러자 흥화공작소는 입찰금액을 단돈 1000원으로 써냈다.

당시 서울 도심부에서 한강까지 택시요금이 4000원이었는데 그 택시비의 1/4에 불과한 금액이었다. 이런 껌값의 건설공사 수주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유당 시절엔 흔한 일이었다. 일단 공사를 따놓고 다음 공사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속셈이었던 것이다.

 
   
 
응찰했던 경쟁사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고 그때 입찰에 참여했던 정주영도 허탈한 심경을 가눌 수 없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곧 정주영을 따라왔고 이변이 벌어졌다. 입찰서를 뜯어 본 내무부 장관은 흥화공작소의 1000원 입찰은 기부공사를 하겠다는 의미로 입찰 자격이 없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결국 두 번째로 입찰가격을 낮게 쓴 현대건설이 자동 낙찰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횡재를 한 것이었다. 쟁쟁한 업체들에 견줘 2위에 해당하는 싼 입찰금액을 써넣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주영이 장비 보강에 온 힘을 쏟았던 기막힌 결과였다. 장비 값이 낮아지니 입찰금액을 당연히 낮출 수가 있었고 이는 경쟁업체에 커다란 경쟁력이 된 것이다. 고령교 공사로 망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지라 현대건설이 단일 공사로는 전후 최대 사업을 수주했을 때 온 나라가 주목했고 건설업계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렵사리 수주한 한강인도교 공사도 그렇게 만만치는 않았다. 미국 원조기관은 한국 건설업체 실력으로는 공사를 진행하기 어렵다며 국제 입찰을 부치자고 제안하면서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고령교 공사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정주영은 공사를 계약기간 안에 해내며 정부와 온 나라 사람들에게 현대건설이란 이름을 당당하게 알렸다.

19585, 한강 인도교 개통 모습은 전국에 방송되며 현대건설은 덤으로 엄청난 광고효과도 얻게 됐다. 한강 인도교 공사를 무사히 마침으로써 현대건설은 공사수주액의 40퍼센트를 수익으로 챙겼다. 고령교 공사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은 물론 업계 선두인 대동건설과 조흥토건, 극동건설, 대림산업, 삼부토건과 함께 6대 건설업체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영세하게 시작했던 현대건설이 드디어 1000여 개 건설업체 맨 앞에서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5대 건설업체 안에 든 것만 해도 깜짝 놀랄 일이어서 현대건설이 건설업계를 이끌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때 큰 몫을 한 것이 역시 장비였다. 고령교 공사에서 쓴맛을 보았던 정주영은 장비를 사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초동 서비스공장에 중기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장비 수리, 조립, 개조는 물론 없는 기계까지 새로 만들어 쓰기까지 했다. 미군으로부터의 장비 구입, 이는 이후 현대건설에 큰 효자 노릇을 했다. 그리고 적어도 현대건설에 있어서 미군은 구세주였던 셈이다.

현대건설은 한강인도교 공사 이후 정부의 도로 개수사업 계획에 따라 국도 포장공사에 활발히 참여해서 국내 업체 가운데 가장 많은 공사 실적을 올렸다. 당시 서울, 부산은 물론이고 온 나라에 걸쳐 엄청난 물량의 도로포장공사를 하기에 이른다. 물론 도로공사에서도 장비 덕을 톡톡히 본 것이 사실이다. 이후 정주영은 온갖 도로공사와 함께 나중에 벌어지는 경부고속도로공사, 울산 조선소 건설공사 때마다 현장을 쫓아다니기 시작하여 현장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주영은 장비 구입에 이어 또 하나 큰일을 벌인다. 건설공사에서 필수인 자재인 시멘트도 직접 생산해내야겠다는 야심찬 생각을 한 것이다. 과연 정주영은 시멘트공장 건설도 무난히 성공할 것인가? (계속)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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