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모르는 백성도 시간을 알게 하라

  • 등록 2014.07.11 19:02:13
크게보기

“세종정신”을 되살리자 4, 백성을 위한 <오목해시계>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34년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혜정교와 종묘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 댔다. 

어머, 저게 우리 임금님께서 누구나 시각을 알 수 있게 만든 오목해시계래.”
우리 같은 까막눈 백성들이 시각을 알 수 있게 시각 표시를 동물로 표시했대. 말 그림을 바로 가리키면 낮 12시래.” 

   
▲ [사진 1] 세종 때 앙부일구를 전시해 놓았던 받침돌, 현재 탑골 공원 한 구석에 있다.

   
▲ [사진 2]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옆의 혜정교터 표시 비석. 세종은 이곳에 오목해시계를 설치하여 오고가는 백성들이 시간을 알게 하였다.

 

   
▲ [사진 3] 종묘에 복원해 놓은 오목해시계와 동물이 표시 된 내부 모습

번다한 길거리에 있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각을 보고 한 마디씩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마아빠 따라 나온 덩치 큰 어린애들은 돌 위에 올라가 시간을 살피기도 했다. 

<사진 1>이 바로 그 당시 오목해시계(앙부일구, 仰釜日晷)가 설치되어 있던 돌이다. 길이가 1미터 남짓인데다가 2단 위에 있어 네다섯 살 아이들까지도 돌 위에 올라가 시간을 알 수 있었다. 혜정교에는 복원이 안 되어 있고 기념 비석만 있고(사진 2), 종묘에는 시계만 복원되어 있는데 그 근방을 몇 년째 공사를 하고 있어 일반인들은 현재 볼 수 없다.(사진 3) 

그 당시 시간을 측정하고 알리는 것은 임금 고유 권한이었다. 세종은 그런 시간을 백성들이 스스로 알 수 있게끔 나눠 준 것이다. 그것도 한자 모르는 백성과 어린아이까지 배려한 시계였다. 오목해시계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9년 전에 문자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만든 훈민정음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시계다. 이 시계가 완성되던 1434년은 문자생활사와 관련시켜 볼 때도 무척 중요한 해이다. 이 해 427일에 세종은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여 책을 비록 나누어 주었을지라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역시 어찌 그 뜻을 알아서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리오라고 하면서 한문으로 된 삼강행실을 만화를 곁들어 펴냈던 것이다 

   
▲ 그림 10-4. 세종 때 앙부일구를 전시해 놓았던 받침돌(탑골공원, 왼쪽 위), 앙부일구 설치 가상도(표준연구소, 왼쪽 아래), 어린이를 배려하지 않고 복원된 후대의 앙부일구 받침대(오른쪽 위), 일구대(한국표준연구소, 오른쪽 아래)

 
그 당시는 하루를 열둘로 나누어 열두 띠 동물로 시간을 나타냈다. (1 참조)

   
 

   
▲ [그림 5] 낮시간을 보여주는 일곱 마리 동물만 나타낸 앙부일구 그림(손민기)

오목해시계는 해시계이므로 새벽 다섯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만 측정할 수 있다. 그래서 새벽 5-7시는 토끼, 7-9시는 용, 9-11시는 뱀, 11-1시는 말, 오후 1-3시는 양, 3-5시는 원숭이, 저녁 5-7시는 닭으로 나타냈다.(그림 참조) 이 시계는 단순한 시계가 아니었다. 다목적용이었다. 농사짓는데 매우 요긴한 절기도 알 수 있었고 천지사방의 방위도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달력은 달을 기준으로 하는 음력이었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데는 해를 기준으로 하는 태양력이 중요했다. 그래서 해를 기준으로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절기였다. 절기는 한 해를 24개로 나눠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 여섯 개씩 있었다. 봄에는 봄이 선다고 하여 입춘, 비가 내리므로 농사를 준비하라는 우수,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 봄 중간이 춘분, 날씨가 맑고 밝은 청명, 단비가 내리는 곡우 등으로 나눴다.(2 참조) 

오목해시계는 이러한 24절기의 중심의 하지와 동지를 양쪽에 그리고 나머지 22절기를 각각 11절기씩 나눠 양쪽에 배치했다.

   
 

   
 

   
▲ [사진 6] 오목해시계 복원품(호서대 소장)

그 당시 방위도 24개로 나눴다. 일단 북남동서(자오묘유)를 기준으로 자계축간인갑묘을진손사병오정미곤신경유신술건해임등과 같이 24방위로 나눠 천지사방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하였다. 

   
▲ 시계 바깥 원의 24방위(위), 북극출지 삼십팔도소여(왼쪽 아래), 앙부일구(오른쪽 아래)

이러한 다목적용 공중 해시계 덕에 백성들은 시간을 쉽고 정확하게 알 수 있어 생활이 편리해졌고 더욱이 농사를 더 과학적으로 지을 수 있어 더 많은 곡식을 거둬들여 태평성대를 열 수 있었다. 이러한 기쁨을 당시 오목해시계 제작 기록을 맡은 김돈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무엇을 하든 간에
때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겠거늘
밤에는 물시계(자격루)가 있지만
낮에는 알 길이 없더니
구리를 부어 기구를 만드니
형체는 가마솥과 같고
반경에 둥근 틀을 설치하여
남과 북이 마주하게 하였다
구멍이 꺾임을 따라 도는 것은
점을 찍어서 그러하다
내면에는 도수를 그어
둥근 하늘의 반이 되고
동물신의 몸을 그리기는
문자 모르는 백성 때문이요
각과 분이 또렷한 것은
햇볕이 통하기 때문이요
길가에 두는 것은
구경꾼이 모이는 때문이니
이제 비로소
백성이 일을 시작할 것을 알게 되리라_김돈_1434
 

 

김슬옹 교수 tomulto@hanmail.net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