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건설, "화난 소백산 귀신 돌려세워라"

2014.07.12 21:08:58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⑩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독일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 정식 이름이 라이히스 아우토반(Reichs Autobahn)’이지만 우리는 흔히 아우토반(Autobahn)’이라고 부른다. 도로의 너비는 18.520m이고, 길 가운데는 3.55m 너비의 중앙분리대가 있다. 1932년 쾰른과 본 사이를 왕래하는 최초의 아우토반이 완공됐는데 오늘날에는 총연장 11000에 이르며 독일 땅의 대부분에 미치고 있다. 제한 속도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의 하나이지만, 위험지역에서는 100또는 130의 제한속도 표지가 붙는 경우도 있다. 

지난 2006년 월드컵 직전 공연단 취재차 가봤던 독일, 일반도로에서는 철저히 제한속도를 지키며 다니던 자동차들은 아우토반에만 들어서면 대부분 시속 200로 달렸다. 빨라야 110를 달리던 한국에서 200를 달리니 오금이 저리기도 했지만, 짜릿한 쾌감도 순간 느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을 방문했고, 이 아우토반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본에서 쾰른으로 가는 20구간의 아우토반을 지나가면서 박 대통령은 두 차례나 차를 멈추고 독일 관계자들에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한다. 어떻게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공사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등을 물으며, 적바림(메모지)에 꼼꼼히 적었다.

이후 고속도로 건설계획 조사단이 꾸려졌고, 박 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에 온 정신을 쏟았다. 어쩌면 반대하던 사람들의 주장대로 박 대통령은 정치적 목적도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마무리되면서 수송해야할 화물이 급격히 늘어났고, 자동차가 분담해야할 짧은 거리의 화물 수송마저도 철도가 담당하고 있었기에 박 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문제는 우리에겐 아직 고속도로를 건설할 만한 기술이 없었고, 엄청난 자본과 시간이 필요했으며, 만일 실패했을 땐 그 후유증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일이었기에 거의 모두가 반대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재정파탄이 날 것이다.”,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이다.”는 물론 심지어 대원군이 경복궁을 무리하게 짓다가 쫓겨났듯이 박정희도 경부고속도로 건설하다 쫓겨날 것이다.”라는 악담까지 쏟아졌다. 더 큰 문제는 자금을 빌려와야 하는 세계은행마저 고속도로를 다닐 만한 자동차도 없는 한국 실정에 고속도로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라며 차관마저 거절했다. 산 넘어 산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해당 정부기관들에 건설비용을 산정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와 함께 민간 건설업자지만 태국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는 현대건설에도 건설비용 산출을 의뢰했다. 정주영은 의뢰를 받자마자 토목 담당 중역들과 함께 거의 한 달을 매달렸다. 5만분의 1 지도를 들고 서울과 부산 사이의 산과 들판 그리고 강을 이 잡듯이 돌아다녔다. 현대건설은 이미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는데다 5만분의 1 등고선까지 조사했기에 자신만만했다. 196711월 하순, 다섯 군데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안이 제출되었다.

이때 현대건설이 내놓은 공사비 예산은 380억 원이었다. 이에 견주어 건설부 안은 650억 원, 재무부 안은 330억 원, 공병감실 안은 490억 원, 서울특별시 안은 180억 원이었다. 서울 시내 도로 건설 개념으로 180억 원을 제출한 서울특별시 안은 아예 고려 대상에서 빠졌으며 태국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는 현대건설 안이 가장 타당성이 있다하여 이를 기준으로 400억 원을 책정하고 예비비 30억 원을 더해 모두 430억 원의 공사비가 계상되었다.  

드디어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박 대통령과 정주영은 손을 잡았다. 196821일 우여곡절 끝에 경부고속도로 첫 번째 나들목(톨게이트) 근처에서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졌다. 이때 정주영은 가슴 벅차오르는 흥분과 감동을 멈출 수 없었다고 회고담을 얘기하기도 했다. 성공하면 현대건설의 엄청난 도약을 이루어낼 수 있겠지만 실패하면 나라안팎의 감당하기 어려울 비난과 책임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정주영이 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생각한 것은 기업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나라와 사회를 위해 필요한 만큼의 이바지도 해야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기업의 목표는 이익과 고용 창출이 우선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빠듯한 공사비라도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탈법과 부실공사만 빼고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공사기일 단축이었다. 공사기일 단축을 하는 만큼 나라밖에서 빌린 외채(外債)와 나라 안에서 조달한 내자(內資) 모두 이자를 줄일 수 있고, 노임 지급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닌가? 

   
▲ 1968년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 모습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공사를 기계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대건설은 미군에서 불하받은 낡은 중장비들만 가지고 있었으니 새롭게 기계화를 보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자금 800만 달러어치의 중장비를 사들였다. 그 무렵 국내 중장비는 모두 1400대 정도였는데 현대건설이 새로 사들인 중장비가 무려 1900대였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투자였다. 그렇게 중장비를 사들이는 바람에 현대건설에 한때 수지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1970년 이후는 이것이 오히려 경영합리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정주영은 간이침대를 가져다 놓고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자신이 현장에 머물러 있는 만큼 공기를 단축하고, 공사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신념에서였지만 실은 당시 정주영은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잠이 오지도 않았다고 후일담으로 고백했다. 그는 덜컹거리는 44년형 지프차를 타고 다니며 눈을 붙이곤 했는데 그렇게 하면 자신은 못 잔 잠을 쪽잠으로 때울 수 있지만 일꾼들은 자신의 지프가 돌아다니니 긴장한 채 일손을 놓을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여러 업체가 나누어 맡는 방식이었다. 현대건설은 서울에서 오산까지 150, 대전에서 옥천까지 28를 맡아 전체 구간의 5분의 2를 담당했다. 태국 고속도로 경험을 인정받은 데다 박 대통령에게 받은 신뢰도 작용한 덕분이었다. 처음엔 거침없이 공사가 진척되었다. 19681221일 시공 열 달 만에 서울에서 수원 사이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연이어 1230일에는 수원~오산 사이, 19691219일 대구~부산 사이가 개통되었다. 이런 공사 진척은 당시로서는 단연 세계기록이라고 했다. 이러니 공사기간 단축 전망은 밝았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만만한 게 있던가?  

문제는 소백산이 가로 놓여 있는 옥천군 이원면과 영동군 용산면 사이 4나 되는 당제터널이었다. 이 구간은 토질이 단단한 경석(硬石)지대가 아니라 절암토사(節岩土砂) 곧 모래와 흙으로 된 퇴적층(堆積層)이어서 난공사였다. 당제계곡 쪽에서 20m 파고 들어가자 벽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순식간의 사고로 인해 인부 셋이 죽고 부상자도 한 명이 나왔다. 파기만 하면 무너져 내리니 인부들은 소백산의 귀신이 화났다.”라고 하며 현장에 접근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물론 공사장을 떠나는 사람이 늘어만 갔다.

   
▲ 경부고속도로 공사 최대의 어려움이었던 "당제터널" 현장

터널을 뚫는 것은 하루 10m도 안될 정도였다. 이 당제터널을 뚫어야만 전체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될 수 있는 것인데 전문가들은 당제터널을 뚫는 기간이 석 달, 심지어는 반년이 걸린다는 전망을 내놓는 이도 있었다. 

무려 열세 번 무너지는 사고를 겪은 뒤에도 상행선 590m 가운데 공사 진척은 350m에 머물고 있었다. 그야말로 비상이었다. 대통령이 시퍼렇게 눈을 부릅뜨고 불같은 독촉을 하고 있으니 건설부장관은 일주일에 한 번, 도로국장은 사흘에 한번씩 나타날 정도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총칼만 없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어떻게 현대건설은 이 총알 없는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계속)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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