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때는 세종 12년인 143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충청도 어느 시골 허름한 집 앞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웅성거렸다.
“어머머. 우리 임금은 역시 성군이셔. 토지세에 관한 법을 만드셨는데 집집마다 그 법에 대한 의견을 들으신대.”
“우리 같은 무지렁이한테도 의견을 듣는 세상이라니. 참 살기 좋은 세상이네.”
모인 백성들은 상기된 얼굴로 한 마디씩 하느라 즐거운 표정이었다. 관청에서 관리가 어떤 종이에다가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찬반 의견을 묻던 중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 여론 조사였다. 세종은 관리의 부정으로 농민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논밭에 대한 세금 제도(전세제도, 공법)를 개혁하기 위해 1430년(세종12) 3월부터 8월까지 여론조사를 했다. 전국 17만여 명의 백성이 투표에 참여하여, 9만 8,657명이 찬성, 7만 4,148명이 반대하는 결과를 얻어 냈다.
세종은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고 했을 만큼 먹고 사는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농사짓는 법을 잘 가르쳐 농사를 과학적으로 짓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농사짓는 땅에 대한 세금을 백성들에게 두루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세종은 이런 깊은 고민이 깊다보니 1427년에는 인재를 뽑는 과거 논술 시험으로도 냈다. 세종은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서 문과 시험 문제를 직접 출제하여 유생들에게 말하였다.
“예로부터 제왕이 정치를 함에는 반드시 한 세대의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니, 특히 논밭에 대한 세금은 어찌하면 좋겠는가? 우리 태조 대왕께서는 나라를 만들고 먼저 토지 제도를 바로잡으셨고, 태종 대왕께서도 선왕의 뜻을 따라 일반 백성들을 보호하셨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으로 이러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니, 우러러 선왕들의 훈계를 생각하여 잘 다스리려 하는데 그것이 쉽지는 않노라.
일찍이 듣건대 다스림을 이루는 핵심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하니, 백성을 사랑하는 시작은 오직 백성에게 취하는 제도가 있을 뿐이다. 토지 제도는 해마다 중앙 관리를 뽑아서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손실을 실지로 조사하여 제대로 세금 매기기를 기하였으나 일부 관리들은 나의 뜻에 부합되지 않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지 아니하여, 나는 매우 이를 못 마땅하게 여겼다.
맹자는 말하기를, ‘어진 정치는 바람직한 토지 세금 제도로부터 시작된다.’라고 하였으며, 어떤 이는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어찌 부족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비록 덕이 적은 사람이나 이에 간절히 뜻이 있다. 그대들은 경전에 통달하고 정치의 큰 흐름을 알아 평일에 이를 외우고 토론하여 익혔을 것이니, 모두 진술하여 숨김이 없게 하라. 내가 장차 채택하여 시행하겠노라.” _세종 9년 3월 16일
▲ 《세종실록》 9년(1427) 3월 16일 기록 “인정전에 나아가서 문과 책문의 제를 내다”
실제 과거 논술 시험 답안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종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신하들과 숱한 토론을 거쳤다. 이 다음해인 세종 10년인 1428년 1월 6일에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토지 세금에 관한 공법이 한 번 시행하게 되면 풍년에는 많이 취하여 걱정은 비록 면할 수 있겠지마는, 흉년에는 반드시 근심과 원망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하면 옳겠는가?”
이런 고민 끝에 1430년 3월 5일 새로운 공법(토지 세금법)에 대한 여론 조사를 지시하였던 것이다. 이날 토지 세금을 담당하는 호조에서 아뢰기를,
“전하, 관리들이 논밭을 직접 방문하여 농사 상태를 조사하여 세금을 매기다 보니 관리들의 근무 태도에 따라 세금이 달라 불만이 많았사옵니다. 어떤 관리는 농사 결과를 지나치게 부풀려 세금을 많이 걷고 어떤 관리는 그 반대인 경우도 있고 어떤 관리는 돈을 받고 세금을 줄여 주는 등 잘못이 많사옵니다. 땅의 크기에 따라 규칙적으로 세금을 매기시옵소서. 원컨대 논이나 밭 1결마다 조 10말을 거두게 하되, 다만 평안도와 함길도만은 1결에 7말을 거두게 하여, 예전부터 내려오는 폐단을 덜게 하고, 백성의 생계를 넉넉하게 할 것이며, 그 태풍, 물난리, 가뭄 등으로 인하여 농사를 완전히 그르친 사람에게는 세금을 전부 면제하게 하소서.”
세종은 이런 건의를 받고 생각에 잠겼다. 관리가 땅과 수확한 것을 제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막을 수 있지만 이렇게 똑같이 적용하다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세종은 이렇게 명령을 내린다.
"정부 중앙 관청과 주요 관청, 지방 관청의 주요 관리, 일반 민가의 백성들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 보고하라."
이렇게 하여 여론조사가 이루어지던 7월에 토론이 이루어졌다. 먼저 여론조사 책임자인 호조 판서 안순이 먼저 말했다.
“일찍이 공법의 편의 여부를 가지고 경상도의 수령과 백성들에게 물어본즉, 좋다는 자가 많고, 좋지 않다는 자가 적었사오며, 함길·평안·황해·강원 등 각도에서는 모두들 불가하다고 한 바 있습니다.”
라고 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직접 찾아 조사할 때에 각기 제 주장을 고집하여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편리하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가 심히 우려하고 있다. 각도의 보고가 모두 도착해 오거든 그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사해서 폐해를 구제하는 등의 일들을 관리들로 하여금 깊이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_세종 12년(1430년) 7월 5일
▲ 세종은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림 오수민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실제 여론 조사를 모두 듣는 게 중요했다. 세종은 특히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렇게 해서 장장 다섯 달 동안의 조사 끝에 호조는 8월 10일, 17만여 명의 백성들이 투표에 참여하여, 9만 8,657명이 찬성, 7만 4,148명이 반대하였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런 결과 보고와 더불어 다양한 의견이 보고되고 다음처럼 끊임없이 토론이 이루어졌다.
“공법은 오늘의 현실로 보아 행함직한 것으로 봅니다. 신이 민간에서의 가부의 의논을 듣자오니, 평야에 사는 백성으로 전에 납세를 중하게 하던 자는 모두 이를 즐겨서 환영하고, 산골에 사는 백성으로 전에 납세를 경하게 하던 자는 모두 이를 꺼려 반대하고 있사온데, 이는 각기 민심의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다고 말하는 백성들에게는 그 뜻에 따라 공법을 행하고, 좋지 않다고 말하는 백성들에게는 그 뜻에 따라 전대로 행하소서.” _전 병조 판서 조말생·전 판목사 황자후 등
“공법이 비록 좋긴 하오나 땅이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않고 전부 행한다면, 백성들 사이에는 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걱정하는 사람이 자연 있게 될 것입니다. 땅을 조사하여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여 땅지도를 만든 뒤에, 공법을 시행할 만한 땅에는 공법을 시행하고, 그 나머지의 척박한 논밭으로 공법을 시행하기에 부적당한 땅은, 매해 반드시 경작자의 신고를 받고 답사 답사하여 그 정도에 따라 법을 시행하여, 두 가지 법을 겸행토록 하소서.” -전 동지총제 박초
“먼저 경기의 한두 고을에 시험한 다음 각도에 모두 시행토록 하소서.” _집현전 부제학 정인지
“땅을 상중하로 나누고 ‘하’ 땅은 다시 2등으로 나누어 1결마다 부담을 더 주거나, 혹은 10두를 감하거나 하게 하소서.” _직제학 유효통
“먼저 산골과 평야 각 수십 개의 고을에 그 가부를 시험하게 하소서.” _직전 안지
“2등의 땅을 다시 조사해 정할 것 없이 매 등급마다 또 3등으로 나누어서 9등을 만들고는, 최고의 땅 세는 1결마다 조 16두를 내게 하고 한 등급에 1두씩을 줄여 주면 가장 안 좋은 땅에 가서는 다만 8두를 거두게 될 것이요, 평안·함길도는 다만 6등으로 만들고 가장 좋은 땅의 세를 1결에 11두를 거두고, 한 등급에 1두씩을 체감하면 가장 안 좋은 땅에 가서는 6두를 거두게 되어 거의 알맞게 될 것입니다.” _봉상시 주부 이호문
“공법은 그 시행에 앞서 먼저 상·중·하 3등으로 전지의 등급을 나누지 않으면, 기름진 땅을 점유한 자는 쌀알이 지천하게 굴러도 적게 내고, 척박한 땅을 가진 자는 거름을 제대로 주고도 세금마저 부족하건만 반드시 이를 채워 받을 것이니,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어, 그 폐단이 다시 전과 같을 것이오니, 먼저 3등의 등급부터 바로 잡도록 하소서.” _집현전 부제학 박서생·전농 소윤 조극관·형조 정랑 정길흥
이외에도 의견이 끝이 없었다. 최종 찬성 쪽이 많았지만 이런 다양한 의견과 반대쪽 견해도 많아 쉽게 이 제도를 시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1436년 5월 22일, 황희 등을 불러서 다시 공법을 의논하게 하였다. 각 도를 나누어서 3등으로 하되, 경상·전라·충청도를 상등으로 하고, 경기·강원·황해도를 중등으로 하며, 평안·함길도를 하등으로 하고, 토지의 품등은 한결같이 3등으로 나누어, 지나간 해의 손실수와 경비의 수를 참작해서 세금을 정하였다
7월 11일에는 하삼도에 우선 공법을 실시하여 더욱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친다. 이런 검증 작업을 거쳐 세종 25년, 1443년 11월 2일, 드디어 호조에 공법을 실시할 방도를 묻고 이를 온 백성에게 알릴 것을 지시하였다.
이렇게 법을 진행한 뒤에는 단호하게 집행해 나갔다. 한 달 뒤인 1443년12월 17일, 좌정언 윤면이 흉년으로 공법의 수정을 제안했으나 세종은 “이미 대신과 더불어 익히 의논하여 정하였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라고 거절하였다.
공법은 단순한 법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였다. 모든 백성들에게 공평하면서도 가난한 백성들이 세금으로 인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백성들과 직접 소통했던 세종, 이런 정신이 있었기에 진정한 소통의 문자 훈민정음도 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