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의 방북 소떼는 1001마리였다...그 속뜻은?

2014.10.25 06:37:47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25>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정주영의 고향은 강원도 통천, 현재는 맘대로 갈 수 없는 북한 땅이다. 정주영은 회고록에서 고향 통천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강릉에서 바다를 끼고 곧장 쭈욱 올라가면 속초・화진포・고성・통천읍이 있고, 바로 그 위에 관동팔경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치는 해금강 총석정이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송전해수욕장이다. 솔밭이라는 이름 그대로 키 작은 다복솔이 온통 뒤덮이고, 푸르른 바다를 끼고 끝없이 이어진 새하얀 모래밭, 봄이면 온통 붉게 피어나는 산기슭의 진달래들, 명사십리 해당화보다 더 화려한 해당화…….” 

회고록에 이렇게 표현한 것을 보면 그 어떤 고장보다도 아름다울 것이고, 정주영으로서는 무척이나 돌아가고픈 고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소 판 돈 70원을 훔쳐 나온 고향을 대충 갈 수는 없는 노릇. 천하의 정주영은 어떤 모습으로 고향에 가게 될까?  

“정주영 회장 선생을 환영합네다.” 

노동당 허담의 방북 제안을 받아들여 정주영이 북한 땅을 밟은 것은 그가 고향을 떠난 지 40년만인 1989년 1월 23일이었다. 이때 정주영은 남한과 북한이 함께 금강산을 개발해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정주영 회장 선생을 환영합네다.”라고 했던 허담은 쌍손을 들어 환영했다. 그러나 금강산 개발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며칠 동안 논의가 오고갔지만 너무 오랫동안 헤어져 살아온 탓으로 문화가 다르고 사상이 다르기에 합의점에 쉽게 도달할 리가 없었다. 

“돈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외국 사람들 돈을 끌어들이면 문제없지요.” 

그러나 정주영의 이 말에 북한 사람들은 오히려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제 돈은 안 들이고 남의 돈으로 투자해서 재주를 넘을 속셈이라며 의심을 한 것이다. 정주영은 이런 북한 사람들을 차근차근 설득했다. 

“내가 미국에 자동차를 팔려고 공장을 지을 때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미국 사람들 돈을 썼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홍보도 해주었습니다. 우리 금강산도 외국 돈을 끌어들여 호텔도 짓고 온천도 만들고 그래야 그들이 옵니다.” 

그렇게 북한 사람들을 설득하고 난 다음 정주영은 금강산을 개발하면 반드시 군사분계선을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뜻밖에 북한도 관심을 보이며 두 달 뒤인 4월에 다시 방문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후 남북한 당국 사이 분위기는 정주영이 북한에 갈 때와 달리 아주 차가워졌다. 정주영이 어렵게 성사시킨 금강산 개발은 어쩌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 되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곧 북한에 다시 갈 것이라고 믿었다. 오히려 다시 북한에 갈 때를 위해 소 150마리를 사서 서산 농장에 보내놓고 자주 그곳에 내려가며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흘러도 북한에 갈 수 있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쉽게 포기할 정주영이 아니었다. 1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뒤인 1998년, 정주영은 세상이 깜짝 놀라는 발표를 했다. 

“소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갈 것이다.” 

그러나 이즈음 남한과 북한 사이 차가운 기운은 계속되었고, 경제 협력도 물론 끊겨 있던 때였다. 따라서 뜻밖의 발표는 국민들과 세상이 경악했다. 어쩌면 이 발표가 그저 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1998년 2월,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한과 북한 사이는 봄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서서히 당국 간 대화가 이루어지자 정주영은 앞장서서 대북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나아가 깜짝 발표를 했던 소떼 방북을 추진했고, 소떼를 몰고 갈 때 반드시 판문점을 통과하겠다고 했다. 민간인 가운데 처음으로 남북 당국의 정식 절차를 밟아 판문점을 통과하여 경제의 힘으로 분단의 벽을 허물고 통일의 물꼬를 트고 싶었던 것이다.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드디어 남북 당국은 이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1998년 6월 16일 소떼를 실은 화물차의 긴 행렬은 서산을 떠나 다음날 새벽 판문점에 도착했다. 정주영은 반세기 동안 굳게 닫혀 있던 판문점의 문을 최초로 열고 건너가는 것이다. 소 떼 방문은 전 세계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고, 판문점에는 언론사 취재진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문명 비평가인 기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찬양하기까지 했다. 

1001마리의 소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의미 

정주영과 함께 북으로 간 소떼는 1차로 500마리였다. 그러나 이때 500마리는 500마리가 아니었다. 정주영이 서산농장의 암소들을 수정시키도록 지시를 해놓았기에 이미 100여 마리의 암소들은 새끼를 밴 상태였다. 정말 치밀한 정주영이었다.  

정주영은 2차로 북한을 방문할 때는 501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갔다. 그런데 왜 1, 2차 방북 소떼가 1000마리가 아니라 1001마리일까? 1000은 이미 끝이 될 수 있지만 1001은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1000마리 소 떼 방북은 그걸로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대북 사업이 시작되는 것은 물론 남북통일을 위한 첫걸음이라는 정주영의 위대한 뜻이 담긴 것이었다. 

그의 방북은 꽁꽁 얼어 있던 남북관계를 단숨에 훈훈한 분위기로 바꿔 놓았다. 정주영은 1998년 10월 민간 기업인 가운데 최초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고 이 자리에서 정주영은 기어코 금강산 개발을 성공시켰다. 이미 이때 정주영의 나이 84살이었다. 정주영의 생각은 단순히 금강산 개발만은 아니었다. 그는 장차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계하기 위한 남북철도 개통사업을 이미 꿈꾸고 있었다. 

통일비용보다 분단비용이 더 심각하다 

남북한 장벽을 뚫어준 정주영의 철학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었다. 그는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까지 통일비용에 대한 부담을 크게 가지는 것 같은데 아주 잘못된 생각이야. 왜 엄청난 분단 비용은 생각 못해? 매년 늘려야 하는 국방비 부담과 한창 나이에 학업이나 일 할 나이에 모든 것을 중단하고 군복무를 해야 하는 젊은이들을 생각해봐.”라고 주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통일이 가져다주는 이익 가운데 북한에는 발전이나 제련 등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유연탄, 철광석, 동, 희토류 등 중요 광물 자원이 약 7000조 원어치가 있다고 알려졌는데 이런 자원들은 남한에는 거의 없어서 지구 반대쪽 브라질에서까지 막대한 외화를 쓰며 수입해 온다”며 그런 자원과 북한의 노동력은 엄청난 통일이익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정주영의 주장에는 상당히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현재 정주영이 어렵사리 이루어놓은 금강산 개발과 관광은 중단된 지 오래고 더구나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계하기 위한 남북철도 개통사업도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120살까지 살면서 많은 것을 이루려 했던 정주영이 일찍 타계하지 않고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통일대통령”의 꿈을 꾸면서 도전했던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떻게 변했을까? 

소 판 돈 70원을 천문학적으로 뻥튀기한 소떼 1000마리의 주인공 정주영이 지금 간절히 그리워지는 건 나만의 감상일까?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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