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한글 탄압과 능이 되지 못한 연산군묘

  • 등록 2017.05.24 11: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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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자 김슬옹과 함께 떠나는 한글 여행 5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서울시 도봉구 방학로 17길 46호 132-854
1476(성종 7)∼1506(중종 1). 조선의 제10대 왕./재위 1494∼1506.
 
 
◓ 장소

 
서울 창동역에서 우이동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 채 10분도 안 돼 방학로 쪽으로 들어서면 ‘연산군 묘’라는 교통표지판 글씨가 보인다. 바로 방학로 17길 옆 야산에 조선시대 10대왕으로 가장 포악했던 비운의 임금, 한글 탄압의 악명을 떨친 연산군 무덤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세종대왕의 한글 연구를 도왔던 한글 공로자인 정의공주 무덤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어 한 지역에 한글 공로자와 탄압자가 같이 있는 셈이다.
 
또한 도봉구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일제 말기에 기적적으로 소장하여 고이 보관해 온 간송 전형필 선생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무덤이 있는 야산 옆은 원당 공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지만 비운의 왕, 포악스런 왕의 무덤이라 그런지 무덤 자체는 쓸쓸해 보인다.
 
왕족의 무덤은 크게 능과 원과 묘로 구분한다. 능은 왕과 왕후의 무덤이며 원은 세자, 세지빈 또는 왕을 낳은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묻힌 곳을 가리킨다. 묘는 그 외의 왕족의 무덤을 말하는데 연산군은 쫓겨난 임금이기에 묘라고 한 것이다. 연산군 시절의 기록인 실록도 다른 임금은 모두 ‘-실록’이라 부르는데 연산군의 경우는 연산군일기라 부른다.



◓ 인물

 

연산군은 조선시대 성군으로 평가받고 있는 9대 임금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첫 아들로 태어났다. 성종은 세종에 견줄 만큼 학문을 좋아하고 정치를 잘 했다. 그런데 여자를 좋아해서 부인이 많았고 건강이 안 좋아 38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 바람에 연산군이 1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은 예쁘기로 소문났던 후궁 윤씨 사이에 태어났다.
 
연산군의 엄마는 시기 질투로 사약을 먹고 죽었는데 이때는 연산군이 두 살밖에 안 돼 친엄마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몰랐다. 왕이 되고서도 한동안은 몰랐다. 연산군은 원래 특출나지는 않지만 다정다감하고 시짓기를 좋아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다.
 
왕이 되던 1494년에는 연산군은 전국의 모든 도에 어사를 파견하여 지방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이때는 연산군의 즉위 초 올바른 정치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던 시기이다. 백성들의 글과 지방에서의 글, 투서 하나하나까지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백성들의 안녕을 꾀하였다.
 
1494년에는 세종대왕이 실시했던 사가독서제도 다시 실시하였다. 사가 독서제도는 세종 때, 학자적 소양이 있는 관료에게 조용한 산사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 하게 한 제도이다. 이러한 사가독서제도를 다시 실시하면서 더욱 깊은 학문적 연구와 좋은 책의 편찬에 힘썼다.
 

◓ 사건
 
연산군은 조선시대에 한글을 위해 아주 애를 많이 쓴 성종 임금의 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 성종은 세종, 세조 다음으로 한글 보급을 위해 애쓴 임금이다. 결국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쌓아 놓은 한글 공적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연산군이 언제부터 어떻게 한글 탄압의 원흉이 되었는지 역사 기록에 또렷이 잘 나와 있다. 연산군은 임금 자리에 있은 지 10여 년이 될 무렵, 생모인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잔인한 복수를 결심하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갈수록 정치가 포악해지자 임금을 원망하는 민심이 날로 더해 갔다.
 
결국 연산군은 왕위에 있는지 10년 되던 해인 1504년에 7월에 자신을 욕하는 투서가 한글로 주요 거리 곳곳에 나붙기 시작했다. 양반들은 대놓고 임금을 욕하지 못했지만 어려운 한문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일반 서민층은 쉬운 한글로 몰래 벽에다 임금을 욕하는 벽보를 붙이고 달아나곤 하였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네가 임금이냐.
그러다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런 벽보를 직접 본 연산군이 분을 참자 못하고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언문(한글)을 사용하는 사람은 기훼제서율(임금이 발행한 문서를 망가뜨린 죄를 다스리는 법)로,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은 사람은 제서유위율(임금의 지시를 위반한 사람을 다스리는 법)로 벌을 줄 것이다. 조정 관리들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언문구결책(한문책을 언문으로 읽기 쉽게 만들어 놓은 책)을 다 불사르되 한문을 번역한 언문책 따위는 금하지 말 것이다.
 
기훼제서율은 곤장 100대부터 참수형까지 내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법이었다. 제서유위율도 곤장 100대를 때리는 역시 중벌이었으니 그 당시 한글 관련 책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벌벌 떨었을지 짐작이 간다. 많은 사람들은 오금이 저려 스스로 없애고 감추고 했을 것이다. 그 당시 한 장면을 상상해 보면 이런 장면이 벌어졌을 것이다.
 
어느 양반집 이조에서 근무하던 박대감이 급히 퇴청하여 집에 들어선다.
“여봐라, 게 있느냐.”
“네. 대감마님. 어인 일이오니까?”
“언문책을 모두 가져오너라. 모두 태워야 한다.”
급히 부인이 나타난다.
“영감 어인 일이시오.”
“오, 부인 부인이 보던 언문책을 모두 가져 오시오.”
임금께서 언문으로 된 책을 모두 불사르라는 명령을 내리었소.“
 
“언문책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불사른다는 말이오.”
“부인도 알잖소. 지금 임금 정신이 제 정신이오? 임금을 욕하는 벽보가 언문으로 나붙은 거 부인도 알잖소. 이것을 보고 임금이 머리가 돈 모양이오.”
“몰래 숨기면 되지 굳이 불태울 필요가 있나요. 영감.”
“무슨 얘기요. 만일 발각이라도 되면 참수형까지 가능한 게 이번 명령이오.”
부인도 이 얘기를 들으니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얼른 달려가 벽장에 넣어 두었던 언문책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책만 불사른 것이 아니라 언문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쓰지도 못하게 했다. 또한 언문을 알기만 해도 적발해서 벌을 주고, 언문을 아는 자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는 자까지도 죄를 주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리자 한글로 쓰인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벌벌 떨어 실제 불태우거나 감추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때는 아버지 성종이 《삼강행실도언해본》을 전국 방방곡곡에 보급해 한글 관련 책들이 꽤 퍼진 때였다.
 
연산군은 그만 이성을 잃고 흉포해졌다. 어떤 해는 양주, 파주, 고양 등 도성에서 가까운 고을의 인가를 헐어 사냥터로 만들고 100리 안에 금표를 설치하고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또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이 외에도 왕의 향락을 뒷받침하기 위해 온갖 세금을 거두어 백성들의 고통이 심화되면서 연산군을 비난하는 괘서와 방문이 곳곳에 나붙고 궁중에 투서가 날아들었다. 이들 괘서와 투서들이 거의 언문으로 되어 있어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운 것이다.
 
다행이 웬일인지 연산은 한문책을 번역한 한글 책은 그냥 두어도 괜찮다고 하였다. 언문 사용을 금하였으면서 한문을 언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금하지 않았다는 것은 언문 사용을 금지하여 ‘직접적으로 언문을 사용’한 구결 단 책은 불살라 없애지만, 어려운 한문을 공부하기 쉽게 언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허락하겠다는 말이다.
 
모순이기는 하지만 언문을 배척하면서도 그 효용성만큼은 연산군도 인정했다. 실제로 연산군은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임금이기도 하였다. 그것 또한 한글을 좋아하던 아버지 성종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한글의 효용성을 지켜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도 있었다. 궁중 잔치를 위해 뽑아 들였던 당시 노래잘하고 춤 잘 추던 여인들에게 일부러 한글을 가르쳐 한글 노래 가사를 익히게 했다. 연산이 직접 한 일이었다. 결국 자신의 쾌락을 위한 한글은 즐겨 사용하고 장려하면서 자신을 비판한 한글은 밉게 보고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렇게 쫓겨난 연산 임금에 관한 기록인 연산군일기는 아무래도 잘한 점보다는 잘못한 점을 부각하고, 새로이 등극한 세력을 칭송하기 마련이다. 연산군에 대한 기록들도 연산군의 그릇된 행실과 폭정들에 대한 기사가 두드러지고 연산군 시대의 정치ㆍ사회 상황은 다른 시대보다 짧게 기록되었다. 때문에 연산군 시대의 자료에서는 언어생활의 발전을 도모한 것은 발견하기 힘들고, 다만 ‘언문 사용 금지’로 인한 한글 수난이 더욱 크게 드러날 따름이다.
 
김슬옹 교수 tomul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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