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은 1948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애국가 고(愛國歌 攷)>(2)에서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한탄하며,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 발행된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전》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으로 쓴 것이다.
“뚜렷한 역사의 사실을 조작할 수는 없다.”라고 전제하고, “윤치호의 처지가 소위 대동아전쟁을 통해 그에겐 불리한 관사가 붙게 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의 작이 아닌 것을 자작으로 위서할 필요는 만무한”것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의 근거는 바로 윤치호가 1945년 9월 자필로 애국가 4절을 남긴 <가사지>이다.
“고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밝힐 건 바로 밝히고 시정할 것은 바로 시정해야 한다. 위정당국은 이 사실을 규명하여 공포함으로써 국민 교육의 상식에 벗어나지 않게 하여야 될 것”(동아일보, 1948. 10. 7)
이후 이 <가사지>를 주목한 이는 신학자 백낙준(白樂濬/1896~1985)이다. 그는 소론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고>(윤치호선집 2, 1999)>에서,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외증(外證)으로 “좌옹 자신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자기의 작이라고 서면으로 증언한 바가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주장은 기독교 서지학자 윤병춘(尹春炳/1918~2010) 목사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가 임종하시기 전에 자녀들의 권유로 쓴 친필 애국가는 일제치하에서 애국가 작사자가 자신임을 알리지 못했던 것을 조국 해방 후에 밝히려 했던 것이며,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큰 뜻을 자손 대에서 이어주기를 바라는 유언장이기도 했다.(윤병춘, <윤치호선집 2>, 1999)
또한 최근에는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도 이 <가사지>를 증거로 다음과 같이 윤치호를 작사자로 인정했다.
“애국가 노랫말을 지은 사람이 윤치호란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신문은 윤치호 자신이 지은 애국가를 손수 붓으로 써서 '윤치호 작사'라 해 놓은 것을 사진으로 공개한 것이다. 이래서 지금까지 누가 지었는지 확실히 몰랐던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1955년 윤치호 가족으로부터 <가사지>를 사본화 하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제(解題)를 달아 놓았다.
“愛國歌 / 분류 書畵 > 筆蹟 / 등록번호 史資 2220 / 본문 愛國歌 / 대한제국 때의 정치가 佐翁 尹致昊(1865∼1945)가 애국가 가사를 자필로 쓴 원고. 사진 자료의 끝 부분에 一九0七年 尹致昊 作이라고 쓰여 있음. / 1(2), 한글 / 소장; 서울특별시 尹永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종합데이터베이스 검색, ‘애국가’)
현 애국가 가사를 첫 기록인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자필 <가사지>, 그리고 현재 것을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 일세
四 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하세
자필 <가사지>의 가사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도록
하느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2 남산위해 저소나무 철갑을 두룬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3 가을하날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
4 이기상과 이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하세
현 애국가 4절 가사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3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4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고딕 표기는 필자)
이상에서 살폈듯이 어휘상의 변이는 다섯 곳이 확인된다. 그러나 4절의 ‘님군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여’라는 수정을 제외하고는 주제에 영향을 주지는 못 했다. 이 부분의 수정은 3ㆍ1운동기에 민중들에 의해 수정된 것으로 1945년 윤치호도 이를 수용하여 <가사지>에 바꿔 기록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가사지>는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논점을 제공해 준다. 하나는 ‘尹致昊 1907年 作’으로 기록되어 작사자 스스로가 ‘내가 작사하였다’는 진술을 남긴 것으로 다른 작사자 거론자들에게는 없는 증거이다. 둘은 1937년부터 쓰기 시작한 신 철자(綴字/국어정서법)법을 이미 1908년 재판에서부터 앞당겨 실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는 점이다. 곧 ‘ㅣ’와 ‘ㅡ’의 합음으로 ‘ㅏ’(阿)음과 같은 구(舊)철자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셋은 흔히 이 <가사지>를 죽기 직전 의도적으로 남겼다는 억측을 교정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딸이 해방을 맞아 서울에서 개성에 있던 부친을 만나 기념으로 남겨 달라고 요청하여 작성된 시점은 해방으로부터 불과 한 달 정도의 시차일 뿐이니, 12월 초 치과를 다녀오다 뇌힐혈로 쓰러져 10여일 후 사망했다는 사실에서 작의성(作意性)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가사지>는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 작사자 조사 위원회>에 증거로 채택되어 ‘윤치호 작사’를 유력하게 하였다. 당시 보도는 이를 분명히 알려 준다.
“윤 씨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단정하게 된 물적 증거는 윤치호 親筆 애국가 寫本과 샌프란시스코 거주 梁柱殷 씨로부터 보내온 앨범 복사판 및 윤치호 작 讚美歌를 目睹하였다는 人士들의 중언 등에 의한 것”(聯合新聞, 1955년 7월 30일)
이상과 같은 각종 자료를 통해 이 <가사지>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논점이며 증거력이기도 하다.
① <가사지>의 필사 연대는 1945년 10월경이다.
② 필사 목적은 가족에게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서이다.
③ 필사할 때는「찬미가」를 보고 옮겼다.
④ 말미에 ‘1907년 윤치호 作’이라 쓴 것은 작사 시점을 표기한 것이다.
⑤「찬미가」의 “님군을 섬기며”를 딸의 말을 듣고 “충성을 다하여”로 고처 쓴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가사지>의 증거력을 최초로 확인 한 박은용은 1939년 동경음악학교(東京音樂學校/현 동경예대) 성악과와 연구과를 졸업한 후 성악가와 평론가 그리고 작곡가로 활동하던 전문가이다.
해방 직후 이화여고 음악교사를 거쳐 1946년에는 서울대 예대 음악학부 교수가 됐으며, 두 차례의 독창회를 열었다. 순수음악 아카데미즘을 표방한 음악단체인「음악가의 집」에서 김순남ㆍ정훈모ㆍ김흥교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8년 12월, 남한정부가 수립되고 좌익음악인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이를 피해 월북하였다. 결국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임은 월북 직전의 음악평론가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현재 이 <가사지>는 1937년 윤치호가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모교 미국 에모리 대학에 보관되어 있다. 가족들은 우리나라에서 윤치호로 작사자를 인정하면 국가 기관에 기증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2015년 이를 국내로 반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