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0년에 지었다는 당산동 부군당

  • 등록 2019.08.14 11: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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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48]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당산동(堂山同)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속해 있다. 지리적으로 동쪽으로 여의도동. 서쪽으로 양평동 그리고 남쪽으로 영등포동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한강 건너로 마포구 합정동이 보인다. 조선 시대에 이곳은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흥군 북면 당산리라 불리었고, 1936년 행정구역 변동으로 인해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당산정이 되었다. 그리고 1945년에 영등포구 관할에 속하게 되었고, 1946년에 당산동이 된 것이다.

 

당산(堂山)이라는 지명은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지역에 오래전부터 당(堂)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집은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 일대를 원당산이라고 불렀다. 원당산 위쪽은 웃당산이라 하였고, 마을 안쪽 지역은 안당산(또는 벌당산)이라 불렀다. 세 지역의 모든 당산동 사람들은 때가 되면 이곳 당집에 모여 의례를 열면서 마을과 가가호호 모든 구성원의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빈다.

 

당집이 있었던 원당산에는 한강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나이가 약 500살이 훨씬 넘은 은행나무가 두 그루가 있었다. 당산동 토박이 황인균(2001년도 부군당굿 제주)은 이곳 은행나무에 대해 다음과 전하였다. “조선 시대 초, 이 지역을 지났던 임금이 이곳에 잠시 쉬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었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는 보호수로서 역할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도 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큰 피해를 면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한 그루가 불타고 말았으며. 나머지 한 그루가 남아 1968년 7월 3일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당산동 부군당은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로부터 약 100m 위쪽에 있다. 대지 약 15평, 건평 8평 정도의 단층 기와집으로 된 부군당은 애초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지만 지역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앞쪽 전망이 막혀 버렸다. 부군당 입구에는 계단이 있다. 부군당이 평지로부터 위쪽에 있는 것이다. 평지보다 약간 위쪽에 지어진 부군당이기에 당 아랫부분의 공간을 시멘트 건물로 덧붙여서 제례 준비실로 쓰고 있다.

 

현재의 부군당 건축물은 1950년 4월 8일에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부군당 건립은 1450년 4월 8일이라는 내용이 부군당비에 쓰여 있다. 부군당 내부로 들어가면, 벽면에 부군신 내외를 중심으로 하여 모두 아홉 분의 신령을 쪽 탱화에 그려서 모셔두었다. 이 탱화들은 형태로 보아 그다지 오래된 것은 아니다. 토박이들에 의하면, 오래전에 묵은 탱화를 불태우고 새로운 것으로 바꿨다고 한다. 벽면에 모셔진 탱화 순서는 왼쪽부터 대신할머니, 용궁애기씨, 삼불제석님, 칠성님, 산신님, 부군님 내외분, 장군님(최영장군), 별상님, 도사할아버지다.

 

당산동 부군당굿은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당산향우회가 주관한다. 당굿은 원래 해마다 음력 7월 초하루와 10월 초하루, 일 년에 두 차례 거행하였으나 재정적 문제와 주민 참여 문제로 인해 현재는 10월 1일 한 번만 지낸다. 그러나 토박이들은 옛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당굿을 치르기 위해서는 일주인 전 마을 남자 가운데 부정이 없는 사람을 골라 제주를 위시하여 총무, 재무 각 1명 그리고 다수의 소임을 뽑는데 이들을 모두 제관이라고 부른다. 제주는 마을에 영향력이 있는 집안에서 맡는데, 특이한 것은 집안 대물림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 외의 역할은 해마다 뽑는다.

 

2006년 10월 초 하루(양력 11월 21일) 부군당굿 때 뽑힌 제주와 소임은 다음과 같다. 제주 송승성(1942년생), 총무 김혁구(1948년생), 재무 염창학(1948년생), 소임 염창수(1937년생), 신일길(1943년생), 김영석(1945년생), 송문수(1948년생), 예재은(1948년생), 김정택(1951년생), 유영득(1962년생), 신충현(1955년생) 등이다. 이처럼, 제관은 대개 50살부터 80살 정도의 연령층에서 뽑는다. 이들 가운데 총무와 재무는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추렴을 하고 제물을 준비한다. 그 밖의 제관들은 당굿이 행해지는 날 아침 일찍 준비실에 모여 피순대를 만들어 당굿 참여자들에게 대접한다.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금기를 지키고 근신해야 한다. 내외간 동침을 금하고 상갓집을 갈 수 없다. 어떠한 흉사에도 개입 또는 참여해서는 안 된다. 또한, 당굿이 시작되기 전 부군당 주위에 황토를 깔고 출입구에는 왼 새끼줄로 금줄을 쳐 좋지 못한 해로운 액을 차단하고 잡인들 출입을 금하게 한다.

 

 

 

당산동 부군당굿에 올려진 제물은 밤, 대추를 비롯한 곶감, 사과, 배 등 삼색과, 삶은 소머리와 통돼지 그리고 탕, 삼색 나물, 갖은 떡을 올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제물로 올려진 돼지의 피로 순대를 만들어 올리는데 이를 피순대라 한다. 모든 과일은 껍질을 벗기지 않으며 탕은 세 그릇으로 준비한다. 돼지는 반드시 흰 점이 하나도 없는 검정돼지를 쓴다. 바다 생선은 일절 쓰지 않는다. 떡은 굿이 끝난 후 추렴에 동참한 마을 사람들 가가호호에 반기 돌림을 해야 하기에 2가마 정도 준비한다. 술은 막걸리를 쓴다.

 

당산동 부군당에도 다른 지역의 마을당처럼 매인 당주가 있다. 당주는 굿일 다가오면 당굿을 함께 할 만신과 악사를 섭외한다. 당굿은 아침 10시쯤이면 시작된다. 먼저 마을 남자들이 제례복을 입고 유교식 제례를 지낸다. 분향하고 술잔을 올린 뒤 절을 하고 축문을 낭독한다. 축문은 초헌관이 낭독한다. 축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 00년 시월 초일일 00일 소임 일동 감소고우 당사지신 일이위기 만인소종 경내잔면 위수위래 절후대서 기불흠병 흠설서수 진치미성 복유존영 서기응지 상향”이다. 유교식 제례가 끝나면 소지를 올리고 음복한다. 유교식 제례가 마무리되면 곧이어 당굿이 시작된다.

 

필자가 2001년 10월 초하루(양력 11월 15일, 목요일)에 조사한 당굿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녀는 3대째 대물림해 온 당주 만신 서보살(일명 말집)과 서보살 후배 문 만신 그리고 서보살 신딸 2명이 참석하였다. 잽이는 최형근(피리, 쇄납)과 해금과 대금이 참여하였다. 당굿 제차는 부정 - 부정청배 및 가망청배 - 진적 – 가망굿 - 대신할머니 – 말명 – 부군님거리(신장, 대감, 서낭, 제장, 말명, 영산) - 불사거리 – 대안주거리(장군, 별상, 신장, 대감, 나라님대감, 군웅대감, 당산대감 (남녀 은행나무대감), 텃대감) - 군웅거리(활쏘기) - 대잡기(성주놀이) - 창부거리 - 서낭거리 –뒷전 순으로 진행되었다.

 

양종승 박사 yangshama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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