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젊었을 때 워낙 술을 좋아하시고 또 많이도 드시던 아버지는 노년에 통풍으로 무척 고생하셨다. 하지만 등산도 좋아하셔서 많이 다니셨고, 하시던 일도 땀을 많이 흘리는 일이어서, 당신이 말년에 통풍을 앓으시는 것이 이해는 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무척 통증을 호소하셨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약 드시는 것을 싫어하셔서, 병원에서 처방해 주는 약은 통증이 극심할 때만 드셨지 거의 버리기 일쑤였다.
우리 집안 남자들의 술에 대한 애착은 대단했다. 아버지 삼형제의 술 사랑이 남달랐는데, 아버지 바로 아래 동생이신 작은아버지는 등산을 가거나 성묘를 하러 갈 때면 늘 2리터 페트병에 담긴 소주 한 병과 빈 페트병을 들고 올라가셨다. 그러고는 산에 있는 솔잎이나 머루, 다래, 보리수, 심지어는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나무껍질까지 가지고 오셔서 두 병 나누어 담고는 소주를 부어 놓으셨다.
그 병들은 무덤가 이곳저곳 또는 산속 당신만 아는 비밀장소 이곳저곳에 묻어 두셨는데, 몇 년 후 그 묻어 둔 것을 캐내어 드시는 것을 큰 재미로 아시는 분이셨다. 아버지 형제 가운데 아마도 가장 술을 사랑하신 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어느 늦은 저녁에 그 삼촌이 할머니와 내가 지내는 집으로 찾아오셨다. 돈을 천 원인가 주시면서 4홉들이 소주를 한 병 사 오라고 하셨다. 요즘은 그 병을 찾을 수 없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640ml 정도 용량이 되는 꽤나 큰 소주병이었다. 일반 소주병의 두 병이 채 안 되는 크기였지만, 삼촌은 그 정도는 늘 혼자 다 드셨다. 내가 그 술을 사다 드리면 안주도 없이 소금을 조금 가져오라 하시고는 그걸 안주 삼아 그 큰 병의 소주를 다 마시셨다.
그리고는 또 타고 오신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셨는데, 내가 고등학생 때 한 번 여쭤본 적이 있다. 그렇게 술을 드시고 오토바이 타시면 무섭지 않으시냐고... 삼촌은, 맨정신으로 오토바이 타는 게 더 무섭다고 하셨다. 버스나 차들이 막 달려드는 것 같다고... 이미 중독이 되신 것이다. 숱하게 사고도 나고 넘어지기도 하셨는데, 결국 삼촌은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중환자실에 계실 때, 마지막으로 면회 간 나에게 삼촌은 간호사 몰래 술 한 병 사다 달라고 하셨다.
내 아버지의 주사는 크게 나쁘지 않으셨는데. 주로 노래를 끝없이 부르다가 주무시거나, 나를 앉혀놓고 일장 인생에 대한 당신의 철학을 강의하시는 것이 주사라면 주사였다. 그것도 내가 듣기 싫어하면, 다시 끝없는 노래를 부르시다가 주무셨다.
내가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또 아버지만큼 흰 머리가 늘어난 지금 나는 과연 아버지가 살아오신 그 세월을 그렇게 술을 드시지 않고 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아버지는 그렇게 오고 싶어 하시던 제주도여행을 주로 자동차로 이동하는 일이 대다수였다. “이놈의 발만 안 이래도 저 한라산을 한 번 올라가 봤으면 좋겠다.” 지팡이를 짚으시고 성판악 입구에 서서 아버지는 무척 아쉬워하셨다. 좀 더 일찍 당신을 모시고 왔어야만 했다는 죄책감이 매 순간순간 나를 아프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