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少泉) 조순 박사님의 ‘수용(秀容)’

2022.06.29 11:29:47

이 보잘 것 없는 추모의 글을 박사님께 올립니다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53]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민족의 비극인 6.25 발발 72주년을 맞은 지난주 토요일 아침 우리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받던 조순 씨를 멀리 보내드렸다. 이제 ‘앞으로는 포청천, 혹은 무라야마 전 일본 총리의 휘날리는 흰 눈썹과,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강릉 말씨의 고인 육성을 더는 들을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아침 일찍 집 주위의 둘레길 산책에 나선 필자는 그제 내린 비로 골짜기를 콸콸 소리 내며 흘러내려 가는 물에 고인과 얽힌 이런저런 인연을 실어 보내며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

 

“6월 25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조순 전 경제부총리의 발인식이 엄수되었다. 한국 경제학계 '거목'으로 불리는 조 전 총리는 지난 1988년 노태우 정부 당시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취임했으며, 경제부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그날 아침 뉴스는 요약하면 이런 식으로 나왔다. 물론 그 전에 이미 고인의 생애와 많은 업적에 대해서는 보도가 되었고, 고인의 일생은 한 마디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러나 필자에게 조순 씨는 경제학자로서보다는 시멘트로 뒤덮여 있던 여의도광장을 갈아엎고 나무와 풀이 자라고 물이 흐르는 생태공원을 만든 서울시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1995년 첫 번째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조순 시장은, 7월 1일 취임을 이틀 앞두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나자 취임식도 사고 현장에서 약식으로 하고는 사고 수습에 임한다. 석 달 뒤 도쿄를 거쳐 10월 4일 북경을 방문해 서울시와 북경 사이의 자매도시 결연을 하는 등 일정을 치르고 나서 북경에 주재하는 우리 언론사 특파원들과 만나는 자리가 마련됐다.

 

당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던 때여서 조순 시장이 자신을 밀어준 김 대통령의 새 당에 합류하느냐가 초미의 관심거리였기에 특파원들은 그쪽으로 질문을 쏟아내었는데, 당시 KBS의 특파원이었던 필자는 이런 질문 아닌 당부의 말을 했다.​

 

“제가 북경에 와 2년 넘게 있어 보니 시내 어디나 나무가 많고 엄청 잘 자라는 것이 가장 부러웠습니다. 시장 임기 3년은 금방 지나가는데 저는 시장님이 무엇보다도 나무를 많이 심은 시장이 되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특파원들의 까다로운 질문을 예상했던 조 시장으로서는 이런 질문을 듣는 것이 뜻밖이었든지 선선히 "아! 그런가요? 그러지요. 돌아가면 서울 시내에 나무를 많이 심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갔는데, 1997년 봄에 갑자기 서울시에서 여의도 광장을 공원으로 만든다는 계획이 발표되고 여기에 5천 5백억 원에 이르는 예산이 배정되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조순 시장이 그때 내가 당부한 대로 나무를 심으려 하였는데 대로마다 일일이 나무를 심기가 어려우니 아마도 여의도광장에 한꺼번에 나무를 심으려 한 모양이군."

 

 

 

과연 광장조성이 그런 이유였는지는 물어볼 수 없었고 본인도 그렇게 인정할 일은 아닐 것이지만 나는 영향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광장의 아스팔트는 벗겨지고 1999년 1월에 광장은 곳곳에 물이 있고 나무와 풀, 꽃이 자라고 동물들이 뛰어노는 거대한 도시 생태공원으로 문을 열었다.

 

조순 시장은 무난하게 서울 시정을 이끌며 인기가 올라 1997년에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하였는데, 한때 여론조사에서 20%가 넘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지만, 곧 지지율 하락으로 후보직을 사퇴한 뒤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꾸고 총재에 올랐다. 그리고 잠시 국회의원을 하다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다른 당을 만들었으나 이 당이 실패하면서 정계에서는 사실상 은퇴했다.​

 

2006년 6월 필자는 내가 펴낸 《청명한 숨쉬기》라는 책 속에서 조순 시장의 이 여의도 공원 조성에 얽힌 필자와의 인연을 소개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여의도공원을 만드신 분은 물론 경륜이 있고 포부가 있어서 정계에 뛰어드셨겠지만, 정계에 나가서는 잠깐 빛을 보다가 지금은 어디서 뭐 하는지 잘 모르는 그런 형편으로 변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분이 여의도공원을 만들지 않았으면 과연 무엇으로 기억될까 생각해본다. 물론 뛰어난 경제학자여서 학자로서의 업적은 많으시겠지만, 서울시장으로서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 여의도공원을 만든 것을 제하고는...​

 

언론인으로서는 상당히 건방지고 공손하지 못한 표현을 했지만, 필자의 뜻은 서울시장으로서 이 공원을 만드신 일은 우리나라 도시의 녹색시대를 연 콜럼버스의 달걀이었음을 알리고 싶었던 뜻이 있었다. 그 책에 나온 이야기를 삼성출판사 김종규 회장님이 보시고는 이를 당시 자신의 사무실 맞은편에 있는 민족문화추진회 회장으로 근무하고 계시던 조순 박사께 알려드렸단다. 그러자 조순 박사는 “아무렴 내가 한 일이 그렇게 다 잊히기야 하겠는가?”라고 하고 웃으셨단다.​

 

사실 정말로 이것은 건방진 글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조순 박사는 민족문화추진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이 민간단체가 국립 고전번역원으로 승격해서 오늘날 우리나라 고전의 현대국역 작업을 하는 당당한 기관으로 일어서도록 큰 역할을 하셨다. 물론 이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이때 필자에게 더욱 중요한 일을 하셨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570)의 형님으로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라는 분이 있고, 그분의 종택이 구한말 일제에 의해 불에 타 재가 된 지 100년을 넘긴 채 공터로 있었는데 이 종택의 복원추진위원장을 맡아서 각계에 복원을 호소하고 계셨다는 점이다. 필자도 바로 이 온계의 후손이기에 조순 총리는 결국은 우리 할아버지를 위해 당신의 덕망과 경륜을 써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고 그분에 대해 어디서 뭐 하는지도 모르는 형편이 되었다고 막말을 한 셈이 되니 그 얼마나 불경인가?​

 

 

 

조순 박사는 2011년에 온계종택이 복원되자 종택의 중심인 삼백당 건물에 삼백당(三栢堂) 당호(堂號)와 삼백수용(三栢秀容)이라는 친필 휘호를 써 주신 것이 지금 종택에 당당히 걸려 있다. 온계 종택을 삼백당 종택이라고 부르는데, 이 종택이 다시 들어서니 “그 얼마나 멋지고 당당한가?”라는 뜻을 담으셨다.​

 

정치권을 떠난 조순 박사는 서울대ㆍ명지대 명예교수와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한반도선진화재단 고문,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의 원로 역할을 묵묵히 하셨다. 언제나 과묵한 듯하면서도 밝은 얼굴, 구수한 목소리로 젊은이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고인의 빈소에는 그의 제자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 한덕수 국무총리,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등이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

 

오후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조문을 했고 문재인 전대통령도 조화를 보냈다. 경재계 인사들의 추모도 이어졌다. 조문객들은 90여 년에 이르는 고인의 긴 생애에서 이룬 많은 업적을 회상하며 우리나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음을 기렸다. 어찌 보면 고인처럼 많은 경력에 서 보듯 다방면에서 업적을 쌓으신 분도 근세 이후 많지 않다고 하겠다.

 

그런 분에 대해 필자가 여의도공원을 만든 시장으로만 기억될 것이라고 했으니 불손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만큼 아무도 못 했던 여의도광장의 아스팔트를 걷어내는 과감한 추진력이 있으셨기에 그처럼 다방면에 많은 일을 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조순 시장을 그렇게 여의도공원을 만드신 분으로 기억하는 시민들이 많다.

 

 

소천(少泉) 조순 박사님!

 

당신이야말로 경제학교수에서 경제관료, 행정가, 정치가, 그리고 고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국학운동가로서 평생의 뜻을 아낌없이 쓰셨고 열정을 불태우셨습니다. 정치 쪽에는 인연이 안 닿으셨지만, 어쩌면 그러기에 혼탁함에 물들지 않고 고매한 인품과 높은 덕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시대의 스승으로 박사님은 길게 기억될 것입니다. 박사님은 스스로 소천(少泉), 곧 젊은 샘이라고 하셨지만, 당신이야말로 이 시대의 멋지고 당당한 위인의 얼굴, 곧 수용(秀容, 받아들임)이셨고 많은 기르침과 사랑을 주신 마르지 않을 샘이었습니다. 박사님의 그 수용(秀容)이 오랫동안 그리울 것 같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추모의 글을 소천 박사님께 올립니다.

 

 

이동식 인문탐험가 ld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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