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진경 문화평론가] 요즘 트로트가 대세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면, 트로트 가수들의 노래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능에서도 그들의 활약은 대단하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국악인들이다. 국악을 전공한 국악인들이 남녀세대 불문하고 활동하고 있다.
가수 송가인은 TV조선 미스트롯에서 진으로 우승하며 트로트 열풍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 두드러진다. 그녀는 한복 홍보대사와 한국 문화재 재단 홍보대사를 자청하여 맡았고, 서울 청계광장에 나가 국악 교육을 지켜달라며, 현재 초ㆍ중ㆍ고 개정 교육과정에서 국악이 소멸할 수 있다는 우려에 공개 호소를 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전통을 모르고서 어떻게 자기 뿌리를 알겠어요?” 이렇게 되물었는데 송가인은 전통국악인 가족이기도 하다. 어머니 송순단 명인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전승교육사이고, 둘째 오빠 조성재는 국악팀 우리 소리 바라지에서 아쟁을 연주한다. 송가인도 광주예술고 국악과를 거쳐 중앙대 전통예술학부를 졸업한 국악인이다. 그녀는 “국악은 내 기초이자 뿌리”라며 “국악을 전공한 덕에 한 서린 목소리를 잘 표현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 적 있다.
가수 양지은은 TV조선 미스트롯에서 탈락의 위기가 있었음에도 역전의 드라마를 쓰면서 최종 진이 되었다. 그녀는 제주도 출신으로 10대 시절 판소리에 입문해 전남대 국악과에 수석 입학하여,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9-5호 판소리 흥부가 보유자 김순자 선생 1호 이수자다.
이 밖에도, TV조선 미스트롯의 초등부에서 경연한 김다현과 김태연도 국악인 출신이다. 김다현은 청학동 훈장으로 알려진 김봉곤 훈장의 딸로 언니 김도현과 함께 청학동 국악 자매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여 MBN의 보이스 트롯에서 준우승을 차지 한 바 있다. 판소리계의 신동이라고 불렸던 김태연은 4세에 판소리, 민요를 시작하여 춘향국악제 최연소 대상, 박동진 판소리 대회 대상, 진도 민요 명창 대회 금상 등을 수상하고, 미국 케네디 센터와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펼쳐 전 세계에 국악을 널리 알렸다.
이렇듯 국악계에서 상위층의 실력을 갖춘 많은 국악인이 트로트 무대에 서게 됐는데 그 까닭이 무엇일까?
트로트는 서양 블루스 계통의 음악문화와 일본의 근대 대중가요 엔카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 녹음기술이 개발되고 음반회사가 설립되면서 다양한 서양 대중가요들이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특히 이러한 영향은 일본으로 전해지게 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겪고 있던 우리나라에서도 그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곧, 이때 우리나라의 전통국악, 블루스와 엔카가 접목되기 시작한 것으로 초기의 트로트의 음계는 오음 장음계(도, 레, 미, 솔, 라)를 사용하였으나 현대는 7음계를 모두 사용하며 다양한 장르의 요소들과 접목하여 불리고 있다.
엔카는 마야코부스 음계(라, 시, 도, 미, 파)의 음계를 사용한다. 일본의 음계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영향과 친일 행적 가수 활동으로 더해졌다. 그러나 독립 이후 한국의 트로트는 일본의 엔카의 5음계를 사용하지 않았고 독자적인 한국만의 ‘트로트’를 개발하고자 하였다.
이후 1960년대 비슷한 시기에 두 나라의 트로트와 엔카는 각기 자기 나라에서 사랑받게 되었으나, 음색, 음계, 창법, 리듬 등에서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일본 음악가들 사이에서 ‘엔카가 한국음악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하기도 한다. 곧 두 나라의 문화는 서로에게 일제강점기 시대가 불가피한 영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한국의 전통 트로트는 왜색을 벗고자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20년대의 서양 문화는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일본 내에서 서양식 대중가요가 불리기 시작했다. 이 영향은 조선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이 노래들은 트로트도, 엔카도 아닌 외국 번안 가요와 한국의 지역색이 혼합된 유행가 가요였다. 다시 말해 일제강점기 당시 유행하던 가요는 한국 특유의 정서를 가미한 것들이다. 이에 일본 원로 작곡가 고바야시 아세이는 "일본의 엔카 멜로디는 한국의 멜로디다."라고 하였으며, 일본엔카가요협회 이사장 다카기 이치로는 “일본 엔카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 피가 섞여 있고, 엔카 멜로디 원조는 한국인이다.”라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서, 이 유행가는 ‘전통가요’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트로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하였다. 트로트는 일제강점기의 왜색이 남아 있어 ‘왜색가요’라는 비판과 질타를 받기도 했으나 한국만의 독자적 특징을 확립하고자 하였고 한국전쟁 이후 전통가요라고 불리던 트로트는 점차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도 60년대 전후로 엔카는 장르적 특성을 명확히 하고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이후 트로트는 다양한 장르들과 결합을 시도하면서 전통 트로트, 세미 트로트, 락 트로트, R&B 트로트, 댄스 트로트, EDM 트로트 등으로 대중들에게 다양하게 다가가고자 하였다. K-POP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트로트는 시대가 변화하면서 지속적인 콘텐츠를 개발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대세 속에서 전통 국악인들은 한국 특유의 정서와 폭발적인 성량, 꺾임과 허스키한 음색으로 트로트 무대에서 독보적인 활동을 보인다.
그러나, 한국의 정서를 기반으로 전통국악의 음색이 가미된 창법을 활용하여 독보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국악인 출신의 트로트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은 대담 가운데 “무대 위에서 국악 창법이 나올까 걱정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면서 국악의 전통성을 벗고자 하였다. 또한, 이러한 전통국악 음색이 창법으로 나올 때 몇몇 심사위원들은 가감 없이 공격하기도 하였다.
트로트는 여러 세대를 거쳐 한국의 독자적 트로트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트로트의 정체성은 모호하기만 하다. 일제강점기 이후 트로트는 왜색을 지우고 한국 정서가 묻어나는 전통가요를 만들고자 도, 레, 미, 솔, 라의 음계를 차용하고 일본의 음계를 지우는 활동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장르가 혼합하면서 무엇이 트로트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전통국악을 전공하고도 설 수 있는 무대는 한정적이고, 이를 누리는 관객도 많지 않으니 수십 년을 공부하였어도 미래가 막막한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악인들이 새로운 무대로 트로트를 선택한 것이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그들의 몇십 년의 노력이 허무하기만 하다. 그들의 예술적 성과가 국악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트로트로 한계를 지을까 우려스럽기만 하다. 나는 송가인의 국악교육에 대한 열정에 대해 크게 손뼉을 치기도 했지만, 여전히 국악을 사랑하고 전통음악과 문화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과 달리, 그녀의 영향력 탓에 국악 전공자들 성공의 무대가 트로트로 한정 지어질 수 있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있는 건 사실이다.
자기의 뿌리가 국악에 있음을 알고 자랑스러워하는 국악인 출신의 가수들이 단지 일회성이며 향락적으로 소비되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 아닌, 그 뿌리를 기억하고 시대적 사명을 잊지 않는 무대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또 국악인으로서의 전통국악을 다양하게 선보이는 과정에서 진짜 영향력을 미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