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흔적을 지운 곳 박작성

  • 등록 2025.07.15 1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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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 가는 길 ‘문명 보고서’ 3

[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 열하일기를 따라서, 답사 2일 차

일자 : 2025년 4월 20일(일요일), 이동 거리 274km

숙박 : 요양희열미호텔(辽阳喜悦美酒店, 0419-389-7777)

 

한국 전쟁의 상흔을 마주하다

아침 일찍 호텔 앞에 있는 압록강 단교(鸭绿江断桥)를 찾았습니다. 북한과 중국을 잇는 이 다리는 한국 전쟁 중 1950년 11월 8일 유엔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끊어진 다리입니다. (이후 강 상류에 새로운 철교가 건설되었고, 강 하류에 새로운 현수교가 건설되었으나 개통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현장에 서서 신의주를 바라보니, 예전에 답사 왔을 때보다 고층 빌딩이 늘어나고 외견상 화려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북한 주민이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니, 북녘 동포가 더 잘 살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고구려의 흔적을 지운 곳 박작성

압록강 하구와 애라하(愛喇河)를 낀 요새인 호산장성(虎山长城, 박작성-泊灼城)을 찾아갔습니다. 이곳은 박작성 위에 명나라 시대에 추가로 축조한 성입니다. 중국은 이곳을 만리장성 동단 기점이라고 표지석을 세웠는데, 이는 명백한 역사 왜곡입니다. 연암 박지원이 장마철에 배 다섯 척을 나누어 타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제가 장대 위에 올라서서 압록강 건너편 북한의 의주를 바라보니, 좁은 강폭과 통군정 아래 구룡나루가 한눈에 들어와 손에 닿을 것만 같았습니다.

 

 

구련성터에서 마주한 압록강

구련성터(九连城镇, 叆河尖城址, 애랄하첨성지) 표석을 찾아갔습니다. 연암은 1780년 6월 24일 의주 통군정(統軍亭) 아래 구룡나루에서 배를 타고, 장마철 급류가 휘몰아치는 압록강을 건너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열하일기》에는 이곳을 “구련성을 국내성이다”라고 했으며, “전송 나온 이들이 오히려 모래벌판에 섰는데 마치 팥알같이 까마득하게 보인다”라고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또한 “구련성에서 한둔(2일 노숙)하다. 밤에 소나기가 퍼붓더니 이내 개였습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연암은 동행한 사신단의 규모와 각 인물의 역할 등 세세한 행동과 운반 물품, 날씨와 잠자리, 식사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모든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덕분에 제가 지금 압록강을 건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사실적이고 흥미진진한 기록으로 역사의 현장을 답사할 수 있었습니다.

 

책문에서 새로운 문명을 마주하다

구련성에서 탕산성을 거쳐 책문(柵門, 변문진-边门)으로 이어지는 120리는 봉금 지대로, 이곳은 17개 관문 가운데 하나인 책문으로 조선 사행단이 통관 절차를 하는 곳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본 것이지요. 벽돌집, 우물 뚜껑의 두 개 구멍, 도르래, 두레박, 물지게 등은 신기해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열하일기》에는 연암의 단출한 행장과 일행의 예단 물목까지 상세히 기록하여 그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창대(마부)는 견마를 잡고 장복(하인)은 뒤따른다. 말안장에는 주머니 한 쌍을 달되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里程錄) 한 축을 넣었습니다.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짐 수색이 아무리 엄하다고 한들 근심할 것 없었습니다.” 또한, 하인 “창대와 장복이 주머니를 털어서 술을 샀다. 나는 너희들 술을 얼마나 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둘은 입에다 대지도 못하옵죠 한다.” 뒤따르는 “구종들의 짚신이 안장 뒤에 주렁주렁 매달렸으며, 내원의 군복은 푸른 모시로 헌 것을 자주 빨아 입어서 몹시 더부룩하고 버석거리는 것이 가히 지나치게 검소를 숭상함이라고 말하겠다” 하며 사행단의 소박한 일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연암은 청나라로 들어가는 관문 책문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무 쪽으로 목책(木柵)을 세워서 겨우 경계(經界)를 밝혔으니, 이른바 버들을 꺾어서 울타리를 만든다는 말이 곧 이것인 듯싶다. 책문에는 이엉이 덮이었고 널판자 문이 굳게 닫혔다. 책문 밖에서 다시 책문 안을 바라보니, 수많은 민가는 대체로 들보 다섯이 높이 솟아 있고 띠 이엉을 덮었는데, 등마루가 훤칠하고 문호가 가지런하고 네거리가 쭉 곧아서 양쪽이 마치 먹줄 친 것 같습니다.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이 탄 수레와 화물을 실은 차들이 길에 질펀하며, 벌여놓은 기명들은 모두 그림 그린 자기(瓷器)들이다.”

 

“책문은 중국의 동쪽 변두리임에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앞으로 더욱 번화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한풀 꺾여서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릴까 보다 하는 생각에 온몸이 화끈해진다. 그럴 순간에 나는 깊이 반성하되, 시기와 부러움이 이는 곧 견문이 좁은 탓이리라, 우리나라 사람은 ‘책문’이라 하고, 중국 사람들은 ‘변문(边門)’이라고 한다. 나무로 대강 목책을 세워 경계를 표시한 것이, 이른바 ‘버드나무를 꺾어 울타리를 만든다’라는 표현과 같아 보였다. 책문에는 이엉이 덮여 있고, 널빤지 문이 굳게 닫혀있었습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현재 책문은 변문진역 자리라고 하며, 연암이 책문을 지나면서 느낀 소감은 이처럼 자세히 묘사하였습니다. 책문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중국 변방의 작은 마을로 남아있습니다.

 

 

고구려 숨결이 살아있는 오골성

봉황산성(凤凰山国家风景)을 찾아갔습니다. 연암의 묘사처럼 돌을 깎아 세운 듯 기이하고 빼어났다. 이곳은 고구려 오골성(烏骨城)이라고 하며 고려 성자산(城子山)과 이어져 있습니다. 성의 석축과 토석 혼축 방식으로 축조되어 길이는 15km에 달합니다.

 

중국 관광의 아쉬움

산 중턱에 얼음골이 있어 신기하였습니다. 중국의 과도한 상술에 실망했습니다. 입장료, 셔틀버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위험하다는 곤돌라'까지 봉황산을 둘러보는 데 1인당 280위안(약 56,000원)을 냈습니다. 특히 2인승 곤돌라는 깡통처럼 허술했고, 창문이나 안전장치 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여 불안감을 더했습니다. 하차 지점에서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고 심지어 사람을 잡아당겨 끄집어 내리는 위험한 상황까지 발생하여, 회원 두 분이 크게 넘어지고 다쳐 몹씨 불쾌하였습니다. 바위 절벽을 따라 길게 이어진 잔도가 위압적인 모습입니다. 걷고 싶었지만 마음도 불편하고 시간이 없어 하산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음 답사 시에는 산 입구만 둘러볼 예정입니다.

 

연암은 1780년 6월 27일 이곳을 지나면서 글을 남겼습니다. “멀리 봉황산(鳳凰山)을 바라보니, 전체가 돌로 깎아 세운 듯 평지에 우뚝 솟아서, 마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세운 듯하며, 연꽃 봉오리가 반쯤 피어난 듯도 하고, 어린 빛깔은 한양의 모든 산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성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라고 한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수ㆍ당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으로 고쳤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라고 연암 박지원은 글로 한탄하였습니다.

 

서길수 교수는 《고구려축성연구》에서 봉황산은 고구려의 오골성(烏骨城)으로 추정합니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오골성 공격 기록에 등장하지요. 북한 학자들은 환도산성(丸都)이라고 주장하며, 삼국사기에 신상왕 13년(209년) 도읍을 환도로 옮겨서 봉황산성이라는 것입니다. 관구검(246년), 모용황(342년)이 쳐들어왔던 환도성이 봉황성이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안시성(安市城)이라고 홍대용의 《담헌서》와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익의 《성호새설류선》에서 주장하였습니다. 봉황산에서 하산하여 버스에 오르니 저녁 5시 50분입니다. 예정된 시간보다 지체되어 일정을 줄여야 했습니다.

 

 

《열하일기》 속 재미있는 이야기, ‘도이노음’

연암은 송참(설리참 薛礼站)에서 노숙하고, 통원보(通远堡镇)에서 1780년 6월 29일부터 7월 6일까지 장마로 6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1780년 7월 5일 “이놈 누구야.하고 거듭 소리친즉, 소인 도이노음이오. 한다. 저 갑군(甲軍)이 밤마다 우리 일행의 숙소를 순찰하여 사신 이하 모든 사람의 수를 헤어가는 것을, 깊이 잠든 뒤이므로 여태껏 그런 줄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갑군이 제 스스로 ‘도이노음’이라 함은 더욱 절도할 일이다.” 필자는 연암의 세심한 기록에 웃음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봉림대군(효종)이 초하구(草河口镇)를 지나면서 한탄 시를 쓴 곳에 잠깐 내려 주변을 살펴보고 연산관 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봉림대군 시

 

     청석령을 지나거다 초하구 어드메냐

     호풍도 차도찰샤 구즌 비는 무슴일고

     귀라셔 내 행색 그려내여 님 겨신듸 드릴고

 

병자호란 원인의 장소 연산관 역

답사단이 연산관 역에 도착하니 저녁 8시 17분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연암은 1780년 7월 6일 연산관 역(连山关镇)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이곳은 1636년 대청 황제 즉위식 참석했던 사신 나덕현(무양서원)과 이곽이 황제의 국서를 몰래 버려두고 돌아와서, 청 태종은 이것을 빌미로 조선을 침공 병자호란을 일으켰습니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던 인조는 한강 변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례의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시냇물이 흐르는 산속 분지 지형에 기차가 지나는 아름다운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고도를 재보니 330m로, 밤공기가 제법 쌀쌀해져 있었습니다. 옛 역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차역이 들어서 있어, 아쉽게도 선조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고구려의 경계와 생활 유적

청석령(青石岭)에는 부경과 적석묘가 있었다고 하여 답사하려고 하였는데, 일정이 지체되어 아쉽게도 그냥 지나쳐야 했습니다.

 

연암은 이곳 청석령을 “고구려의 국경이라 했으며, 당시 중국은 봉금정책으로 국가의 영역과는 관계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고구려의 독특한 야외 창고인 부경(夫扃)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고구려의 독특한 야외 창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가정마다 2층으로 지어진 부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하였는데, 오늘날에는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반듯한 형태로 많이 보입니다.

 

오늘 마천령(摩天岭)을 넘어 청석령, 관제묘까지 답사할 계획이었으나, 두 개의 산성을 오르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결국, 날이 어두워져 더 이상의 답사는 포기하고, 고속도로를 이용해 숙소가 있는 요양 시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아쉽게 보지 못한 곳들은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호텔에 밤 9시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밤 10시가 되어서야 숙소에 들어섰습니다. 정말 길고 긴 하루였습니다.

 

 

안동립 기자 emap4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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