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 그 이후의 훈민정음 역사

2023.03.30 11:43:24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8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1446년 9월 10일 훈민정음을 반포하자마자 세종대왕은 이를 공식적으로 사용합니다. 10월 10일에는 신하들의 죄목을 직접 언문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냈으며 다른 궁내 공문을 언문으로 작성하여 훈민정음의 사용을 널리 알렸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과거시험에 언문을 포함하도록 하여 훈민정음을 모르면 출세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언문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언문은 훈민정음을 비하하여 쓰던 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쓰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종은 첫째 아들 문종과 둘째 수양대군, 그리고 정의공주를 훈민정음 창제 과제에 깊이 참여시켜 훈민정음이 자연스럽게 후대로 넘어가도록 포석을 깔아 두었습니다. 창제 후인 1444년에는 신숙주 등에게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했는데 두 왕자를 감독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1446년에 세종비 소헌왕후가 죽자 수양에게 《석보상절》을 짓도록 하고 1449년에는 이 책을 바탕으로 손수 500여 수의 노래를 지어 《월인천강지곡》이란 책을 냈습니다. 《석보상절》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뽑아 언문으로 뒤친(번역한) 모두 24권으로 구성된 대작입니다.

 

세종이 승하한 1450년부터 문종의 2년과 단종 3년을 거쳐 1455년 즉위한 세조는 다음 해 사육신과 가족 600여 명을 처형하는 등 큰 난리를 치르는 통에 문화활동을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즉위 5년(1459년)에는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에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로 해석을 달아 《월인석보》라는 책을 만들었고 《능엄경》, 《법화경》 등 많은 불교서적을 언문으로 해석해 펴냈다고 하니 세종의 뿌린 훈민정음의 씨앗이 참혹했던 정변에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난 셈입니다.

 

더구나 《월인석보》에는 첫머리에 《훈민정음》 언해본을 담아 언문 보급에 힘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또 《동국통감》과 《삼국사절요》 편찬을 시작하였습니다. 《두시언해》는 두보의 시 1,647편 전부에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더해 언문으로 주석을 달고 풀이한 번역시집인데 세종 25년에 착수하여 세조대를 거쳐 38년 만인 성종 12년에 비로소 전 25권이 활자본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성종은 이뿐 아니라 동국통감》과 《삼국사절요》를 완성하고 《금강경삼가해》, 《오대진언》, 《남명집언해》 등 불교경전을 간행하고 세종 때 글을 몰라도 볼 수 있도록 그림을 넣어 만들었던 삼강행실도를 언문으로 번역하여 펴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종이 뿌려놓은 씨를 세조가 살려 내 키웠고 성종은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언문은 모든 백성의 생활에도 깊이 파고들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언문의 보급은 연산군조에 들어와 끔찍한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물론 훈민정음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훈민정음 때문에 궁녀들과 어리석은 백성들도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지요.

 

연산군의 만행이 절정을 이루던 연산군 10년 그의 처남 이수영에게 연산군을 비난하는 익명의 투서가 전달되었습니다. 연산군은 투서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사대문을 걸어 잠그고 언문을 아는 사람은 모두 글을 쓰게 하고 이를 감별하여 기어이 투서자를 찾아내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언문은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고, 배운 자는 쓰지 못하게 하라. 언문을 아는 사람을 모두 조사해 보고하고, 만약 고하지 않는 경우, 이웃 사람까지 처벌하라’는 한글 금지령을 공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따라 훈민정음은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서적까지 대부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산군이 훈민정음 자체를 부인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해 역서(曆書)를 언문으로 뒤치도록 했으며 노래를 지어 가사를 한자와 언문으로 적어 궁녀들이 배우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비난하는 투서에 화가 나 온전치 못했던 성격에 일을 크게 벌인 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연산군 이후에는 훈민정음이 다시 살아나 중종 대(1506-1544 )에는 각종 의서들이 언문주해를 달아 출판되었으며 22년에 최세진의 《훈몽자회》로 방점을 찍습니다. 《훈몽자회》는 어린이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학습서인데 한자 3,360자에 뜻과 음을 달아주어 우리나라의 말과 글이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던 것입니다. 한자의 훈으로 달아 있는 우리말 어휘는 지금도 참으로 값진 어학 자원인 것입니다.

 

그는 언문을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훈몽자회 범례에 언문을 해설하여 놓았는데 이때 28자 가운데 ‘ㆆ’은 중국어 표기를 위해 만든 것인데 별로 쓰이지 않는다고 하여 빼내고 27자만 포함했습니다. 또한 언문 자모의 이름을 지어주고 그 순서도 재배열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아동을 위해 《소학편몽》이라는 책도 냈는데 이는 소학(小學)을 우리 실정에 맞도록 재편한 것입니다.

 

최세진은 미천한 배경에서 태어났지만, 문과에 급제하였고 훗날 중국어 실력을 발휘하여 외교문서를 도맡아 처리하였답니다. 중국에서 사신이라도 오면 통역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하지요. 행실이 나쁘다고 하여 여러 번 모함을 받았지만 역시 쓸모 있는 사람이라 살아남아 임금 곁에서 오래오래 외교문제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옥편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나이 70에 《운회옥편》이라는 우리나라 첫 옥편을 만들어 냈습니다.

 

당시는 중국은 《고금운회》라는 옥편이 있었는데 중국어 발음에 따라 글자가 배열되어 있었으므로 한자를 ‘부’에 따라 다시 분류하고 이를 4성 순으로 배열했습니다. 중국에 보낼 사신들이 공부하던 《노걸대》와 《박통사》라는 책을 뒤쳐 번역 《노걸대》와 번역 《박통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종대왕 이후의 큰 언어학자로 우리나라 언어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혜성과 같이 나타나 나라를 지켰지만, 내륙에서는 관군이 보잘 것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나 곳곳에서 민병과 승병이 일어나 왜적과 싸워 결국 물리쳤던 것입니다. 이때 전장에서 언문이 어떤 역할을 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훈민정음은 국가의 생명을 부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훈민정음이 없었다면 우리가 독립국으로 살아남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현대의 고속성장을 이루는 데에도 한글의 역할이 컸다는 것과 앞으로의 발전에도 한글이 핵심적 역할을 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한 얘기는 뒤로 미루고 다음 이야기에서는 훈민정음에서 한글로 들어가는 과정을 좀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신부용 전 KAIST 교수 shinby@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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