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잠선사 매월당 김시습의 승탑을 찾아서

2023.07.26 11:56:36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가에는 충(忠)을, 부모에서는 효(孝)를 가장 중요한 삶의 지표로 삼고 살았던 성리학의 시대가 조선시대였다. 국가에 충성한다는 것은 정당한 절차에 따라 임금이 되고, 그가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임금으로서 해야할 바를 다 할 때,  곧 임금 자신의 권세만 누리고 잇권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보살피는데 최선을 다하고, 백성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실천의 의무를 다할 때. 신하와 백성들은 그 임금에게 충성을 해야하는 것이다.

 

임금의 행실에 대하여 아무런 평가도없이 나라의 안위를 보살피지도 않고 방탕생활을 하면서  백성을 괴롭히는 잘못된 일을 하여도 무조건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리학에서는 임금이 그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을 때는 역성 혁명도 가능하다고 맹자의 가르침에 있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임금이면 곧 나라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 임금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도 그 잘못을 지적하는 간언을 하거나 잘못된 명령에 따르지 않고 관직을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임금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서 충성을 다하고, 그 댓가로 권력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재산을 하사받고 생전에는 물론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훌륭한 처세이고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갔다.

 

성리학의 시대이면서 왕국이었던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세운 왕조로, 장자(큰아들)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가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인정하였던 시대다. 따라서 임금의 지위도 현재 임금의 큰아들이면, 당연히 그 큰 아들에게 계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임금에게 여러 아들이 있으면, 그 아들 가운데 오직 한사람에게만 임금 자리가 계승될 수 있기에, 나머지 아들 가운데는 마음속으로 크게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장자 승계의 원칙이 당연한 시대인 조선시대 이지만 왕위 계승을 앞에 두고는 여러차례 왕자들의 난이 있었다. 

 

오늘 보는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조선시대 세종대왕 때 태어난 몇 안되는 천재로 문장이 뛰어나면서도 자신의 부귀영화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끝까지 성리학적 의리를 지킨 사람으로, 20살 즈음에는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세조가 형(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폐위하는 성리학적 의리에 위반한 현실을 보고, 출가하여 스님으로 전국을 떠도는 방랑생활을 하였다.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사육신이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실패하여, 형장에서 죽은뒤 세조의 형벌이 무서워 아무도 주검을 수습하지 않았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사육신의 주검을 수습하여 노량진 강가에 묻은 사람이 김시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조의 신하로 살고 싶은 생각을 접은 김시습은 31살 즈음에는 경주 금오산 근처에서 한국 첫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으며, 이후로도 전국을 방랑하며 살다가 59살에 충청도 부여 무량사에서 삶을 마쳤다. 그가 지은 《금오신화》는 5편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었는데, 당대 사회적 모슨과 성리학적 이념의 허구성를 비판하는 작품도 있으며, 불교적 윤회관이 보이는 작품들도 있다. 그의 작품은 목판으로 만들어져 널리 펴지게 되었는데, 조선을 넘어서 중국 일본까지 알려졌다.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세상을 뜬 뒤, 이곳에 그의 승탑이 세워졌는데, 조선시대 불교의 탄압과 침체로 그의 승탑도 알 수 없게 되었다가, 일제강점기 폭풍우로 쓰러져 수풀속에 묻혀있던 그의 승탑이 발견되었다. 그의 부도는 한 때 부여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다시 본래 있던 무량사로 이전하여 오늘에 전한다. 

 

김시습은 유학자로의 호는 매월당이지만, 그가 불가에 출가한 뒤로는 '설잠'이라는 법호로 살았기에 불교에서는 설잠선사로 부른다. 김시습은 유학자로서는 세조의 신하가 되지는 않았으나, 스님으로서는 한때 불경의 한글화에는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김시습은 단종복위운동을 하다 죽은 충신(사육신)과 더불어 단종복위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세조시대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단종의 충신의 한사람으로 후세에는 생육신으로 부르게 되었다. 생육신으로는 김시습, 원호, 이명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이다. 김시습의 성리학자로서의 평가는 후대에 이루어졌는데, 300년 이 흐른 뒤 숙종 때에는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인정되었으며, 정조 때에는 이조판서로 추증되기도 하였다.  

 

시대는 변하여도 원칙은 변할 수 없는 것, 왕조시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살았던 천재 김시습의 무덤 앞에서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시대 국민들의 권리와 의무를 생각해 본다.

 

 

최우성 기자 cws01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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