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이색(李穡, 1328 충숙왕 15 ~ 1396 태조 5)
이색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시인이다.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하고 확산시키고 새로운 사회의 개혁과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이제현의 제자로서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자들은 다시 역성 혁명파와 절의파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 유창 등의 스승이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역성혁명에 협조하지 않았고 조선 개국 이후에도 출사하지 않았다. 그는 고려 말 삼은(三隱,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의 한 사람이다.
세종 때 보면 <성리대전>을 명으로부터 받은 기록이 있다. 진헌사(進獻使)에 첨총제(僉摠制) 김시우(金時遇)가 명에서 칙서를 받들고 돌아오며, 처음에 윤봉(尹鳳)이 돌아갈 적에 임금이 대전(大全)·사서 오경(四書五經)·《성리대전(性理大全)》·《송사(宋史)》 등의 서적을 청구하였기 때문에, 시우(時遇)가 돌아올 적에 황제(皇帝)가 특별히 하사한 것이다. (《세종실록》 8/11/24) 그리고 세종은 이 <성리대전>을 읽으며 이를 정치 사상의 기초로 삼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생애와 사상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7살 때(1335, 충숙왕 복위 4)부터 독서하기 시작했으며 아버지 이곡의 친구이자 안향, 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익제 이제현을 찾아가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이후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은 다시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74)
이제현의 문하생 가운데 수제자로 이름났던 그는 14살(1341, 충혜왕 복위2)에 자신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성총(性聰, 1318년~미상)에게 시를 배운 적이 있으며(이색, 《목은문고》 권20, 송씨전) 같은 해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했다.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아버지로 인해 원나라의 국자감 생원이 되었고, 3년 동안 유학하다가 아버지의 상(喪)을 입자 귀국했다.
귀국 직후 원나라에서 입수한 송나라의 정호와 주자의 학문과 예법에 대한 것을 강의했는데, 이때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하륜 등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평가
성리학맥에서 이색의 위치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 안향의 6군자(권부, 백이정 등) → 이제현 → 이곡 → 이색 → 정몽주 → 길재, 권근으로 이어지는데,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색과 이색의 제자들 대부분이 여말선초에 난세의 핵심부에 있었던 점은 당시 성리학이 매우 현실 참여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제자로는 일반적으로 정몽주를 들며 특히 이색은 정몽주의 강론을 듣고 정몽주야말로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다.(참고 : 나무 위키)
다만 조선 개국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위치나 명성에 견줘 정치적 입지는 다소 약하고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도 없는 편인데, 실제로도 당대에 이미 "이재(吏才. 관리로서의 재능)가 없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종실록》에 보면 좋은 평가도 있지만 대체로 혹평도 있다.
이색의 졸기
조선을 여는 초기에 시대사상에 영향을 끼친 성리학은 당연히 세종의 통치에서도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당대의 평가인 이색의 졸기를 실록에서 살펴보자.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이 여흥(驪興, 여주)에 있는 신륵사(神勒寺)에서 졸(卒)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부의를 내려 주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색(穡)의 호는 목은(牧隱)이며, 한주(韓州) 사람 문효공 이곡(李穀)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과 슬기로움이 보통 사람과 달랐고, 나이 14살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무자년(1348)에 이곡(李穀)이 원조(元朝,원나라)의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는데, 색은 조관의 아들이라 하여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이 되었다. 신묘년(1351) 정월에 곡(穀)이 본국에 돌아와 죽으니, 부친상으로 귀국하여 상제(喪制)를 마치고, 계사년 공민왕이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할 때는 이제현(李齊賢) 등이 색을 장원으로 뽑았다. 가을에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 장원(壯元)하였고, 갑오년(1354)에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국사원 편수관을 제수받고 귀국하자, 공민왕이 전리 정랑(典理正郞)ㆍ예문 응교 겸 춘추 편수를 추가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원나라 서울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다. 병신년(1356)에 모친이 늙었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와 가을에 이부 시랑에 임명되고, 다시 옮겨서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후설(喉舌. 승지)로 임금을 가까이 한 지가 7년이나 되었다.
신축년(1361)에 홍건적(紅巾賊)이 경성(京城, 개성)을 함락시켜 공민왕이 남행(南行)할 때, 색은 임금의 궁궐 밖으로 거동할 때 따라갔으며, 도움을 이루어 적을 물리친 뒤에는 훈 1등에 책정되고 철권(鐵券,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들의 공적과 그에 따른 상훈을 기록한 서책)을 하사받았다. 이후 원과 고려에서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한때의 경서(經書)에 관한 학문을 통하는 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 등 6, 7인을 천거하여 모두 학관(學官)을 겸했다. 경전을 나누어 수업을 하매 서로 어려운 것을 논란해서 각각 있는 지식을 다했다.
색은 변론하고 분석하며 절충하는 데 저물도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기억하고 외우기만 하는 습관과 공리(功利)의 학설이 점점 없어지고, 성리(性理)의 학문이 다시 일어났다. 기유년에 이인복(李仁復)으로 더불어 임금에게 청하여 처음으로 중국의 과거법을 쓰자고 했는데, 색이 무릇 공거(貢擧, 중국에서, 각 지방의 우수한 인재를 추천해서 등용하던 제도)를 주장한 지 네 번이나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공정함을 탄복했다.
공민왕이 노국 공주(魯國公主)의 화상을 모시는 영전(影殿)을 짓는데 말할 수 없으리만큼 사치하고 호화롭기가 지극하여,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상서(上書)하여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노여워하여 유탁을 죽이려 하고, 색을 시켜서 여러 신하에게 알리는 글을 지으라 했다. 색이 죄명을 임금에게 물으니, 임금이 탁의 네 가지 죄목을 들었다. 색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죽일 만한 죄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옵소서."
임금이 더욱 노하며 독촉하기를 급히 하였다. 색이 아뢰었다.
"신이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어찌 글로써 죄를 만들겠습니까?"
임금이 감동하여 깨우쳐 탁이 죽음을 면했다.
색이 병이 중해서 문을 닫고 7, 8년을 지내다가 우왕 8년 임술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고, 무진년에 최영(崔瑩)이 요동위(遼東衛)를 공격하자고 청하여, 우왕이 기로(耆老, 원로)와 양부(兩府, 문하부와 밀직사)로 하여금 모여서 가부를 논의하라고 하니, 모두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서 반대하는 자가 적고 좋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색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랐으나, 물러 나와서 자제들에게 하는 말이,
"오늘날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의리에 거스리는 논의를 했다."라고 하였다.
이 태조가 회군하자 최영을 물리치고 색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삼았다. 공민왕이 돌아간 뒤부터 〈원나라〉 천자가 번번이 집정 대신(執政大臣)을 들어오라고 해서, 모두 겁을 내고 감히 가지 못했는데, 색이 시중이 되어 폐왕(廢王) 창(昌)을 친히 조회하도록 하고, 또 창왕으로 감국(監國, 임금이 나라 밖으로 나갔을 때 서울에 남은 태자) 시키도록 하려고 원나라에 들어가기를 자청하여, 드디어 색으로 하여금 하정사(賀正使)를 삼았다. 그리고 태조가 칭찬하여 말하였다.
"이 노인은 의기가 있다."
색이 생각하기를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해지고, 나라 안팎의 마음이 돌려져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혹 변란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한 아들을 따라가게 하였다.
겨울에 공양왕이 즉위하였는데, 이색은 시론(時論)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섯 차례나 폄척(貶斥, 벼슬을 깎아 내리고 물리침) 당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자 옛날의 벗이라 하여 용서하니, 태조에게 나아가서 보고 올 때마다 자제들에게 하는 말이,
"참으로 천명을 받은 거룩한 임금님이시다." 하였다. 또 일찍이 영선(營繕, 건축물 따위를 새로 지음)을 정지하기를 청하고는 물러 나와서 사람들이 묻는 일이 있으면,
"창업하는 임금은 종묘ㆍ사직과 궁궐이며 성곽 같은 것을 늦출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병자년(1396) 5월에 신륵사(神勒寺)로 피서하기를 청하였는데, 갈 때 병이 생겼다. 절에 가자 병이 더하니 중이 옆에 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색이 손을 내 흔들면서 하는 말이,
"죽고 사는 이치는 내가 의심하지 않으오." 하고, 말을 마치자 돌아갔다.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도 애를 쓰고 부지런하여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짓는 데는 붓만 잡으면 즉시 쓰되 사연이 정밀하고 간절했었다. 문집 55권이 세상에 나왔다. 집을 위해서는 재산의 유무(有無)를 묻지 않았으며, 평시에 경솔한 말과 갑자기 노여워하는 얼굴빛을 보지 못했다. 연회나 접대받는 자리에서도 여유 있고 침착하여서 처사하는데 난잡스럽지 않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언행은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임금의 은총과 좋은 자리에 있었어도 기뻐하지 않았고, 두 번이나 변란과 불행을 만났으되 슬퍼하지도 않았다. 색의 아들은 세 아들 맏아들 이종덕과 둘째 아들 이종학이 있으나 먼저 죽었고, 셋째 아들 이종선은 지금 병조 참의가 되었다.” (《태조실록》 5년 5월 7일, 1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