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중국 당나라 때 동방규라는 시인이 살았다지요.
그는 전한(前漢)의 효원황제(孝元皇帝)때 왕소군(王昭君)이라는 궁녀가
흉노족의 우두머리 호한야에게 공물에 끼워져 시집간 것이 못내 아쉬워
<소군원(昭君怨)>이란 시를 지었다네요.
왕소군은 하늘의 기러기도 그 미모에 넋이 나가 날갯짓을 잊고 떨어질 정도였대요.
그래서 낙안(落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전해 오지요.
동방규는 그게 어지간히도 배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칠백 년이나 지난 일을 다시 끄집어냈으니까요.
그런데 그 <소군원>이란 시가 천삼백여 년이나 흐른 이십 세기말에 때아니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지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
그랬었지요.
<소군원>의 한 구절처럼 1980년 신군부 시절, 이 땅의 봄은 그랬답니다.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로다!
그 봄의 어느 날 나는 경원선 열차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이라는 명사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봄이었지요. 그렇게 봄 같지 않은 봄도 처음이었고, 경원선 열차도, 동두천이라는 도시도 처음이었답니다. 망월사역을 지나고 의정부를 지날 때까지는 서울처럼 개나리도 피었고, 멀리 낮은 산에 진달래 무더기도 보였지만 동두천역에 내리니 들판은 아직 갈빛 세상이었고 땅거미 드리우는 시가지에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아참, 그 봄엔 ‘처음’이 또 있었네요.
기지촌 클럽도 처음이었고 코앞에서 미군을 본 것도, ‘양공주’라 불린 여성들도 클럽 안의 포켓볼 당구대도 처음이었지요. 클럽 골목에 다다르니 네온불 간판들이 옥수수 대궁처럼 늘어서 있어 영어 간판을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골목 중간쯤에 있는 ‘라스베가스’라는 이름의 클럽을 찾아내 ‘내국인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문을 열고 들어선 나는 웅장한 음향에 벌써 제압당하고 말았지요.
주말이라 그런지 이른 시간임에도 북적였고 처음 보는 ‘엽전*’을 향한 힐끗거림이 어두침침한 불빛 속에서도 다 보이는 듯했습니다. 나비넥타이를 맨 바텐더인 듯한 사람에게 사장님을 찾으니, 천장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어요? 위를 올려다보니 떡 하니 우주선이 하나 떠 있더군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 한 중년 아저씨가 음반을 고르느라 끙끙대고 있기에 “새로 오게 된 디제이”라고 정체를 밝혔더니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환한 얼굴로 다짜고짜 나를 끌어 앉히곤 우주선 모양의 음악실을 내려갔습니다. 주방장 아줌마가 올려다 준 오므라이스를 틈틈이 떠 넣으며 그렇게 정신없이 기지촌에서의 첫 밤이 지나갔습니다.
“이상하게 형이 좋아요. 디제이 형들이 많이 있었지만 다들 나를 무시하고 시켜 먹기만 했어요.”
이름이 석이라 했습니다. 열여덟 먹었다 했고요, '라스베가스' 클럽에 웨이터로 온 지 벌써 이태나 지났다 했습니다. 이튿날 낮에 그는 동두천이 처음인 나를 위해 기지촌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지요. 그러다 클럽 골목 뒤로 흐르는 냇가를 거닐 때 아직 낯설 텐데도 붙임성 있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며칠 전에 내 전임 디제이가 주인의 고명딸과 눈이 맞아 도망쳤다는 얘기도 키득거리며 들려주었고, 그제야 디제이를 허겁지겁 구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지요.
"이 물을 따라 올라가면 소요산이 나와요. 그 밑에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백 리도 안 되는 거리인데도 이물 저물 섞여서 이렇게 시커멓게 썩어 냄새가 코를 찌르네요. 세상이 그런가 봐요. 사람이 많이 모이면 똥파리가 꾈 정도로 썩나 봐요.“
나는 속으로 “이 녀석은 일찍 세상으로 나와서 그런지 어둠을 보는 눈이 빠르구나.” 했지요.
그는 고아라 했습니다.
엄마는 석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하더군요.
소문으로는 시집오기 전에 장래를 약속하고 깊게 사귄 총각이 있었는데, 부모님이 그 총각을 탐탁지 않게 여겨 총각이 군대 간 틈에 석이 아빠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냈다 하더래요. 석이 아빠는 그 뒤로 술병을 허리춤에 차고 살다가 술이 모자랐는지 농약마저 마셔버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6.25때 과부가 된 할머니가 그 핏덩이를 키웠는데 이태 전에 할머니마저 명줄을 놓아버려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살길을 찾아 물길 따라 그곳으로 흘러왔다고 했습니다.
어느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했듯이 그렇게 썩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도 들쑥이 눈곱을 떼고 원추리도 손톱을 내밀며 봄이 오고 있었습니다.
"어머, 석이야! 봄바람 쐬러 나왔구나. 새로 온 디제이도 같이 오셨네.
바람 쐬고 누나 집에 와. 수제비 끓여 줄게. 오늘 리키 없어. 근무야."
"‘개나리 누나’에요. GI*들은 “포르시”라 불러요. 무지 착해요.
리키하고 미국으로 간대요. 혼인신고도 했대요.“
“포르시는 아마 개나리란 뜻일거야. 영어로 ‘포르시티아’거든.”
“나도 여군 GI 만나서 미국 가는 게 꿈이에요.”
‘개나리 누나’가 사는 동네를 ‘생연리’라 하더군요. 클럽 골목이 있는 ‘보산리’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있는 곳이지요. 부엌 하나가 딸린 단칸 셋방에 들어서니 그녀는 벌써 멸치육수를 끓여 놓고 반죽을 치대고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이렇게 누추한 곳에 오라고 하여 쑥스럽다.” 하면서 손은 재빠르게 수제비를 끓여 왔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엄마 손맛’을 기억하게 하는 점심이었지요.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녀는 물보다 먼저 ‘개나리’ 담배를 빼 물더군요. 내가 “개나리가 개나리를 태우네요.” 했더니 그녀는 피식 웃고는 허공을 바라다보더니 이내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의 고향은 경상도 어디라 했습니다.
대대로 가난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집안에서 맏딸로 태어났다더군요. 동생 여섯에다 할머니까지 합하면 입이 열이었으니 도지농사로는 보리죽도 제대로 못 먹었겠지요. 그녀가 열여섯 먹던 해였다네요. 우물가에서 보리쌀을 씻는데 옆집 훈장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그렇게 서럽게 애간장을 훑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래가 <개나리 처녀>라는 노래였는데, 노래가사가 당시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더래요.
자기네 마을 우물에도 축대 위에 개나리가 볏가리처럼 늘어서서 피고 우물 바로 옆에는 수양버들 고목이 집채만 한 그늘을 드리우는 곳이라지요. 더군다나 "이팔청춘 봄이 가네"라는 대목에서는 눈물이 뜨물 위로 뚝뚝 떨어지더래요.
이래선 안 되겠다. 이건 사는 게 아니다. 이렇게 살다간 우리 식구 평생 이밥 한 그릇 못 먹겠다 싶어 친구인 금순이와 짜고 부모님 몰래 금순이네 닭장에다 병아리를 두 마리 사다 넣었대요. 그 병아리가 커서 알을 낳기 시작하니 금순이가 그녀의 몫은 따로 챙겨주었답니다. 그 달걀을 장에 내다 팔아 꼬박 일 년을 모아서 농번기를 앞둔 어느 봄 새벽에 무작정 상경길에 올랐다지요.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녀는 그 돈으로 버스 삯 내고 기차표 끊고 나니 없더래요. 하루 종일 쫄쫄 굶으며 청량리역에 내리니 하늘이 노랗더랍니다.
그런 데다 읍내 구경도 제대로 못 해본 그녀가 홀로 서울 땅에 떨어졌으니, 넋이 완전히 빠졌겠지요. 하도 무서워 보따리를 부둥켜안고 벌벌 떨고 있는데 “어이, 아가씨” 하고 누가 부르더래요. 뒤를 돌아보니 “취직하러 왔구나. 이리 와 내가 좋은 데 넣어줄게” 그 말을 들은 그녀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구나” 했대요.
“얼굴을 보니 종일 굶었구나. 우선 요기부터 하자.” 하며 근처 국밥집으로 데려가더래요. 얼마나 허기가 졌는지 체면은 저당 잡히고 게 눈 감추듯 국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네요.
“오늘은 이미 해가 졌으니 이 아저씨가 아는 집에서 자고 내일 가도록 하지.”
“세상에는 이렇게 고마운 사람도 사는구나.” 생각하니 조금도 의심이 안 생기더래요.
그 아저씨가 안다는 집을 따라가니 방문이 양쪽으로 줄을 섰고 맨 구석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더랍니다.
쪽방 안으로 들어서니 피곤한 데다 배도 부르고 긴장도 풀리고 해서 잠을 주체할 수가 없더랍니다. 그대로 쓰러져 얼마쯤 자다 보니 무언가가 무겁게 짓누르고 아랫도리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어 깨어보니 그 고마운 아저씨가 짐승으로 변해 있더래요. 악몽 같은 밤이 지난 다음 날 그는 그녀의 옷을 감추고는 먹는 것도 방으로 가져와 먹였고, 용변 볼 때도 속옷만 걸치게 하고 변소까지 따라와 감시하더랍니다.
그 뒤로도 며칠을 더 그에게 농락당한 끝에 그녀는 “오팔팔”이란 곳에 넘겨졌고, 남산 기슭의 ‘양동’과 영등포역 뒷골목을 거쳐 그곳까지 오게 되었다 했습니다.
“어느 날 담배 가게 앞을 지나는데 개나리 사진이 들어있는 담배가 보이는 거예요. 고향 생각이 나서 양담배 대신 ‘개나리’를 피우게 되었지요. 그런 이유로 주위에서 ‘개나리 처녀’라 놀리더니 나중엔 그냥 ‘개나리’라 부르더군요.“
“미국에 가면 행복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던데.”
“상관없어요. 내 몸이 부서져도 내 동생들 미국으로 불러들이고 우리 집 가난 면할 수만 있다면.”
그 말을 마친 그녀는 처음 보는 내게 지나온 일을 털어놓은 이유를 밝히더군요. 어젯밤 나를 처음 봤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대요. 바로 밑 동생인 줄 알고요. 내가 그렇게 닮았다나요. 그러면서 동전만 한 하회탈 목걸이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손재주 좋은 그 동생이 깎아 준 거라나요.
그 뒤로 그녀는 나에게 정말 친누나처럼 잘해 줬고 석이도 친동생처럼 따랐지만, 몇 달 뒤 나는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본고장 음악이 궁금해 기지촌으로 모험을 떠났고 우리의 유행과는 동떨어진 새로운 음악을 배우는 소득도 컸지만, 오래 머물 곳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지요.
또다시 봄 같지 않은 봄입니다.
춘분날에도 함박눈이 내리더니 아직 바람도 차고 개나리도 딴 때보다 늦게 피네요. 그때 그 봄처럼.
* 엽전 – 한국 사람의 낮춤말
* GI - 미군병사
개나리 우물가에 사랑 찾는 개나리 처녀
종달새가 울어울어 이팔청춘 봄이 가네
어허어어야 얼씨구 타는 가슴 요놈의 봄바람아
늘어진 버들가지 잡고서 탄식해도
낭군님 아니 오고 서산에 해지네
석양을 바라보며 한숨 짓는 개나리 처녀
소쩍새가 울어울어 내 얼굴에 주름지네
어허어어야 얼씨구 무정코나 지는 해 말 좀 해라
성황당 고개 너머 소 모는 저 목동아
가는 길 멀다 해도 내 품에 쉬려마
천지엽이 노랫말을 쓰고 김화영이 곡을 붙인 봄노래의 대명사 <개나리 처녀>는 1957년에 <신성레코드>에서 발매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최숙자의 데뷔곡으로 당시 그녀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작사가 천지엽은 본명이 천정식으로 천일파라는 이름도 썼다.
작곡가 김화영은 1940년대 말부터 활동하여 50년대에는 수많은 인기곡을 냈지만, 명성에 비해 개인 정보가 알려진 게 별로 없어 아쉬움을 감출 길 없다. 최숙자 역시 <눈물의 연평도>를 비롯하여 <그러긴 가요>, <가는 봄 오는 봄>, <모녀 기타>, <갑돌이와 갑순이> 같은 묵직한 히트곡을 냈지만, 일찍 미국으로 가는 바람에 얘깃거리를 많이 남기질 않았다.
1941년에 태어나 ‘77년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갔고, 2012년에 뇌졸중으로 영면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