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농부(問於農夫, 농부에게 까닭을 묻다)

  • 등록 2024.05.09 12: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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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13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가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간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과제가 정해지면 토론하여 좋은 해법을 찾아 현장에서 실현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나갔다.

 

이 가운데 특히 필요한 문제는 해당 관련된 사람에게 물었다. 농민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농사법을 개량해 나갔다. 다른 임금에게서 찾을 수 없는 세종 7년의 한 예가 있다.

 

(심한 가뭄으로 농사 사정을 알아보고자 서문 밖에 나가 두루 살피다.)

임금이 말하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다. 소나기가 잠시 내렸으나, 안개가 끼고 흙비가 왔을 뿐이다.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여 이렇게 되니, 장차 벼농사 형편을 나가 보리라."

하고, 드디어 서문 밖에 나가 두루 살피고 돌아와서, 대언(代言, 승지)들에게 말하였다.

 

"금년 벼농사는 모두들 ‘꽤 잘 되었다.’라고 하더니, 오늘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오늘 본 영서역(迎曙驛) 홍제원의 땅은 비옥한 편인가 메마른 편인가." 하니 지신사 곽존중(郭存中)이 대답하기를, "이들 땅은 원래 메마른 데다가 더구나 가물어서, 벼농사가 이렇게 잘못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영서 땅은 원래는 비옥한 땅인데, 존중이 메마르다고 대답한 것은 그릇된 것이다. 이날 행차에 다만 번을 선 내금위 사금만 거느리고 양산과 부채는 쓰지 않았다. 벼가 잘되지 못한 곳을 보면,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까닭을 물었다. 점심을 들지 않고 돌아왔다. (⟪세종실록⟫7/7/1)

 

세종은 조선시대 많은 임금 가운데 한 분이지만 특히 농사에 관해 관심이 있어 농부에게 물었다. 단순히 농사에 관한 행정이라 해도 해당 관리와 기술자들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임금이 직접 농부에게 물을 정도의 관심을 가진다면 그 농사기술의 개량 범위는 상당히 넓어질 것이다. 세종의 농민에 관한 관심과 농사 개량이 자연스레 확대되어 가는 예를 보자.

 

 

낭비적 요소의 불교행사의 금지

 

먼저 살림살이와 농정에서 낭비요소를 없애는 일이다. 그 하나로 불법(佛法)을 억제할 것을 주청한 상소가 있다.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설순(偰循)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중의 무리는 혹은 안거(安居, 스님의 수행)를 칭탁(稱託)하고... 또 들으니, 올해 2월 15일에는 거리의 여러 중이 한강(漢江)가에 수륙회(水陸會)를 성대하게 개설하여, 깃발은 강을 덮고 꽹과리와 북소리는 하늘을 진동시켰으며, 배로 운반하고 수레로 실어다가 곡식을 모은 것이 만으로 셈하게 되고, 중들을 공궤(供饋, 윗사람에게 음식을 드림)한 것이 무려 천만 인이 되었으며, 밥을 강물 속에 던져서 물고기들을 공양하기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아, 농부(農夫)의 곡식을 가져다가 놀고먹는 백성을 공궤하고, 우리 백성의 밥을 버려서 물고기를 공양(供養)한단 말인가. 불교가 왕정(王政)에 유해(有害)함이 이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신 등은 매우 상심합니다. (⟪세종실록⟫14/3/5)

 

신하들이 불교의 농민에 대한 피해를 지적했지만, 세종은 불교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의 농업 정책

 

세종대왕은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펴내 농민들이 과학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농업의 과학화’를 만든 임금이다. 농업은 산업화시대 이전인 조선시대에는 국가 산업의 거의 전부였다.

 

《농사직설》은 세종대왕이 정초(鄭招) 등에게 명해 세종 11년(1429)에 펴낸 농서다.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중국의 농서를 사용해 농사를 지었는데 중국과 조선의 기후와 환경 차이로 오류가 많았다. 그래서 세종은 우리 실정에 맞는 농서를 만들어 보급하기로 한 것이다.

 

《농사직설》은 먼저 일반론으로서 종자와 토양을 다루는 방법을 설명하고, 그다음에는 각종 작물의 재배법을 기술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이한 점은 《농사직설》이 자료로서 통계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전하고 있다.

 

“(앞줄임) 오방(五方)의 풍토(風土)가 같지 아니하여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기 적성(適性)이 있어, 옛글과 다 같을 수 없다 하여, 여러 도(道)의 감사에게 명하여 주현(州縣)의 노농(老農, 늙은 농부)들을 방문하게 하여, 농토의 이미 시험한 경험에 따라 갖추어 아뢰게 하시고, 또 신(臣) 초(招)와 변효문과 더불어 서류 따위를 조사, 참고하여 그 중복된 것을 버리고 극히 중요한 것만 뽑아서 엮어 한 편을 만들고 제목을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고 하였다. 농사 말고는 다른 설(說)은 섞지 아니하고 간략하고 바른 것에 힘을 써서, 산과 들의 백성들에게도 환히 쉽사리 알도록 하였다.” (⟪세종실록⟫11/5/16)

 

《농사직설》은 학자들이 책상 위에서 만들어 낸 책이 아니었다. 당시 전국의 농업 전문가 곧각 지방에서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 경험이 풍부한 농민에게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가 있고, 어떤 방법이 안 좋은 지를 모아, 이를 가리고, 수렴해 중요한 점만 모아 책으로 만든 것으로 오늘날 통계 조사 방법과 전혀 다르지 않다. 곧 《농사직설》은 조선의 농업전문가의 경험과 지식의 통계를 바탕으로 우리 실정에 맞게 펴낸 농서였던 것이다. 《농사직설》은 한글이 창제된 뒤에는 일반 농민도 읽을 수 있게 한글로 번역돼 보급되었다.

 

《농사직설》의 보급은 농업의 과학화와 농업생산력 증대에 이바지했다.

 

 

 

측우기의 발명

 

또 하나는 농사의 연속적 창작이지만 조선의 강우량을 통계로 작성하게 되는 <측우기>다. 농사를 결정짓는 것은 날씨인데 특히 비는 농사의 성패에 결정적 요소다. 가뭄과 홍수를 예측할 수 있다면 농작물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비를 내리고, 그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 밖이다. 그래서 세종은 ‘비가 내리는 양을 알고 조사할 순 없을까?’라는 의문에서 비가 온 양을 측정하는 물건, 측우기를 발명하게 된다. 측우기는 일반적으로 장영실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세종의 세자였던 문종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지지받고 있다고 한다. 《세종실록》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정도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적확하게 비가 온 정도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宮中)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정도를 실험하였는데, 이제 이 물건이 만일 하늘에서 내렸다면 하필 이 그릇에 내렸겠는가.(⟪세종실록⟫23/4/29)

 

측우기 발명은 조선에 획기적 변화를 끌어냈다. 세종은 측우기 발명 이후 8도에 측우기를 보내, 지역의 강수량, 비가 내리고 그친 시간을 기록하게 하는데, 이런 식으로 전국 강우량을 측정하고, 비와 관련한 통계를 축적하니 지역별로 비가 많이 오거나 적게 내리는 시기, 비가 충분히 내릴 때와 적게 내릴 때를 예상해 농업에 적용할 대비책을 마련하는 등의 조치가 가능해졌다. 더불어 농작물의 흉풍에 따라 부과하는 세금 정책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측우기를 통한 강우량 측정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중단되었다가 영조시대를 거치며 다시 시행되는데, 정조 때 이르면 전년도 동월의 강수량과 올해 강수량을 비교할 정도로 통계를 모은 기록이 실록에 있다.

 

《농사직설》이 농업 통계를 모은 결과물로 지은 것이라면 ‘측우기’는 통계를 더욱 정확하게 내기 위해 만든 발명품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백성, 특히 농민의 의견을 듣고, 통계와 같은 효율적 방법을 활용해 백성을 위한 정책을 세우셨다.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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