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신의 아내 최(崔)는 나이 45살에 이르도록 아들이 없어 마땅히 의절(義絶)해야 하겠으므로, 신이 마지못하여 내보내고 강비호(姜非虎)의 딸에게 다시 장가 들었더니, 최(崔)의 아버지 주(澍)가 일찍이 사헌부에 고소하여 신을 죄주고자 하였으나, 사헌부에서는 최 여인이 신과 더불어 아버지의 삼년상(三年喪)을 지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임금께 말씀 올리고 다시 모여 살게 하였습니다.“
이는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1425) 11월 16일 기록으로 사헌부가 이미(李敉)의 유처취처(有妻娶妻, 아내가 있는데 또 아내를 얻음) 죄를 탄핵하고 ”최 여인이 시아버지 삼년상을 치렀으니, 다시 합쳐 살고 새장가를 든 여인과 이혼하라.“라고 내린 판결에 불복하여 ”대를 잇지 못하면 안 되니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다시 상소하자 나라는 이 상소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원 부인과 살지 않는 죄로 곤장 90대를 때렸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조선시대는 대를 잇는 것이 가문에 가장 큰 일로 아들을 낳지 못하면 새 여자를 들이는 일이 예삿일이거니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시아버지 삼년상을 치르면 원래의 아내와 헤어지지 못하게 했습니다. 참고로 조선시대엔 이혼의 증서로 ‘옷섶’이 있었습니다. 부부의 한쪽이 옷섶을 잘라 상대방에게 주고 상대방이 그것을 받으면 이혼을 수락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지요. 본래 옷섶은 옷 앞부분이 벌어지지 않게 여미는 역할을 하는데 서로 겹쳐야 할 ‘겉섶’과 ‘안섶’ 중에 한쪽을 잘라냄으로써 서로 붙어 있어야 할 부부가 갈라섰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