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빛나는 정치를 꿈꾸었던 정명공주

  • 등록 2024.08.26 10: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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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 정명공주 이야기》, 글 박성호, 그림 수아, 프로젝트A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5)

“공주는 안으로는 밝으시지만 드러내지 않으시며, 재능이 있으시지만, 그 명예에 관심을 두지 않으셔 심덕의 온전함이 일부분만 나타났소.

공주의 글씨를 받아 보니, 선조 대왕의 필법에서 나온 듯하오.

필적이 웅장하고 건장할 뿐만 아니라 온화하면서도 두터워서 여인이 쓴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소.

필법에서 마음을 읽혀, 그 성정에서 깊이 감동하게 되니 가문이 엄숙하고 화목하겠습니다.”

 

정명공주.

선조의 늦둥이 공주로 태어나 여든이 넘도록 천수를 누린, 복 많은 여인이다.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자손들도 크게 번창했다. 어찌 보면 조선왕실의 공주 가운데 가장 많은 복을 누린, 운 좋은 여인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날이 있기까지 유년기에 엄청난 고생과 실망과 좌절이 있었다. 이복 오라버니이자 선조의 뒤를 이어 임금으로 즉위한 광해군은 정명공주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서궁(오늘날의 덕수궁)에 유폐시켰다. 정명공주도 이때 어머니와 함께 죽은 듯 숨죽여 살며 갖은 고생을 다 했다.

 

박성호가 쓴 책, 《화정- 정명공주 이야기》는 이런 극적인 공주의 일생을 소설 형식으로 담담하게 풀어낸 책이다.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나 선조의 사랑을 받던 시절부터 광해군이 즉위한 뒤 서궁에 유폐되어 겨우 목숨만 부지하다가, 인조반정으로 다시 공주의 지위를 되찾고 늦게나마 반주원과 혼인해 가문이 번창한 이야기까지, 박진감 넘치는 전개에 눈을 떼기가 어렵다.

 

 

참으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인생이었다. 정명공주는 선조가 일찍 승하하지 않고 십 년만 더 살았어도 완벽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선조는 본인 스스로가 방계 출신이었기에 후궁이 아닌 왕후가 낳은 공주와 대군을 애타게 기다렸고, 마침내 인목왕후가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자, 아기일 때부터 엄청난 재산을 주면서 끔찍이 아꼈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선조는 정명공주가 불과 다섯 살 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영창대군은 무척 경계했지만, 정명공주는 왕위를 위협할 수 없는 공주인데다 딸과 비슷한 나이라 딸을 대하듯 귀여워했다.

 

아무리 우애가 좋은 이복남매라 해도 현실은 냉정한 것이었다. 영창대군이 역모 사건에 휘말리면서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귀양보내게 되었고, 덩달아 인목왕후와 정명공주도 서인으로 강등되어 유폐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끝, 정명공주는 십대 시절의 대부분을 서궁에 유폐된 채 죽은 사람처럼 지냈다.

 

정명공주는 이 시절을 슬기롭게 잘 넘겼던 것 같다. 아버지 선조와 어머니 인목왕후의 특기였던 서예를 연습하고, 아버지와 남동생들이 모조리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들 영창대군마저 잃은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왕실과 혼인하는 바람에 집안 전체가 몰살당한 인목왕후는 딸 정명공주가 함께 있지 않았다면 자결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조선 역사에서 반정은 단 두 번 성공했다. 중종반정, 그리고 인조반정. 조선 역사를 약 500년이라고 했을 때 반정이 성공하는 것은 25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축출된 것이다. 정명공주는 21살이 되어서야 서궁에서 풀려나 공주의 신분을 되찾게 되었다.

 

반정이 성공한 뒤 사흘 만에 정명공주의 혼처를 찾기 시작했을 정도로 정명공주의 혼사는 시급했다. 당시 21살은 이미 자녀를 여럿 두고도 남았을 늦은 나이였다. 공주의 나이와 조건에 맞는 짝을 쉽게 찾을 수 없어 간택을 한참 한 끝에 노론 명문가 홍주원이 낙점됐다. 홍주원은 혼처가 있었으나 왕실의 명으로 파혼하고 부마가 되었다.

 

정명공주는 그 뒤로 역모를 꾀한다는 인조의 의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거센 풍파를 헤쳐 나가며 일가를 이루었다. 정명공주가 딴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집요한 인조의 의심 속에 살아남기 위해 몸을 낮추고, 또 낮추었다. 지존의 딸로 태어나 자칫 오만해질 수 있었던 정명공주의 성정은 수많은 고난과 풍파 속에 다듬어져 겸손해졌다.

 

(p.181)

정명공주는 스스로 몸을 낮추고 덕을 베풀며 후덕하게 사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고 복을 받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묵묵히 실천하며 살았다. 정명공주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소학의 한 구절을 따와 글로 써서 막내아들 홍만희에게 전했다. 홍만희는 이 글에 어머니 손때가 묻은 작품이라는 뜻으로 <자위수택(慈闈手澤)>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너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었을 때,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귀로만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논의하기 좋아하고, 정치와 법령을 함부로 따지는 것을 가장 미워한다. 내 자손은 죽을지라도 이런 행동을 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바란다.

 

또, 정명공주가 썼던 글씨 가운데 크게 쓴 여덟 글자가 있었는데, 정명공주가 세상을 떠나고 네 명의 아들이 각자 두 글자씩 나눠 가졌다. 이때 막내아들이 물려받은 작품이 바로 ‘화정(華政)’, 두 글자다. ‘아름다운 정치’나 ‘빛나는 다스림’으로 풀이되는 이 말은 정명공주가 그토록 원했던, 그러나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빛나는 정치를 염원한 글귀였다.

 

빛나는 정치란 무엇일까? 광해군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인조가 그랬던 것처럼 본인의 아집과 의심에 빠져 나랏일을 그르치지 않고, 마음을 밝게 다스려 모두를 빛나게 하는 정치일 것이다. 이 책을 덮을 때쯤 가슴에 들어오는 ‘화정’, 두 글자를 마음에 새긴다면 적어도 미몽(얼떨떨한 정신 상태)에 빠져 ‘그늘진 정치’는 하지 않을 수 있겠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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