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세연정과 동천석실에서 한 사람을 그리다

  • 등록 2024.09.18 10: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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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녹우당에 이어 보길도 윤선도 유적지 답사 2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 닻 들어라 닻 들어라 / 만경창파에 실컷 배 띄워 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 인간 세상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 ‘가을’ 가운데 

 

고산 윤선도(1587-1671)가 이 시를 지은 것은 64살 되던 1651년(효종2) 9월로 보길도 세연정(洗然亭)에서다.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단정하여 마음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이다. 고산의 발자취를 따라 서울에서 해남 고택으로 달렸다가 다시 보길도로 가기 위해 차를 몰아 완도 화흥포항에 닿았다. 이곳에서 노화도행 배를 타고 동천항에서 내려 배에 실었던 차를 타고 다시 보길도로 내달았다. 교통이 좋아진 지금도 전혀 쉽지 않은 땅끝마을 보길도(甫吉島)에서 고산은 여생을 마쳤다.

 

초가을이지만 여전한 무더위 속에 세연정으로 가기 위해 원림(原林)을 걷는다. 가뭄이 들어 원림 속 계곡물은 말라 있었고 숲속 늦매미 울음소리가 더 무덥게 느껴졌다. 평일에 찾아서인지 세연정에는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고즈넉한 시간을 오롯이 보낼 수 있다는 기쁨에 시선을 연못쪽으로 돌리니 부용동팔경(芙蓉洞八景) 가운데 제3경이라는 연정고송(然亭孤松)이 운치를 더한다. 고산도 오늘 나처럼 이 자리에서 노송을 바라다보았으리라. 정자에 앉아 400여년 전 고산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고산은 직신(直臣)으로 불릴 만큼 자기 신념과 철학이 확실한 선비였다. 그가 집권세력에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말년에 고산은 또다시 모함받고 파직되어 해남 고택에 머물던 중, 병자호란으로 인조임금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도 부끄럽다고 하여 제주도로 은거지를 옮기고자 길을 떠나다가 그만 이곳 보길도 비경에 이끌려 정착하게 된다.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 윤위(尹威), <보길도지 (甫吉島識)>

 

삶의 말년을 보길도에서 보내기로 작심한 고산은 세연정을 짓고 계곡물을 가두기 위해 널빤지 같은 돌 판석(板石)으로 물을 가두는 계담(溪潭)을 만들었다. 그 물을 이용하여 세연정 주변에 자연스러운 연못이 만들어졌다. 연못 속에 비친 세연정 모습은 그야말로 선경(仙境) 가운데 선경이다. 하지만 기자가 세연정을 찾은 날은 여름 가뭄이 오래된 듯 연못 물이 말라버려 그 경치는 느끼기에 어려웠다.

 

 

 

“내 어찌 세상을 저 버리랴 /세상이 나를 저버렸네 / 이름은 중서 위에 있는 것이 아니거니 / 삶은 항시 녹야의 규범과 같았다네.”

 

이는 고산이 이곳 세연정에서 지은 시로 ‘동하각(同何閣)’이란 이름이 붙어있다. 고산은 세연정에 동서남북과 중앙, 모두 다섯 곳에 현판을 달았는데 남쪽에는 일곱 암석이 있어 정자 서쪽의 편액을 칠암헌(七岩軒)이라 하였고, 중앙은 세연정(洗然亭), 남쪽에는 낙기란(樂飢欄), 서쪽에 동하각(同何閣), 동쪽에는 호광루(呼光樓)라 하였다.

 

흔히 사람들은 고산이 이곳에 세연정을 지어놓고 ‘주로 연회와 유희를 즐겼다’고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하각 시’에서 보듯이 ‘자신을 버린 세상’에 대한 고뇌를 엿보게 한다. 이곳에서 지은 봄, 여름, 가을을 노래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도 그러한 성정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세연정을 나와 낙서재(樂書齎)와 곡수당(曲水堂)에 이어 동천석실(洞天石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낙서재는 고산의 옛 살림 집터이고 곡수당은 고산의 다섯째아들 학관이 머물렀던 공간이다. 낙서재와 곡수당 일원의 건축물들은 당시 초당(草堂)이 허물어져 집터만 있던 것을 후에 다시 기와집으로 말끔하게 정비한 곳으로 사방팔방의 산림 속에 자리 잡은 아늑한 곳이다.

 

낙서재와 곡수당 등은 세연정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 주목하고 싶은 곳은 낙서재 맞은편 산 중턱에 있는 동천석실(洞天石室)이다. 보통 이러한 산중턱의 돌바위에는 불교의 암자가 자리할 법한데, 이곳에 고산은 작은 정자 두 채를 짓고 하나는 침실로 하나는 독서공간으로 삼았다.

 

 

 

 

 

차를 산밑 주차장에 세우고 녹음이 우거진 자갈길을 20여 분 올라야 동천석실에 다다를 수 있는데 무더위 속이라 발걸음이 더욱 무거웠다. 이 비탈진 산길을 짚신으로 올랐을 고산 선생, 젊은 나이가 아니라 당시 환갑도 훨씬 지났을 나이에 동천석실을 춘하추동 오르내렸다니 상상이 가질 않는다. 헉헉거리며 숨이 턱에 차오르는 것을 참고 산길을 올라가니 동천석실이 나타났다. 저 아래 발밑에 펼쳐진 부용동보다 오히려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는 곳에 동천석실은 자리했다. 이 높고 험한 바위 위한 평짜리 집을 사랑한 고산의 마음을 이곳에 오르니 알 것 같았다.

 

시퍼런 살아있는 권력을 쥔 궁궐의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주저없이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고산, 직신(直臣)이란 지금의 눈으로 보면 강직한 일이지만 당사자에게는 고통이 수반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왜 고산인들 몰랐을까? 그래도 역사는 간신보다는 직신을 기억해 주고 있으니, 사필귀정이라는 말은 시대를 초월하는 말인 듯싶다.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역사 현장이다. 그러나 땅끝마을 섬이다 보니 선뜻 다가서기도 쉽지 않은 곳임은 틀림없다. 그래도 그 섬에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은 고산 윤선도의 삶의 자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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