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 그림이 건네는 소소한 이야기

  • 등록 2024.11.11 12: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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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소담(간송미술관의 아름다운 그림)》, 탁현규, 디자인하우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그림은 시대를 보여준다.

그림이 담아낸 그 시대의 모습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귀히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당대의 미감과 창의성을 고스란히 담아낸 옛 그림들을 보노라면, 오랜 세월을 뒤로하고 그것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퍽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탁현규가 쓴 이 책, 《그림소담》은 월간 <디자인>과 <행복이 가득한 집>에 연재한 그림 가운데 간송미술관 소장품만 가려 뽑아 편집한 것이다. 옛 그림들을 선인들이 그림 소재로 즐겨 사용하였던 일곱 가지 주제인 ‘봄바람’, ‘푸른 솔’, ‘풍류’ 등에 따라 분류해 은은한 감성을 더했다.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문화유산을 보유한 사립 박물관이다. 그 소장품만으로 한국 미술사를 쓸 수 있을 만큼 으뜸 수준의 유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간송 선생은 한국문화가 짓밟히던 참담한 시기에 전 재산 십만 석을 우리 미술품을 지키는 데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렇게 작품을 지켜낸 덕분에 ‘진경 시대’라는 우리 미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탄생할 수 있었다.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세워지면서 합류한 스물여섯살의 신진학자 가헌 최완수 선생은 그 뒤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간송미술관의 작품을 연구하며 한국 미술사를 정립해 나갔다.

 

최완수 선생은 숙종에서 정조에 이르는 125년 동안의 우리 문화 황금기를 ‘진경 시대’라 이름 붙였고, 이로써 한국 역사계는 오랜 식민 사관에서 탈피해 조선 후기 문화를 새롭게 해석하는 눈을 얻었다. 1990년대 중반 간송미술관에서 탄생한 ‘진경 시대’라는 개념은 간송 선생이 지켜낸 문화유산이 일구어낸 값진 성과였다.

 

책에 실린 그림들이 하나같이 눈길을 끄는 매력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은 화원 정홍래가 그린 매 그림이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매의 맑고 강한 시선에는 가슴을 웅장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p.100)

바다 해돋이의 장엄은 영물인 매의 시선도 끌어당긴다. 매의 위풍이 참으로 당당해 영웅의 기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안광(眼光)이 작렬해 붉은 태양 빛과 좋은 짝을 이루고, 깃털은 윤기가 자르르 흘러 때깔이 곱다. 튼실한 큰 발가락과 날카로운 검은 발톱으로 바위를 꽉 움켜쥐어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응시하는 매의 맑고 강한 기운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귀족의 모습과 닮았다.

 

이 그림을 그린 정홍래는 영조 때 화원으로, 숙종 어진을 그리는 데 참여했을 만큼 초상화에 재주가 뛰어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 매 그림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지녔다. 조선 시대에는 정초에 화원들이 해와 매를 같이 그려 임금께 바쳤는데, 이런 그림을 ‘세화(歲畵)’라고 한다. 해돋이와 매를 같이 그린 것은 매의 출중한 기상과 해의 밝음을 본받아 어진 정치를 펼칠 것을 간언하는 것이었다. 임금에게 바친 그림이었기에 화가의 인장이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지은이는 이 그림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적는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바다 바위 위에 있어도 위축되지 않는 매처럼, 사방을 환하고 따뜻하게 밝히는 해처럼 살리라 마음먹어본다.’. 매의 의연한 기상과 해의 따뜻한 기운이라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엇이랴.

 

책에는 겸재 정선의 그림도 많이 실려 있다. 겸재 정선이 율곡학파인 서인의 학통을 계승한 광주 정씨 가문에서 태어나, 당대 명문가인 안동 김씨의 대학자인 김창흡을 스승으로 모시고 성리학, 특히 주역 연구에 매진한 화가였다는 점은 퍽 놀랍다.

 

 

 

(p.225)

정선은 우리 산천의 주종을 이루는 화강암 바위와 소나무를 묘사하는 화법을 만들었으며 그리고자 하는 대상에 가장 적합한 화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먹으로 삼라만상의 정신을 청명하게 묘사했고, 과감한 색을 써서 대상의 진면목을 그대로 전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경물에서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해 가장 그림답고 아름답게 표현한 데 큰 가치가 있다. 이는 정선이 사물의 이치에 밝은 선비 화가였기 때문이다.

 

서양 명화가 아무리 좋다 한들 우리 그림이 주는 깊고 편안한 아름다움에 견줄까 싶다. 우리 산천을 담아낸 그림과 맑고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림들을 감상하는 운치가 쏠쏠하다. 책의 편집 방식도 여유가 느껴지는 독특한 여백 배치를 택하고 있어 미적으로도 아름답다.

 

마침 간송미술관에서는 간송의 스승이었던 위창 오세창의 감식안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12월 1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번 기회에 오랜만에 간송미술관을 찾아 이 모든 것을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의 안목과 지혜를 되새겨봐도 좋을 것 같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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