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어둠을 불평하기보다는 차라리 한 자루의 촛불을 켜라
-펄 벅(Pearl S. Buck, 1892∼ 1973)-
지금은 자신의 조국이 사라지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지만, 언젠가 민족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은 비록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게 될 한국인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PASSING OF KOREA(대한제국멸망사)》-
포식자의 느닷없는 기습공격을 찌르레기떼가 현란하고 아름다운 군무(群舞)로 물리치는 모습은 경이롭다. 우리는 그 숨 막히는 광경을 하늘이 아닌 지상에서 보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대한민국의 거리와 광장에서 펼쳐지는 빛의 무혈 혁명이다. 73살을 넘긴 나도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광장에 나가곤 한다.

이 순간도 포식자들은 발톱을 숨긴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조류학자들은 찌르레기떼가 포식자의 공격을 받으면 절묘한 공중 곡예(aerial acrobatics)를 연출함으로써 적을 혼란에 빠뜨려 안전을 도모한다고 한다. 흉맹한 포식자가 쪼그마한 찌르레기를 표적 삼아 거듭 기습공격을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찌르레기 무리는 순식간에 흩어지고 다시 합치는가 하면 파도처럼 격렬한 파동을 일으키고 소용돌이치듯 치솟다가 갑자기 선회하는 등 순간순간 변화무쌍의 조화를 일으켜 적의 정신을 빼놓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는 종합 계획도 사전 훈련도 없으며 지휘자도 없다. 숨 막힐 듯 경이롭고 아름다운 이 집단행동은 순전히 즉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한국인이 내란을 물리치는 것이 꼭 그러하지 않은가?
수천수만 마리의 조그만 찌르레기들이 공시적으로 소통하면서 마치 한 몸처럼 기민하게 움직이는 극적인 빛의 군무(群舞)를 우리는 지금 감동과 긴장이 어린 눈으로 이 땅의 거리에서, 광장에서 보고 있다.
지난해 12월 3일 오밤중, 포식자들이 어떤 우두머리의 지령에 따라 기습공격을 가해 왔을 때 한국인들은 계획도 훈련도 지휘자도 없이 맨몸, 맨손의 즉발적인 집단행동으로 민주주의와 평화를 용케도 지켜냈다. 한순간이라도 삐끗했더라면, 한 오라기라도 어긋났더라면 필시 유혈참극, 아비규환이 빚어졌을 것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어찌 조상님네의 음조가 없었다고 할 것이며 어찌 하느님의 보우하심이 없었다고 할 것인가. 어찌 천지신명의 가호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얼마나 눈물겨운 축복이며 천행(天幸)이란 말인가. 세계사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이 특별한 사건을 우리는 결코 한때의 뒷이야기로 흘려보내서는 안 될 일이다. 만일 그런다면 우리 후손들은 어떤 지옥을 맛보게 될지 모른다.
포식자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물리치는 숨 막히는 과정을 통해 이 땅 위에 새로운 민주공동체가 탄생했다. 종전의 한민족이 다분히 혈통 개념이었다면 새로 탄생한 공동체는 민주주의라는 값어치를 공유하는, '한국 민주족'으로서의 한민족이라 할 만하다. 새로운 개념의 한민족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국에서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양자 도약, 'K-민주주의(K-Democracy)'는 한 국가에 그치지 않고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수도 있다. 문명사적 개벽이라 할 수 있는 K-민주주의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하여 평범한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실행할 수 있는 작은 날갯짓 하나를 제시해 보고 싶다.
2025년을 K-민주주의의 원년(1년)으로 하는 새로운 연기(年紀)로서 '민기(民紀)'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영어로는 'KD'(K-Democracy)가 되겠다. 그러니까 AD 2025년은 '민기 1년' 혹은 'KD 1년'이 된다. 민기 사용자는 이런 식으로 말할 것이다. "민기 2년 4월 4일 전국의 광장에서 윤석열 파면 1돌 기림잔치를 연다." 한편 그 깜깜했던 한 해 전 2024년은 '민전 1년', 영어로는 'BD 1년'이 되겠다(BD=Before Democracy). 이 얼마나 단순명료한 연도 계산법인가. 오늘은 민기 1년 5월 22일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BD 73년 생이다. 서기와 병용해도 좋겠다. 민기 1년(서기 2025년), 서기 2025년(민기 1년) 하는 식으로.
민기'를 사용하자는 주장은 한낱 허튼소리, 우스운 잠꼬대로 끝나고 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구촌으로 확산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우리는 왜 서양인의 서기를 써야 하고 서양인은 우리의 ‘민기’를 써서는 안 되는가? 이제 그들도 우리 것을 써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민기’가 드높이는 민주주의는 어느 한 국가 한 민족의 역사나 값어치가 아니고 인류 보편의 값어치가 아닌가?
그들에게 ‘단기’를 쓰자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민기’를 쓰자고 할 수는 있을 게 아닌가. 언젠가 많은 세계인들이 한글을 사용할 날이 올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언젠가 세계인들이 서기나 이슬람력과 함께 ‘민기’를 병용할 날이 올 것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민기'는 능히 문명사적 전환을 알리는 깃발이 될 수 있다. 강호제현과 영향력자(인풀루언서)들의 공감과 지지를 기대해 본다.
정부나 국회에 ‘민기’를 제도화해 달라고 매달릴 필요는 없다. 서기, 단기, 불기만을 고수하는 이들에게 이제 민기를 쓰자고 주장할 필요도 없겠다. 남에게 권면하기 전에 우선 나부터 쓰면 좋지 않겠는가. 작은 날개짓이 지구 저 너머에 파동을 일으킬 것이다. 여기에 장애물은 없고 방해꾼도 없다.
'민기'를 놀이, 문화 예술, 한류, 비즈니스와 능히 접목시킬 수 있겠다.
애국가보다 더욱 감동적이고 희망찬 민기가(民紀歌, Minki Song) 를 만들어 부를 수도 있다. 포식자를 물리치고 탄생한 K-민주주의의 역사를 인류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할 수도 있겠다. 그 극적인 역사를 동기로 앞으로 다양한 축제, 여러 장르의 음악, 만화, 문학 작품, 다큐나 드라마, 영화가 많이 나올 것은 분명하다.
서양인들은 4월에 부활절 휴가를 즐긴다. 그렇다면 우리는 4월 4일을 전후로 '민주 부활절'을 즐기면 어떨까? 서양의 부활절은 되고 우리의 민주 부활절은 안 된다는 법은 없을 게 아닌가.
민기 시대의 새로운 달력 곧 민기력(종이 또는 디지털 달력)을 만들어 사용하는 건 어떨까? 잘 만들면 많이 팔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광장에서 빛의 군무를 연출했던 그 수많은 민주족이 잠재적인 고객일 것이다. 영어본 민기 달력을 별도로 만들어 나라 밖에 수출할 수도 있겠다. 민기 2년(서기 2026년)의 첫 달력이 선보일지도 모른다.
K-민주주의 여행 상품을 만들어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면 성공을 기약할 수 있겠다. ‘민기 관광 상품’에 필히 들어가야 할 게 있다. 민전(BD) 1년 12월 3일 밤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아선 사람의 동상관람. 이 동상은 벨기에의 오줌싸게동상이나 덴마크의 인어공주상보다 앞으로 훨씬 많은 외국 관광객을 끌어들일 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 동상을 언제 세울 것인가?
<민기기념관>을 만든다면 홀 한 가운데는 아무래도 윤석열의 동상이 차지해야 할 것 같다. 이 찬란한 민기 시대가 누구 덕분에 열렸는지를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그가 눈물겹도록 고맙고 기특하지 않은가?
그러나 아직 축포를 터뜨릴 때가 아니다. 내란 우두머리와 그 부역자들이 지금 우리를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찌르레기는 언제든지 포식자들로부터 기습공격을 당할 수 있다.
조선의 개화기 때 새로운 나라로 탈바꿈할 기회가 있었지만, 결과는 통한의 망국이었다. 그 위기와 기회가 민기 1년(2025년) 우리 눈앞에 다시 와 있다. 이 밀도 높은 시간에 민기 깃발을 높이 들자. 악귀를 내쫓는 영험한 부적, 포식자를 물리치는 아름다운 군무(群舞)로서.
민기 1년(서기 2025년) 5월 22일 새벽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