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뢰우(風雲雷雨 : 바람ㆍ구름ㆍ우레ㆍ비)

  • 등록 2025.11.13 12: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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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46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왕조실록>에 풍운뢰우(風雲雷雨)는 87번이나 등장한다. 이후 문장은 기우제나 산천제와 연결되는 문장이다.

 

* (풍운뢰우제에 쓸 향과 축문을 전하다) 임금이 풍운뢰우제(風雲雷雨祭)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세종실록⟫6/2/3)

 

‘기우제(祈雨祭)’란 낱말은 모두 822건 등장하는데 세종 때 92건, 숙종ㆍ영조 때도 90여 건이 된다. 세종 때 가뭄이 심한 탓도 있었겠지만 단지 비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에 대비한 간척, 저수지, 수로 문제 등 여러 일과 연결되어 있으며, 세종 때 농사에 관해 관심이 컸다는 방증도 되겠다.

 

세종 때를 중심으로 비에 관한 기사들을 보자.

 

* (풍우 재앙이 심한 영춘ㆍ단양에 조세를 면제하다) 충청도 도관찰사 이종선(李種善)이 계하기를, "영춘(永春)ㆍ단양(丹陽)에 풍우(風雨)의 재앙이 다른 고을보다 배나 되어, 손실(損失)이 8, 9분에 이르렀으니, 원하옵건대, 금년 조세(租稅)는 한 섬[石] 이하의 것은 면제하여 주기를 비옵나이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4/10/5)

 

* (장마가 계속될 것 같아 밀·보리가 성숙하는 대로 재촉하여 베게 하다) 경기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이제 흙비[霾雨]가 내릴 듯하니, 밀ㆍ보리가 성숙하는 즉시 재촉하여 베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7/5/29)

 

* (산릉에 돌을 운반할 때 손상된 곡식의 싹을 배상하도록 하다) 의정부에서 호조에서 올리는 문서에 따라 아뢰기를, "산과 언덕에 돌을 운반할 때 백성의 밭을 짓밟아 곡식의 싹을 많이 훼손했으니, 그 훼손된 것을 계산하여 종자를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30/3/5)

 

*(교제 외의 다른 기우제를 행하라고 전지하다) 명 내리기를, "교제(郊祭, 나라 제사) 외에 다른 비오기를 빌기 위하여 행할 만한 일들이 있으면 때를 맞추어 시행하라." 하였다. (⟪세종실록⟫7/7/22)

 

*(햇무리 지고 우박이 오다) 햇무리 지었는데, 귀고리가 달리었다. 우박이 왔는데, 둘레의 직경이 어떤 것은 한 치가 넘었다. (⟪세종실록⟫10/윤4/21)

 

*(수해의 가능성에 있는 곳에 대한 방비를 충실히 하라 하다) 서울과 지방의 무지한 백성들이 낮은 곳에 살아, 큰비로 인하여 떠내려가거나 익사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으로, 영락(永樂,중국 명나라 성조(成祖)의 연호(1403~1424) 15년 8월 26일의 임금의 명에, ‘무릇 낮은 지대나 물가에 사는 사람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 두게 하라.’라고 하였다. (⟪세종실록⟫11/4/25)

 

* (조치에게 강원도의 올 농사의 작황에 관해 물어 보다) 총제(摠制, 정2품 무관직) 조치(曹致)가 대답하기를, "올해는 흙비가 너무 심하여 밭곡식은 거의 결실이 잘되지 않았사오나, 논곡식만은 풍년이 더할 수 없게 들었습니다." (⟪세종실록⟫12/7/27)

 

* 진해현(鎭海縣)에 우박雨雹이 왔다. (⟪세종실록⟫14/5/6)

 

*(평안도 성천에 폭우가 내려 산이 무너지매 남녀 4명이 압사하다) 평안도 성천(成川)에 큰비가 와서 산이 무너지매, 남녀 합계 4명이 깔려 죽었다. (⟪세종실록⟫18/6/15)

 

*(평안도 감사에게 도절제사의 행락을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다) 평안도 감사에게 임금의 명을 전하기를, "이미 도절제사가 장맛비가 내리기 전에 강계에 부방(赴防, 다른 도-道의 군대가 서북 변경에 파견하는 일)할 법을 세웠다. (⟪세종실록⟫19/5/13)

 

*(큰비와 우박이 내리다) 큰비가 내리며 우레와 번개가 치고, 저녁때에 이르러서는 큰 밤[大栗]만한 우박(雨雹)이 내렸다. (⟪세종실록⟫280/5/26)

 

이러다가 세종 후기에 마침내 측우기가 나타나게 된다.

 

 

*(호조에서 서운관(천문, 날씨 등을 맡아보던 기관)에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도 감사(監司)가 비가 내린 양을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하는 법이 이미 있사오니, 흙이 바싹 마름과 축축이 젖지 아니하고, 흙 속으로 스며든 얕음과 깊음도 역시 알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짓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이 되게 하고 지름은 8촌이 되게 하여, 대(臺)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아, 관원에게 얕음과 깊음을 척량(尺量)하여 보고하게 하소서.

 

또 마전교(馬前橋, 종로 5가와 중구 방산동을 잇는 위치에 놓인 다리) 서쪽 물속에다 박석(薄石, 넓적하고 얇은 돌)을 놓고, 돌 위를 파고서 받침돌 둘을 세워 가운데에 방목주(方木柱, 단면이 네모반듯한 기둥)를 세우고, 쇠갈구리로 부석을 고정시켜 척(尺)ㆍ촌(寸)ㆍ분수(分數)를 기둥 위에 새기고, 본 조정의 낭청(郞廳, 중앙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 관원)이 빗물의 매우 높거나 깊음을 살펴서 보고하게 하고, 또 한강변(漢江邊)의 암석(巖石) 위에 푯말[標]을 세우고 척ㆍ촌ㆍ분수를 새겨, 도승(渡丞, 조선시대 한강 변의 관리책임자)이 이것으로 물의 깊고 얕음을 측량하여 본 조정에 보고하여 아뢰게 하라.

 

또 지방 각 고을에도 서울 안의 주기례(鑄器例)에 의하여, 혹은 자기(磁器)를 사용하던가, 혹은 와기(瓦器, 진흙으로 만들어 잿물을 올리지 않고 구운 그릇)를 사용하여 관청 뜰 가운데에 놓고, 수령이 역시 물의 깊고 얕음을 재어서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가 아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23/8/18)

 

이어 우량 측정에 나선다.

 

*(호조에서 우량을 측정하는 일에 관해 아뢰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우량(雨量)을 측정(測定)하는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벌써 명령을 받았사오나,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으므로 다시 갖추어 조목별로 열기(列記)합니다.

 

1.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器具)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測雨器)’라 하니, 길이가 1척(尺) 5촌(寸)이고 지름이 7촌입니다. 자를 사용하여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고 언제든지 비가 온 뒤에는 본관(本觀, 서운관)의 관원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 오고 갠 일시(日時)와 물 깊이의 척ㆍ촌ㆍ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아뢰고 기록해 둘 것이며,

 

1. 외방(外方)에서는 쇠로써 주조(鑄造)한 측우기(測雨器)와 주척(周尺) 하나씩을 각 도에 보내어, 각 고을이 한결같이 위 측우기의 체제(體制)에 따라 혹은 사기그릇이든지 혹은 토기든지 적당한 데에 따라 구워 만들고, 객사(客舍)의 뜰 가운데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도록 하며, 주척(周尺)도 또한 상항(上項)의 체제(體制)에 따라 혹은 대나무로 하든지 혹은 나무로 하든지 미리 먼저 만들어 두었다가, 매양 비가 온 후에는 수령(守令)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살펴보고는 자로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測量)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 오고 갠 일시(日時)와 물 깊이의 척ㆍ촌ㆍ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아뢰게 하고 기록해 두어서, 후일의 참고에 출처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24/5/8)

 

이후 보다 더 긍정적으로 농민을 보호하는 정책도 나온다. 이전에도 행렬들이 지나며, 해친 곡식들을 보상한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공사에서도 민간 일들을 보살피고 있다.

 

*(산릉에 돌을 운반할 때 손상된 곡식의 싹을 배상하도록 하다) 정부에서 호조의 정문(呈文)에 따라 아뢰기를, "산릉(山陵)에 돌을 운반할 때 백성의 밭을 짓밟아 곡식의 싹을 많이 손상시켰으니, 그 손해된 것을 계산하여 씨앗을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30/3/5)

 

세종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측우기를 만든 일이라 할 수 있다.

 

농업이 산업 곧 당시 먹고 사는 일의 근본인 때 농업은 산업의 기반이고 중심이었다. 그리고 나라 행정의 기반도 자연히 농업의 흉작에 따라 국가가 거두어들이는 세금과도 직결될 일이었다. 곧 이렇듯 비란 간접적으로 국가 재정과 직결되어 있었고 측우기가 나타남으로 토지의 비옥도와 지역의 흉년, 풍년 여부 그리고 그에 따른 과세도 함께 더욱 합리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kokim9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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