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300여 년 전 속종 왕비는 '한글'을 사랑했건만 아직도 한반도의 관리와 학자들은 '명나라' 눈치보느라 '한글' 쓰기를 두려워한다.
그때 명나라 시절엔 문서하나 작성하는데도 눈치코치를 봐야 했다지만 지금은 <한글>쓰기가 수월해졌다. 일제 순사가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과감히 문자혁명을 "우리말 우리글'로 해보자.
저렇게 써두면 누가 과연 이 비문을 읽을 것인가! 돌값과 이름값이 같지 않다면 후세에 이름 남기는 방법도 연구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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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빗으로 빗는 하루,1827회:www.solsol21.org>에 보면 다음의 글이 나옵니다.
한국 문학사 속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있어 한글로 된 작품을 보기가 매우 드뭅니다. 이런 가운데 몇 년 전 발견된 숙종 계비 인원왕후가 쓴 ≪션군유사≫, ≪션비유사≫와 제목이 없는 “뉵아육장” 등 세 작품은 그래서 더욱 귀중합니다.
먼저 ≪션군유사≫는 인원왕후가 돌아가신 아버지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일화를 적은 것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김주신은 딸이 왕비임에도 겸손하기가 그지없어 궁중을 드나들 때 궁인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임금의 장인으로 특별한 대우를 뽐낼 수 있으련만 몸가짐을 늘 조심히 하고 법도를 지켰으며 딸을 매우 아끼고 사랑했지만 왕후가 된 뒤에는 스스로 신하의 예를 지키며 딸을 깍듯이 모셨다고 아버지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션비유사≫는 인원왕후의 어머니 곧 김주신의 아내인 가림부부인 조씨의 일화를 쓴 작품입니다. 가림부부인 조씨 역시 딸이 왕후가 된 뒤 근신하고 궁중 드나듦을 삼갔습니다. 또 집안사람들에게 궁중으로부터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단속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왕후인 딸에게도 법도를 지키고 선물을 받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밖에 한 자료는 제목이 없는데 ‘시경’에 나오는 “부모가 키워준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뉵아육장>, 중국 고대 모범적인 여성의 이야기인 <노 모 사>,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는 <노용자탄직금도>가 들어 있습니다. 인원왕후는 숙종 사후 33년을 더 살면서 자식을 낳지 못하고 80살에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장희빈의 아들 경종 즉위, 영조 즉위를 보고 왕대비, 대왕대비가 되도록 구중궁궐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친정부모의 사무친 마음을 한글로 써내려간 맘씨 고운 조선의 왕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