휼민비 당시 고마움 증언…소작인에 소 나눠줘 '爲民' 정신 실천
광주학생사건 주도자들 모두 남파고택 사람들로 항일정신 투철
후손들 교육운동 매진 청운야간중학교 세워 20년간 2천명배출
한가위 제문‧결혼식 축문등 한글로 지어 뜨거운 한글사랑 실천
▲ 현 남파고택 종손 박경중 선생
[그린경제=김영조 문화전문기자] 나주로 취재를 가기 이틀 전 남파고택 종손 박경중 선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눔의 철학을 취재하신다고 하셨지요? 저희 집안에선 그리 대단한 나눔을 실천한 것도 아닌데 멀리서 오셔서 실망하시면 어쩌죠?”
열 번의 취재에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러나 기자는 ‘남파고택에 뭔가 분명히 있다. 다른 종가와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란 이상한 확신이 생겼다. 더구나 이곳은 강릉 선교장 이강백 관장(한국고택협회 회장)의 추천이 있었지 않은가?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 종손의 이름을 따 박경중가옥이라 했지만, 최근 이 집을 지은 이의 호를 따서 ‘남파고택’으로 이름을 바꿨다.
“저희 집안이 그래도 넉넉했을 때는 고조인 박(朴) 자, 재(在) 자, 규(珪) 자 할아버지 시절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내셨는데 1860년 무렵 300~400석 규모로 1000석 정도는 되어야 큰부자로 쳐줬을 당시로서는 그리 큰 부자는 아니었지요.”
▲ 고택과 뜰
▲ 남파고택 전경
그렇게 큰부자가 아니었음에도 박재규 선생은 1903년 심한 가뭄이 들어 굶는 사람이 급증하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벼 200석을 내놓고, 씨앗용으로 50석을 내놓았으며, 100석을 시가보다 싸게 시장에 풀어 곡물유통에 도움을 주었다. 이는 나주군수 서리이자 담양군수 조한용이 그의 행적을 관찰사에게 보낸 보고서와 금마면 사람들이 이듬해 세운 휼민비에 기록이 되어 있다.
물론 중간에 시기질투 하는 사람이 있어 사실과 다르다고 올리는 바람에 관찰사가 다시 면밀히 조사한 뒤 사실과 맞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는데 어느 시대건 좋은 일 하는 데 시비 거는 사람이 반드시 등장했던 모양으로 박재규 선생의 구휼은 그래서 더욱 곤고하게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박재규 선생은 소작인들에게 소를 나눠주고 기르게 했다고 한다. 어려운 농민들에게 그냥 베푸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소를 먹이고 송아지를 낳게 해서 자립심을 기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한때 많을 때는 180여 마리의 소를 이렇게 어려운 집안에 나눠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주 박헌경 선생이 용호정과 연못을 만들면서 일을 하게하고 품삯을 준 것과 같은 맥락이다.
▲ 1908년 무렵에 그려진 태극기로 나주학생시위 때도 등장했다.
박재규 선생의 손자이며, 현 종손의 할아버지 박준삼 선생은 해방 직전 1945년 나주에서 소주공장을 하던 부자 이창수 씨와 함께 중학교 과정의 민립(民立) 중학교를 세웠는데 현재의 나주중학교 전신이다. 그뿐만 아니라 1960년에 청운야간중학교도 설립했다. 가난해서 공부를 할 수 없는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처음엔 나주초등학교 교실을 한 칸 빌어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1963년 나주한별고등공민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교훈은 ‘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을 돕자’였다. 이후 1980년까지 20년 동안 2000여 명의 졸업생을 냈다고 한다. 또 선생은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돈을 대주면서 학문의 꿈을 이루게 했다.
박준삼 선생은 더 큰 야망을 품고 제대로 된 학교를 지으려고 3000평의 땅을 사들였다. 하지만, 선생이 1976년 세상을 뜨는 바람에 교육운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선생의 사후 오래 가지 못하고 문을 닫았으니 아쉬운 대목이다. 박경중 종손은 말한다. “할아버지께서는 학교를 세우는 것이 평생 소원이셨습니다. 우리 겨레가 공부를 해야 만이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지요. 하지만, 증조할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선 탓과 항일의식을 지닌 까닭으로 재산이 줄어들었고, 이에 학교를 세울 수가 없어 내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 가난한 사람이 밥짓는 연기를 보면 마음이 상할까봐 남파고택은 굴뚝높이를 낮췄다.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은 나주역에서 일본 남학생들이 조선여학생의 머리를 잡고 희롱한 사건이다. 그런데 사건 당시 일본학생에게 머리를 잡혔던 여학생과 일본학생들과 충돌을 일으킨 남학생들이 모두 남파고택 집안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퇴학은 물론 8개월에서 1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 시위와 관련해서 박준채와 박공근은 건국훈장 애족장, 박동희는 건국포장을 받았다.
물론 이전 남파고택 사람들은 의병 투쟁은 물론 항일투쟁에도 앞장섰다. 구한말 항일투쟁을 한 남파고택 집안의 박인수 의병대장은 건국훈장 애족장, 박사화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것만 봐도 이 집안사람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읽을 수 있다.
▲ 박재규 선생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한 것을 기려 1904년 세운 휼민비
박경중 종손은 박재규 고조할아버지가 장흥군수를 할 당시 의병이 크게 일어났는데 의병을 잡아들이자 박재규 군수가 놓아주었다고 증언한다. 또 박준삼 선생은 일제강점기 동안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재판사건이 있어도 일본 판사에게 재판받지 않겠다면서 포기했을 정도다. 이와 같이 나주지방의 항일독립운동 뒤에는 언제나 박 선생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단국 기원 4306년 세차 계축 8월 병신삭 10표일 경술 후손 준삼은 선조 여러 어른 신위 전에 삼가 고하나이다. 오곡이 무르익은 중추절을 맞이하여 여러 선조님의 높은 은덕이 새삼 느껴지며, 추로의 정이 간절합니다. 이에 간소한 제수를 드리오니 강림하시와 흠향 하시옵소서.” 이는 당시로는 매우 드물게 한가위 차례 때 박준삼 선생이 올린 한글 제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 길한 날을 가려 6대 이래 종손인 경중이가 진주 후인 강대흥 씨의 장녀 정숙이와 혼례를 거행하였음을 삼가 신령님 전에 감히 고하나이다. 여러 가지로 살펴보아 우리 가정 종부로서 적합하게 생각하였음으로 양가의 충분한 양해 아래 이 의식이 이루어졌아오니 항시 보살펴 주시사 험난한 세파를 헤엄쳐 가는데 큰 지장이 없이 영원무궁토록 앞길을 열어 주시기를 우러러 빌고 바라옵니다. 갑인 四월 一八일 불효손 준삼 아룀.”
▲ 부엌의 구조는 남파고택이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이고, 부뚜막에 올려놓는 정화수도 언제나 변함이 없다.
이처럼 손자 박경중의 혼례 때 고축과 훈계는 물론 이력서도 한글로 쓰고, 나주초등학교 교가 노랫말도 한글로 지었으며 한글학회 회원이면서 최현배 선생, 정인승 선생 등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한문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 만큼 한문에도 해박했고, 일본 릿교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여 영어에 능통했지만 한글 사랑은 철저했다. 박경중 종손은 할아버지께서 축문을 모두 한글로 써주셔서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때 참 편하다고 고백했다.
각종 민속자료 호남 생활문화 연구의 산실
1908년 만들어 나주학생만세 때 쓴 태극기
'마음을 다스리는’ 초가서 고택체험
▲ 하룻밤 자면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초가
남파고택(南坡古宅)은 조선시대 후기인 1884년 남파 박재규 선생이 지었는데 49.5평의 크기로 당시 전남지방의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집이다. 이 집은 관아건물을 본으로 하여 지은 집으로 남도지방 상류주택의 구조가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집안에 보존하고 있는 각종 조선시대 살림살이, 공예품 등이 시대별로 잘 갖추어져 있어 호남지방의 생활문화 연구에 큰 자료가 된다는 평가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민속자료들을 둘러보면서 나의 눈은 호강에 겨웠다. 우선 얼마 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보았던 나주반 십여 점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처마 아래에는 비가 50㎜ 정도 왔을 때에야 가득 차는 큰 학독이 하나 놓여있다. 이는 집안에 20대 과부가 연이어 둘이나 생기자 센 기운을 눌러야 한다 해서 2㎞ 떨어진 금성산에서 가져 와 비보(裨補)를 한 것이다. 이후 비보의 덕(?)인지 증조는 9남매를 나았다고 종손은 말한다.
그런데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태극기였다. “제가 생각하기로 이 태극기는 1908~1909년의 항일의병 때 만들어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는 광주학생시위 직후인 1929년 11월 27일 나주학생만세시위 때 쓰인 것입니다. 이후 해방 때까지는 꽁꽁 숨겨놓았다가 해방과 함께 다시 빛을 보았지요.”라고 종손은 증언한다.
이집 역시 굴뚝은 가난한 이들이 밥 짓는 연기를 볼 수 없게 낮게 설치되어 있다. 나눔을 실천했던 종가들의 한결같은 구조다. 특이하게도 남파고택에는 ‘편안한 방’이라 부르는 초가가 한 채 있다. 박준삼 선생은 마음이 우울한 때면 이곳에서 주무시면서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종손의 증조할아버지 박정업 선생은 아버지가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 할 정도로 효자였다고 한다. 효도는 나눔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 한글 고촉과 훈계문
남파고택은 고택체험을 한다. “홍보는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입소문에 의해 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한옥 체험을 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숙박비는 없습니다. 그저 본인이 원하는 대로 내고 가면 됩니다. 그리고 아침은 저희 식구들이 먹는 밥 그대로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다만, 옛날식대로 체험하고 싶은 사람만 받습니다. 초가에는 전깃불도 없는데 그것이 좋다는 사람만 가능합니다.”라고 소개한다. 박준삼 선생이 마음을 다스리려 머물렀다는 초가에서 하룻밤을 잘 수 있다면 선생의 심오한 철학을 깨달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종손은 지난 가을에 딴 얼린 홍시를 흔쾌히 내놓으면서 먹어보라고 권한다. 대담을 나누던 대청마루 한켠에는 박물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낡은 선풍기 한 대가 놓여있었다. 남파고택 종손을 만나면서 선생의 소박하고 겸손함이 윗대부터 자연스럽게 내림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상한 인품이 홍시의 붉은 색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