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언제부터 훈민정음 창제를 고민했을까?

2014.09.11 07:02:23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진실 퍼즐 맞추기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흔히 세종은 10여년의 비밀 연구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말한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홍사내 연구원이 지적(홍사내, 2013.11.9., 세종은 언문 창제 작업을 언제부터 했을까? 얼레빗 )했듯이 그런 추정은 대체로 옳다고 본다. 본격적인 연구 기간을 말한다면 그런 추정이 맞지만 실제 새 문자에 대한 고민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감을 글쓴이는 “김슬옹(2011).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개정판)》. 지식산업사, 1장, 2장”에서 밝힌 바 있다.

 

   
▲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 김슬옹, 지식산업사

훈민정음 창제 17년 전인 1426년 10월 27일(세종 8년) 세종이 “법은 함께 하는 것(人法竝用)”임을 강조하며, 법률문이 복잡한 한문과 이두(한문을 우리식으로 일부 고친 표기체)로 되어 있어 문신조차 알기 어렵고 더욱이 배우는 학생들은 더욱 어려움을 지적했다. 법률문과 같은 꼭 필요한 정보의 소통 문제를 고민한 것이다.  

이런 고민은 훈민정음 창제 11년 전인 1432년 11월 7일(세종 14년)에도 보인다. 세종이 신하들에게 주요 법조문을 우리식 한문체인 이두문으로 번역 반포하여 무지한 백성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문제를 의논한 것이다. 허조가 백성들이 문자(이두문)를 알면 부작용이 커진다며 반대하였으나 임금은 법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옛기록에서 백성들에게 가르친 사례를 조사하도록 했다.  

두 사건에서는 읽기 문제만 언급했지만 세종은 더 나아가 한자 모르는 백성들의 표현 문제로까지 발전시켰음을 1444년의 최만리 외 6인의 언문 상소에서 드러난다. 이 상소에서 이 기록과 직접 관련된 세종 임금의 말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  

사형 집행에 대한 법 판결문을 이두문자로 쓴다면, 글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이제 그 말을 언문으로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若曰如刑殺獄辭, 以吏讀文字書之, 則不知文理之愚民, 一字之差, 容或致冤。 今以諺文直書其言, 讀使聽之, 則雖至愚之人, 悉皆易曉而無抱屈者.)《세종실록》1444년 2월 20일,  

이러한 글자에 대한 고민과 새 글자 창제 동기와 목표는 1446년 9월 상한에 출판된 《훈민정음》해례본 어제(세종) 서문에 그대로 드러난다.

 

   
▲ 《훈민정음》해례본 어제(세종) 서문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은다.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훈민정음 창제 15년 전인 1428년 10월 3일(세종 10년)에는 진주에 사는 김화가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자 세종은 집현전에 교화를 위해 ≪효행록≫이란 책(한문)을 펴내라고 하였다. 도덕 윤리는 일벌백계로 안 되므로 책을 통해 근본적인 교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9년 전인 1434년(세종 16년) 4월 27일에 1432년에 그림풀이를 덧붙여 편찬을 끝낸 ≪삼강행실≫을 인쇄하여 널리 펴서 한문을 모르는 어린아이와 민가의 여성들까지도 책 내용을 알게 세종이 지시하였고 이 해 11월 24일에는 이 책을 종친과 신하들 및 여러 도에 내려 주었다.  
 

   
▲ 세종이 그림 풀이를 덧붙여 펴낸 ≪삼강행실≫ 한문본

이러한 고민 역시 창제 후 최만리 외 언문 상소로 인한 논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사관은 세종이 언문 상소의 핵심 인물인 정창손에게 직접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予若以諺文譯 『三綱行實』 , 頒諸民間, 則愚夫愚婦, 皆得易曉, 忠臣孝子烈女, 必輩出矣) 《세종실록》1444년 2월 20일  

이에 대해 정창손은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라고 반박하여 책과 문자의 효용성을 아주 낮게 평가하였다. 한문책으로 성인의 도를 깨우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사대부 학자로서는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이 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용렬한 선비이다.”라고 조금 과격해 보이는 말로 꾸짖었다. 웬만하면 벌을 잘 안 주는 세종의 정치 스타일로 볼 때 크게 화를 냈음이 분명하다.  

결국 쉬운 책을 통한 세종의 교화 의지와 정책 의도는 세종이 죽은 뒤에 펴낸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까지 다음과 같이 수록된다. 세종의 유지를 받든 세조와 성종, 최항 등이 《경국대전》 편찬에 직접 매달렸기 때문이다.

 

   
▲ 조선시대의 기본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의 사족(士族))의 가장(家長)․부로(父老) 혹은 교수(敎授)․훈도(訓導) 등으로 하여금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가르쳐 이해하게 하고, 만약 대의(大義)에 능통하고 몸가짐과 행실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서울은 한성부(漢城府)가, 지방은 관찰사(觀察使)가 왕에게 보고하여 상(賞)을 준다.”(三綱行實飜以諺文令京外士族家長父老或其敎授訓導等敎誨婦女小子使之曉解若能通大義有操行卓異者京漢城府外觀察使啓聞行實)경국대전 권 3 

훈민정음 창제 1년 전인 1442년 3일 1일(세종 24년)에 용비어천가를 짓고자 경상도 전라도 관찰사에게 자료 수집을 세종이 명하였지만 이 또한 결국 노래를 문자로 적어 홍보하는 의도에 맞닿아 있으므로 책을 통한 교화 문제와 이어진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표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세종의 가상 독백체로 풀어보면 이렇다. 

“입으로 하는 말과 쓰는 글말(한문)이 달라도 아주 다르다. 한문과 이두문은 똑똑한 양반(문신)들조차 어렵다. 더욱이 양반들만이 조선의 백성은 아니다. 백성은 하늘이다. 백성이 중심이 되는 민본의 나라를 만들자. 그런 나라를 해서는 중요한 정보와 지식을 가르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책이 중요하다.  

그런데 양반 아닌 백성들은 한문책을 모른다. 그 한자 모르는 백성들이 책을 보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한문과 이두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쉬운 글자를 만들자. 서당에 다닐 수 없는 백성조차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자. 그런 글자는 말소리의 이치를 반영한 소리글자밖에 없다. 소리글자로는 인도의 산스크리트글자와 몽골의 파스파 글자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글자들은 반쪽 소리글자다. 이미 일상생활에서는 죽은 글자가 되지 않았는가.  

섬세하게 발달되어 있는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가 없다. 이왕 만드는 소리글자, 자연의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는 바른 소리글자를 만들자. 바로 ‘정음’이다. 정음의 이치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말소리가 나오는 실체를 관찰해서 그 원리를 반영하면 최고의 글자가 될 것이다.  

집현전 학사들한테 연구해서 만들게 하면 어떨까. 그건 불가능하다. 나의 이런 의도를 이해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이해했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한문 기득권 때문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완벽하게 글자를 만들고 나서 나의 뜻에 동의하는 학사들과 조용히 후속 연구를 진행하자. 실제 새 글자를 보면 반대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한자 배우는데 매우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렇게 하여 세종은 비밀 연구 끝에 28자를 창제한 뒤 1443년 12월 어느 날 조용히 창제 사실을 알렸다. 그 당시 상황으로는 엄청난 창제 사실을 거창하게 알릴 수 없었을 것이고 집현전 일부 학사들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알렸을 것이고 그래서 창제한 특정 날짜를 알 수 없었던 사관들은 훗날 12월 마지막 날짜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다. 이 글자는 고전을 모방한 것이로되, 쪼개면 초성ㆍ중성ㆍ종성이 되지만, 이 셋을 합쳐야 글자(음절)가 이루어진다. 무릇 중국 한자나 우리나라 말이나 모두 능히 쓸 수 있으니, 글자가 비록 간결하지만 요리조리 끝없이 바꾸어 쓸 수 있고,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컫는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인 사관들은 훈민정음의 실체와 가치를 가장 간결한 기록으로 차분하게 역사에 남겼다. 

 

훈민정음 창제 전 문자 관련 주요 사건 흐름 

◆ 17년 전→ 1426년 10월 27일(세종 8년) 세종이 법은 함께 하는 것(人法竝用)임을 강조하며, 법률문이 복잡한 한문과 이두(한문을 우리식으로 일부 고친 표기체)로 되어 있어 문신조차 알기 어렵고 더욱이 배우는 학생들은 더욱 큰 어려움이 있음을 지적하다.

◆ 15년 전→ 1428년 10월 3일(세종 10년) 진주에 사는 김화가 아버지를 죽인 사건을 보고 세종이 집현전에 교화를 위해 ≪효행록≫이란 책(한문)을 펴내도록 하다.

◆ 11년 전→ 1432년 11월 7일(세종 14년) 세종이 신하들에게 주요 법조문을 우리식 한문체인 이두문으로 번역 반포하여 무지한 백성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문제를 의논하였다. 허조가 백성들이 문자(이두문)를 알면 부작용이 커 반대하였으나 임금은 법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옛기록에서 백성들에게 가르친 사례를 조사하도록 지시하다.

◆ 9년 전→ 1434년(세종 16년) 4월 27일 1432년에 그림풀이를 덧붙여 편찬을 끝낸 ≪삼강행실≫을 인쇄하여 널리 펴서 한문을 모르는 어린아이와 민가의 여성들까지도 책 내용을 알게 세종이 지시하다. * 11월 24일에 ≪삼강행실≫을 종친과 신하들 및 여러 도에 내려 주다.

◆ 1년 전→ 1442년 3일 1일(세종 24년) 용비어천가를 짓고자 경상도 전라도 관찰사에게 자료 수집을 세종이 명하다

 

김슬옹 교수 tomul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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