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과 한솥밥 야영생활…중동에 깃발 꽂다

2014.11.14 15:05:02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1915~2001) <28>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963,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가 3000만 달러까지 내려감에 따라 정부는 파산 직전까지 가는 큰 혼란을 맞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동의 오일쇼크 탓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73년에 정부에서 지불한 원유 값은 3516만 달러였는데 1974년에는 8억 달러가 늘어난 1178만 달러를 지불해야만 했다. 경상수지 적자는 1년 사이에 3880만 달러에서 202270만 달러로 늘었고 자본 대출량도 29000만 달러에서 199840만 달러로 크게 증가했다. 정말 막다른 길목이었다. 

이때, 박정희 정부의 오원철 경제수석은 중동진출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고 박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 중동진출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게 된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듯, 오일쇼크로 인한 외환위기는 오일쇼크로 부자가 된 중동에서 처방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진행된 해결책이었다. 1974425일 장예준 건설부장관을 비롯해 부처의 각료급 인사들과 7개 민간업체로 구성된 사절단이 중동에 파견되었다. 직접 중동에 가서 현지를 보고 오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동 시찰 성과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로부터 긍정적인 경제협력을 이끌어 내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에서 소요되는 원유를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가 장기적으로 공급해 주겠다는 보장을 해 주었고 사우디 정부와는 경제와 기술협력에 관한 기본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까지 하였다. 

이때, 한국은 해외건설촉진법을 제정했고, 이로써 중동진출에 대한 국가적 뒷받침이 활발해졌음은 물론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중동건설 수주는 활발해졌다. 수주액 또한 19748900만 달러에서, 197575100만 달러로, 무려 9배나 급격히 늘어났다. 

동생 정인영의 반대, 하지만 정주영은 기필코 중동에 

정주영도 이때 큰물에 나가야 큰 고기를 잡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 엄청난 투자를 해 울산에 조선소를 지은 탓에 현대건설은 극도로 자금사정이 악화됐다. 그래서 활로를 찾기 위해서 중동 진출은 필수라고 생각한 것이다. “돌파구는 중동이다. 오일달러를 벌기 위해서는 호랑이굴 중동에 가야 한다.” 정주영은 중역회의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 현대건설 국제담당 부사장이었던 동생 정인영은 극력 반대했다. “중동은 위험합니다. 지금 중동에는 세계 선진 건설회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 우리 같은 경험 없는 회사가 가서 뭘 하겠습니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의견 다툼 속에 중역들은 전전긍긍했다. 한쪽에서는 빨리 중동으로 나가라니까 내말을 왜 안 들어?”라고 호통 쳤고, 한쪽에서는 내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 중동에 갈 수 없다.”고 윽박지르니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정주영에게서 드디어 불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정말 중동에 안 나갈 거야? 당장 나가!” 


   
 
어쩔 수 없이 권기태 상무는 정인영에게는 보고도 안한 채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날아갔다. 중동을 가기 위해서였다. 뒤늦게 권기태의 출국을 안 정인영은 급히 도쿄로 전화를 걸었다. 

절대로 성급하게 공사를 맡지 말아야 해. 잘못 하면 우리 모두 말아먹는 일이 생길 수 있어. 알았지? 그리고 중동에 나가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회장님한테 직접 보고 하지 말고 내게 하라구. 회장님께는 내가 판단해서 보고 여부를 결정할 테니까.” 

이런 우여곡절 끝에 현대건설은 중동에 첫 진출하고 이란의 반다르아바스 동원훈련 조선소를 8000만 달러에 수의계약 했다. 이 공사는 그렇게 중동진출을 반대했던 동생 정인영이 직접 가서 계약서에 서명을 했으니 두고두고 현대가의 일화로 남아 있을 법하다. 그 무렵 동생 정인영은 국제담당 사장으로 막 승진한 상태였다. 계약을 마치고 온 정인영은 그래도 선수금으로 800만 달러를 받으니 호주머니 속이 뜨끈뜨끈하군.”하고 웃음을 지었다는 뒷얘기가 있다. 

열사의 나라로만 알려진 중동 진출은 이렇게 초기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로도 현대건설의 주베일 건설공사 일화는 한국의 중동진출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이야기로 남아 있다. “걸프만에 빠져 죽을 각오로 입찰에 응한 현대 전갑원 상무 덕에 20세기 최대의 대역사로 불렸던 주베일 산업항공사를 현대는 수주할 수 있었다. 공사금액은 무려 92000만 달러(1976년 환율로 약 4600억원)였고 이것은 한국 정부 한 해 예산의 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이 공사의 낙찰은 당시 최악의 외환사정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대한민국 정부에도 낭보 중의 낭보였다. 

중동의 전진기지, 아랍 수리조선소 건설공사 

정주영은 중동 진출을 시작하면서 페르시아만 한 복판의 바레인섬에 반영구적인 접안시설을 만들어 중동 진출의 교두보로 삼을 작정이었다. 이 구상과 딱 맞아떨어진 것은 바레인의 아랍 수리조선소 건설공사였다. 197510월에 착공한 이 공사는 아랍석유수출국에서 발주한 13000만 달러의 큰 공사였다. 한 나라가 아닌 중동산유국 10개 나라 가운데 7개 나라가 공동출자한 조선소를 건설한다는 것은 한 번의 고무줄총으로 7마리의 새를 한꺼번에 잡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정주영은 19759월 하순 현대군단을 이끌고 바레인 땅에 입성했다. 그러나 첫날 현장으로 들어가는 길부터 만만치 않았다. 업자들이 바다 속의 모래를 파내 바다를 메워놓은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비까지 내려 길은 푹푹 발목이 빠질 정도였다. 그래서 인부들을 시켜 마른 흙을 실어다 깔아 진입로를 만들면서 현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끝없는 바다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 지 막막한 데 당장 숙소를 마련할 자리부터 마땅치 않았다. 

이봐 김소장!” 

정주영이 현장소장을 불렀다. 현장소장 김주신이 급히 달려왔다. 

숙소가 마땅치 않지? 우선 이쪽에 천막을 치고 모래 바닥에 합판을 깔아서 잠자리를 마련하자.” 

그렇게 숙소를 임시방편으로 만든 다음 식수는 시내에서 급수차로 날마다 실어 날라 마셔야 했다. 이렇게 중동에 교두보를 만들고 정주영은 군대나 다름없는 야영생활에 동참했다. 마치 사단장이 사병들과 함께 먹고 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동 진출에 성공하느냐, 그대로 무릎을 꿇어야 하는 마당에 정주영이라고 뒷짐을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마침내 교두보를 완성한 현대건설은 중동에서 그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중동은 한해 365일 공사를 할 수 있으며, 모래와 자갈이 널린 건설공사에 천혜의 땅이라고 했던 정주영. 50도나 치솟는 낮에는 잠자고 밤에 일하면 된다는 정주영의 긍정의 힘 덕분에 중동 건설은 이루어졌는지 모른다. 아니 이루어진 것이다.  

달러가 귀할 정도로 부족했던 힘든 시절. 30만 명의 일꾼들이 중동으로 나갔고,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싣고 돌아왔다. 정주영의 뚝심은 동생 정인영도 어쩌지 못했다. 늘 주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이봐! 해봤어?”라면서 돌파해나간 긍정적인 생각으로 고정관념을 깨고 승부의 세계 중동에 뛰어든 정주영의 승리는 그칠 줄 모르고 지속된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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