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으로 달려가 방위병 형에게 가발과 양복을 빌렸다. 시장에서 중고구두도 한 켤레 사 신고 건들건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궁둥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매연이 그날은 먼 산에서 날아오는 밤꽃 향기처럼 느껴졌다.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가장 음악이 ‘쎄다’는 다방에 들어섰다. 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곳이었다. 침이 마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옆집 방위병 형이 알려준 대로 커피를 한잔 시키고 신청곡도 적어 보냈다.
몇 곡의 노래가 흘러갔을 즈음 긴장이 풀리고 나니 음악소리가 제대로 귀에 들어왔다. 감동이 밀려왔다. 매일 ‘야외전축’으로만 듣던 모기소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외제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진동이 가슴을 때렸다.
아까부터 옆 테이블에 있는 아가씨의 시선이 내 볼에 꽃이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신청곡 적기에 바빴다.
“저,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수줍은 듯 들려오는 가녀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였다.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고 심장이 마구 두근거려 터질 것 같았다. 그 아가씨는 내 앞자리에 앉더니 음악을 좋아 하느냐는 둥 내가 귀엽게 생겼다는 둥 얘기를 붙여왔고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로 얼굴을 익혔다.
그렇게 한참이 흐른 뒤 그녀는 부탁이 있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누구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바람을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달랑 차비만 들고 나와서 커피값을 낼 돈이 없으니 돈을 빌려주면 이틀 뒤 이곳에서 다시 만나 꼭 돈을 갚아주겠다 약속하였다.
나는 찻값은 물론 한 술 더 떠 짜장면까지 사주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약속한 날에 그 다방에서 밤늦도록 그녀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뚜아 에 무아’의 ‘약속’을 몇 번이고 신청하며 애꿎은 디제이만 괴롭혔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미련이 남아 그 후로도 자주 그 다방에 들락거리다 나는 결국은 디제이가 되었다.
약속 약속
그 언젠가 만나자던 너와 나의 약속
약속 약속 너와 나의 약속
잊지 말고 살자하던 우리들의 약속
약속 약속 너와 나의 약속
하늘처럼 푸르르게 살자하던 약속
약속 약속 너와 나의 약속
모든 슬픔 잊자하던 우리들의 약속
‘뚜아 에 무아’는 우리나라 통기타 가수 가운데 최초로 결성된 혼성듀엣으로 1970년에 발표된 ‘약속’은 박인희가 작사하고 이필원이 작곡하였다. 이필원이 ‘타이거즈’라는 밴드를 이끌고 ‘미도파 살롱’에 출연할 때 그곳에서 MC로 명성을 날리던 박인희를 만나 1969년에 뚜아 에 무아가 탄생되었다.
‘천상의 화음’이라는 극찬 속에 히트퍼레이드를 벌이던 두 사람은 연인사이라는 매스컴의 오해 때문에 팬들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결별을 하고 말았다. 헤어질 때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면 다시 만나 노래할 것을 약속하였다 한다. 지금쯤이면 그 약속을 지켜도 되지 않을까….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감사, 전 한국교통방송·CBS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