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참으로 오랜만에 자네에게 편지를 쓰는군.
아니, 자네 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던
기억조차 아스라하군.
아무리 기계문명이 세상을 지배한다 하더라도
인본 위주의 가치관만은 버리지 말자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어느 바람에 우리의 다짐을 날려 보냈는지.
노장사상을 논하고, 헤르만 헤세와 카프카의 문학세계를 논하고
헤겔, 프로이트를 희롱하는 것도 모자라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를 혀에 올려놓고 밤을 새운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지.
어느 물길에 우리의 그 순수함을 떠내려 보냈는지...
며칠 전 아내와 용문사를 다녀왔다네.
벌써 거목은행나무에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하더군.
둘이 양 팔을 펼쳐 거목의 둘레를 잴 때 아내의 웃는 모습이
자네 얼굴과 오버랩 되었네.
그게 그러니까... 오, 벌써 30년도 넘었군 그래.
자네와 내가 그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게.
우리는 새로운 체험에 한껏 부풀어 밤을 꼬박 새웠지.
그 때 참여했던 새벽예불의 경험은 아직도 명화의
한 장면으로 나에게 돋을새김으로 남아있다네.
막 솟아오른 태양이 새벽안개를 몰아낼 때
은행잎을 모아 시루떡처럼 쌓아 올리는 한 젊은 스님의
평온한 표정에서 우리는 무심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지.
그 날처럼 저 거목이 몸을 흔들어 노란 각질을 떨구어 낼 때
나는 그 시절의 그리움이 밀려와 아내의 어깨를 지긋이 감쌌다네.
그래, 그 시절에 우린 노란색과 깊은 연(緣)을 맺고 살았지.
최루가스가 뒤 덮은 서울하늘은 일 년 사계절 늘 뿌옇거나 노랬지.
거리에 내려앉은 최루탄 가루는 어디에선가 송화 가루가 날아 온 듯하였고,
허기진 내 눈에는 달걀노른자 가루로 보이기도 하였지.
우리를 눈물과 기침의 고통 속으로 내 몰았던 그 매캐한 냄새를
우리는 향기라 불렀지.
우리의 열망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때 보다는 세상이 많이
맑아진 것 같긴 하더군.
낭만이라는 대단히 소중한 가치를 잃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말이야.
그리고 참, 자네 기억하는가? 존 바에즈(John Baez)라는 여가수 말이야.
정말 대단했지.
그 청순한 얼굴과 가녀린 몸매 그 어디서 그런 강렬한 에너지가 나오는지.
40만 명의 군중을 이끌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불렀다는 ‘We shall over come’ 말이야.
“우리는 승리하리라!” 멋지잖아. 우리 그 노래를 골방에 숨어서 많이도 들었지.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목소리”라며 진심 섞인 호들갑을 떨곤 했지.
사실 그녀의 진가는 저항노래 보다는 서정적인 노래에서 찾을 수 있지.
거 뭐랄까, 청순미와 지성미의 극치?
깊은 애조와 가녀림? 우리 어느새 그런 노래마저 잊고 살게 되었는지...
그녀의 노래 가운데 ‘Mary Hamilton’을 자네에게 권하니 한 번 들어보게나.
그리고 우리 머잖아 우리의 발자취가 남은 곳으로 여행 한 번 다녀 옴이 어떨는지.
소중한 나의 벗이여!
‘Mary Hamilton’은 16세기 스코틀랜드 민중들에 의해 불리어지던 구전민요이다. 한 시녀가 왕의 아이를 낳아 조각배에 태워 바다로 떠내려 보낸 뒤, 그 사실이 여왕의 귀에 까지 들어가 결국 단두대에 서게 된다는 슬픈 내용이다. 가사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잉글랜드의 헨리8세와 관련 된 노래로 추측되긴 하나 역사 기록은 없다. 이 곡은 1960년에 발표된 존 바에즈의 데뷔앨범 수록곡으로 우리나라에선 양희은이 1970년에 <아름다운 것들>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불렀다.
1941년 뉴욕에서 태어난 존 바에즈는 가수로서 뿐 아니라 흑인인권운동가, 반전운동가로 늘 역사의 격랑 속에 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워싱턴 대행진“을 이끌었으며, 그 때 불렀던 ‘We shall over come’은 이미 전설이 되어버렸다. 베트남 전쟁 반대의 하나로 당시 월맹의 수도인 하노이를 방문하여 종전 촉구 연설을 하였으며, 때마침 단행된 미군의 “크리스마스 대폭격”으로 방공호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 때 밥 딜런, 스티브 잡스의 연인이기도 했으며, 전 세계 남성들의 영원한 연인이기도하다.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지성미와 청순미를 간직한 그녀. 우드스톡 페스티발에서 열창하던 그 모습이 줌인 되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