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는 날마다 흥에 겨워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면서 일하려 다니셨단다. 엄마는 사범학교 교직원 식당일을 혼자 하시었지. 집에는 시계도 없었기에 새벽이면 하늘의 칠성별을 시계로 삼아 아침준비를 대강해 놓으신 뒤 바삐바삐 일하려 가시었단다. 우리집은 공원가에 있었는데 사범학교는 지금의 연변2중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단다. 연변병원을 지나 동쪽으로 가는 길부턴 인가가 없는 채소밭이었고 도중 길옆에는 비석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에선 간혹 강도가 나타나서 행인들에게 늘 불안감을 주었다한다.
그러나 엄마는 편안히 그 식당 휴식실에서 쉴 수 없었단다. 집에는 둘째오빠와 내가 학교에 다니므로 엄마가 와서 돌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단다. 집의 밥은 비록 대부분 내가 했어야 했었지만. 그러나 엄마의 가르침이 없고 나를 깨워놓지 않으면 오빠와 나는 밥도 못해 먹었단다. 일요일이면 엄마는 또 다른 삯일을 하시면서 돈을 벌었단다. 그러나 엄마는 늘 웃음띤 얼굴로 별을 이고 다니시었단다.
이렇게 비가오고 눈이 오면서 세월이 흘러 곡식들이 우썩우썩 자라는 푸르름의 칠월말이었지. 장춘으로부터 편지 한통 날아왔단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고 휴대폰이 있으면야 얼마나 좋으련만 그때에는 오직 편지가 우편으로 통할 때였지. 엄마는 급히 날보고 빨리 보라는 것이었단다.
오빠의 편지였단다. “어머님, 저는 드디어 졸업하여 끝내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이 시각 어머니가 앞에 계신다면 엎드려 큰절하겠습니다. 이 졸업장은 어머님의 고생으로 바꾸어온 것입니다…… 나는 학교에서 국가의 졸업안배까지 기다릴까 합니다. 오래지 않아 발표가 된다고 합니다.” 엄마는 편지를 읽는 동안 손등으로 줄곧 눈굽을 닦으시었지.
“끝내 이날이 왔구나! 네 아버지가 있었으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니? 늘 학문으로 대를 잇게 해야 한다고 하시더니……. 네 오빠는 늘 내가 힘들어 하신다구 돈을 아껴 쓰고 겨울에도 학교에서 헌신을 끌고 다니구. 숙사생활 7년 사이에 담요도 없이 지났단다……”.
“엄마, 이젠 엄마의 절반고생은 덜었구, 좋은 일만 있겠습니다.” 하고 내가 좋아서 떠들어 엄마는 웃었지만 눈언저리에는 여전히 이슬이 반짝거리었다.
엄마와 우리는 기쁨으로 날마다 우편배달부 오기만을 기다리었단다. 딸랑랑 자전거 방울 소리에 귀가 솔깃하여 밖을 주시하는데 배달원 아저씨가 “또 이집 편지꾸마!” 하시었지. 둘째오빠가 제꺽 “장춘이죠?”하면서 편지를 받아 피봉을 뜯었단다. 오빠는 시물시물 웃으면서 자기가 먼저 쭉 훑어보곤 점점 눈이 둥그래서 엄마만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단다.
엄마는 둘째오빠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크게 놀라 무슨 큰 불행이 닥쳐온 것 같아서 편지를 와락 빼앗는데 그제야 오빠는 “특대 희소식임다. 형님이 수도 북경으로 간담다. 그것도 중간촌에 있는 중국과학원 전공연구소에 분배되였담다.”하고 소리쳐 내가 엄마손의 편지를 제꺽 가져다 다시 읽어 보았단다. 나는 너무 좋아 엄마를 안고 퐁퐁 뛰면서 “엄마, 봅소 정말임다. 큰 오빤 빨리 가야하기에 며칠 뒤에 인차 북경으로 가야한담다. 집에 오재두 차비가 랑비여서……”
“야! 우리 오빠 정말 큰일함다. 멋있습다.”
내가 소리치자 엄마는 풀썩 앉으시면서 “그럼 그렇겠지. 우리 아들인데……. 우리가 얼마나 기대했다구.” 하고 웃으시는데 얼굴에는 또 눈물이 냇물이 되여 흐르고 있었단다. 나는 “엄마, 오늘은 실컷 우세요.” 했더니 “엉? 내가 왜 울어? 이 좋은 날에……” 하시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억제 못하시면서 웃고 있었단다.
엄마는 옆집으로 달려가 이 기쁜 소식을 자랑하시었지. 그 바람에 온동네가 들썽거려 “오막살이 저 불로집에서 룡이 났다.”는 둥 “불난집이 잘 산다더니 정말 풀리는구만……”. “저 아주머니,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둥 이런 칭찬들이 줄달음쳐 우리집을 찾아 왔었단다.
엄마는 즐거운 속에서 꼬깃꼬깃 모아둔 돈을 마지막으로 부쳐 보내면서 거기에 또 미숫가루, 엿가락과 함께 엄마의 사랑, 동생들의 축복과 온동네의 축복을 한보따리 동여 우편으로 부쳐 보내시었단다. 오늘 엄마의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었고 성공의 눈물이었고 나라에 감사한 고마움을 보내는 감사의 눈물이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