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멩진 시인이 건네는 '제주어 마음사전'

2021.10.04 11:18:43

제주어 마음사전 / 현택훈 / 걷는사람 / 15,000원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제주에 살다 보면 수시로 제주어가 들린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가 아니면 얼핏 들어서는 알 수 없는 말들. 제주어로 빠르게 하는 대화는 흡사 외국어나 다름없다. 분명히 한국어는 맞는데 도저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 ‘듣고 있지만 들리지 않는’ 느낌이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한번 제주어에 눈을 뜨고 나면 제주어로 된 가게 이름이나 지명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제주어로 하는 대화를 완전히 이해하는 건 좀 어렵지만, 제주어를 조금만 알아도 버스정류장을 지나칠 때, 올레길 푯말을 볼 때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저자 현택훈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돌하르방 공장 한편에 버려져 있던 팔 하나 없는 돌하르방, 그 돌하르방을 품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고 한다. 누군가 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잊히기 쉬운 어떤 것, 시인은 그것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제주어도 시인에겐 그런 대상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제주어는 위기다. 유네스코는 제주어를 소멸 위기 언어로 지정했다. 제주어를 쓸 줄 아는 몇 세대가 사라지고 나면, 제주어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된다. 그때는 제주어에 수천 년간 녹아든 제주의 정서, 역사, 신화… 그 모든 것이 함께 소멸해 버린다.

 

그래서 시인은 제주어로 시를 쓰려는 꿈을 품고 있다. 평안도어로 너무나 아름다운 시를 써낸 백석처럼 그도 제주어로 시를 쓰고자 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 ‘제주어 마음사전’으로 제주어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풀어냈다.

 

시인이 4부에 걸쳐 풀어내는 제주어들은 모두 그의 어린 시절, 주변 사람들, 제주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다. 모두 하나하나 주옥같은 단어들이나 그 중 특별히 인상 깊은 시어를 골라 몇 가지 옮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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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멩지다 (숫기가 없다, 똑똑하지 못하다)

시인은 자신이 ‘몰멩진’ 아이였다고 회고한다. 자신이 시를 쓰게 된 것은 ‘몰멩진’ 아이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보여준 한 교생 선생님 덕분이었다. 선생님의 따뜻한 관심과 격려가 한 아이의 인생에 얼마나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꼭지다.

 

(p.86-87)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나의 유일한 ‘자파리’(장난)은 낙서였다. ‘몰멩진’ 아이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취미였다. 운동을 못하니 축구나 농구에도 잘 끼워주지 않았다. 한번은 쉬는 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공책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전화기에 대한 낙서였던 것 같다. 마침 교생 선생님이 지나가다 내 낙서를 보고 말을 걸었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을 때 지적하기 위해 말을 거는 선생님은 있지만, 쉬는 시간에 말을 거는 선생님은 처음이었다.

“무슨 글이니?”

… 나는 깜짝 놀라 손으로 공책을 가렸다.

“괜찮아. 내가 봐도 될까?”

교생 선생님이 내 공책을 들어 읽었다. 이제 혼날 일만 남았구나,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를 썼구나.”

나는 너무 놀라 고개를 들어 교생 선생님을 빤히 바라봤다.

“네? 시, 시라구요?”

...“전화기를 의인화했구나.” 교생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어색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시라는 말은 알고 있었지만, 그날부터 시라는 낱말이 설레었다. 나는 한 번도 시를 쓴다는 생각을 한 적 없는데, 시라고 말해주다니. 내가 쓰는 낙서가 시가 될 수 있다니. 그때부터 나는 장래 희망란에 ‘시인’이라고 적었던 것 같다. …(가운데줄임)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있다. 내 마음을 알아준, 내 마음의 악기를 발견해 준 그 선생님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주위 시선은 아랑곳없이 통곡했다.

 

#솔라니 (옥돔)

제주에서는 옥돔을 많이 먹는다. 그런데 제주도 동서남북 지역마다 옥돔을 부르는 명칭이 제각기 다르다. ‘솔나니, 솔래기, 오토미, 오톰셍성’… 놀랍게도 나비학자로 잘 알려진 석주명 선생도 제주도 방언 책을 냈다.

 

(p.121)

일찍이 나비박사 석주명은 나비 따라다니듯 제주어를 따라다니며 《제주도 방언집》이라는 책을 냈는데, 그 책에 보면 제주의 각 지역마다 다른 제주어를 세심하게 표시해 놓았다. 제주어로 시를 쓰다보면 평양 태생의 생물학자 석주명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그 역시 따뜻한 밥 위에 손으로 찢은 ‘솔라니’를 얹어 한입에 삼켰으리라.

 

# 아꼽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제주에 오면 여기저기서 보게 되는 ‘아꼬운 OO’라는 상호.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들 때 쓰는 말로 제주어를 잘 모르는 사람은 자칫 ‘아니꼽다’라는 뜻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저자는 요즘 제주에 ‘아꼬운’ 서점들이 많이 생겼다며, 그중 몇 군데를 추천한다.

 

(p.130)

‘소심한 책방’ 외에도 ‘아꼬운’ 서점들이 제주도에 많다. 우도에는 ‘밤수지맨드라미’, 함덕에는 ‘오줌폭탄’과 ‘만춘서점’, 제주시 원도심에는 ‘라이킷’과 ‘미래책방’, 상명리에는 ‘소리소문’ 등. 모두 여린 새처럼 몸을 오들오들 떨며 앉아 있다. 너무 ‘아꼽다’. 만약에 제주 책방 투어를 하신다면 뚜럼브라더스 앨범에서 이가은 양과 안지범 군이 부른 노래 ‘우리 몬딱 소중해’를 들으며 다녀보시라. ‘몬딱’은 ‘모두’를 뜻하는 제주어다. 소중한 서점들이 더 마음에 와닿을 것이다.

 

저자의 추천대로 ‘우리 몬딱 소중해’를 들어보니 정말로 마음이 아꼬와진다. 제주엔 정말 아꼬운 게 많고, 제주어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제주어의 매력을 알아가다 보면 잃어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저자가 자신의 꿈대로 제주어로 시를 쓰고, 백석이 그러했듯 아름다운 우리말의 정취를 마음껏 펼쳐냈으면 좋겠다. 그런 ‘아꼬운’ 시집이 나오는 날,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그 시집을 펼쳐드리라.

 

제주어 마음사전 / 현택훈/ 걷는사람 / 15,000원

 

우지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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