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빛낸 한글, 한글이 빛낼 역사

2022.03.07 12:30:53

/《역사를 빛낸 한글 28대 사건》, 김슬옹ㆍ김옹 글, 임미란 그림, 아이세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한글’.

우리가 우리말을 ‘한글’로 부른 것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전에는 ‘언문’, 또는 ‘훈민정음’이라 불려오다가, 주시경 선생이 ‘위대하고 큰 하나의 글’이라는 뜻을 담아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부터 한글은 민족의 마음속에 크고도 높게 자리 잡았다.

 

이 책 《역사를 빛낸 한글 28대 사건》은 1443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때부터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까지, 한글이 우리 역사에 스며드는 과정을 28대 사건으로 풀어냈다. 그 가운데는 허균이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펴낸 것처럼 익숙한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생소한 이야기가 많아 한글을 둘러싼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를테면 하급 관리들이 한글 벽서를 써 붙여 고위 관료를 비판했다든지, 《훈민정음》에 관한 시험을 보아 고위 관료를 선발했다든지, 종로시장 상인들이 한글 투서로 호조판서를 비판했다든지… 한글이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쓰였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쉽고도 재미있게 정리되어 있다. 이 책에 실린 28대 사건 중 가상 인상적인 5대 사건을 골라 보았다.

 

 

1. 1460년, 《훈민정음》으로 고급 관리를 선발하다

세조 시기인 1460년, 과거시험을 관장하던 예조에서 《훈민정음》을 문과 시험 과목에 넣자고 건의했고, 세조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사실 문종과 단종 시절 하급 관리를 뽑는 시험 과목에서 원래 들어있던 《훈민정음》이 흐지부지 빠지기도 했지만, 세조는 세종의 뜻을 이어받아 한글을 널리 보급하는 일에 굳은 의지를 보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훈민정음》은 고급 관료의 소양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인정받았고, 사대부 양반 사이에서도 널리 쓰이게 됐다.

 

2. 1485년, 종로시장 상인들이 한글 투서로 권력을 비판하다

성종 16년, 종로 상인들이 한글로 쓴 투서를 호조판서 이덕량에게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덕량은 당시 용산 주변의 물길을 넓히고 종로시장의 상가들을 정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진 상인들이 그의 집에 한글 투서 두 통을 보낸 것이다. 영의정부터 판서까지 고위 관료들이 종로의 도로정비 사업을 한다는 핑계로 제 잇속을 챙기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덕량은 바로 성종에게 이를 보고했고, 분노한 성종은 한글 투서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 일로 옥에 갇힌 사람은 79명이나 되었지만, 죄질이 나쁜 16명 말고는 금세 풀려났다. 이 사건은 당시 하층민에 속한 상인들도 한글로 투서를 쓸 정도로 한글을 능숙하게 사용했고, 그만큼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1506년, 한글을 아는 여성을 나라의 인재로 뽑다

1504년, 도성 곳곳에 연산군의 폭정을 비방하는 한글 벽보가 나붙었다. 이에 분노한 연산군은 한글을 사용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고, 한글책을 모조리 불태우는 등 한글 창제 이래 가장 큰 탄압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한글을 쓰지 못 하게 하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깨달은 연산군은 상당히 혁신적인 명을 내린다. 각 관청에 양만과 천민을 구분하지 말고 한글을 아는 여성을 각 지역에서 두 명씩 뽑으라는 내용이었다. 여성들이 한글을 많이 알고 있으니 그들을 관리로 뽑아 나랏일을 돕게 하려는 취지였다.

 

가부장적인 질서가 지배하던 시기, 한글을 아는 여성을 나라의 인재로 뽑은 것은 굉장히 혁신적인 일이었다. 폭정의 대명사로 알려진 연산군이지만, 이런 시대를 앞선 결정을 했다는 점이 놀랍다.

 

4. 1593년, 임진왜란에서 한글 담화문이 빛을 발하다

임진왜란 발발 1년 후인 1593년, 선조는 한글 담화문을 발표한다. 왜군에 포로로 잡힌 조선 백성 가운데 혹여 왜군을 도왔다는 누명을 쓸까 두려워 도망치지 않는 이가 있다면,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하루빨리 적진에서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김해 지역을 지키던 권탁은 선조 임금의 담화문을 가지고 왜군이 있는 부산으로 들어가 왜군 수십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백성 백여 명을 구해냈다. 이 담화문은 현재 보물 9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식 이름은 ‘선조 국문 교서’로, 권탁의 후손들이 대대로 보존해 오늘까지 전해져 왔다.

 

5.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하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발견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1446년 세종이 직접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본은 오랜 세월 자취를 감춘 상태여서 한글 창제 원리와 반포일 등은 오리무중인 상황이었다. 그렇다 보니 한글이 한자나 몽골어를 모방했다거나 창살을 본떠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이 해례본의 발견 이후 한글이 사람의 발음 기관을 본떠서 만든 과학적인 글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무렵까지 안동군 와룡면에 사는 서예가 이용준의 처가인 광산 김씨 집안에서 가보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어느 날 이용준은 이 사실을 스승인 국문학자 김태준에게 전했고, 그 뒤 김태준은 우리 문화재 수집가로 널리 알려진 간송 전형필을 찾아가 살 것을 권했다.

 

간송은 당시 서울의 좋은 기와집 열 채 금액이었던 만천 원을 주고 훈민정음을 사서, 6.25 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떠나면서도 품속에 넣고 다니며 소중하게 지켜냈다. 그가 고스란히 보존해 세상에 내보낸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은 1962년 국보 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랐다.

 

이렇듯 한글이 지나온 다양한 발자취를 돌아보면, 오늘날 방탄소년단이 부른 노래의 한국어 가사를 전 세계인이 외우고, 나라 밖에서 한글 배우기 열풍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한글을 소중히 지켜온 수많은 이들의 노력 덕분임을 알게 된다. 쓰면 쓸수록 재밌고, 정감도 가는 한글. 이 소중한 글자를 그동안 외국어 배우기에 몰입한 나머지 너무 홀대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해본다.

 

지금부터라도 모두가 한글을 조금 더 바르고 정확하게, 또 아름답게 쓸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다. 우리말을 잘 가꿔나갈 수 있는 이는 우리말을 가장 잘 아는 한국인이고, 각자 한글을 바르고 아름답게 쓰다 보면 한글의 빛나는 역사는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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