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경영한 정조, 그의 지혜를 배우다

2023.02.06 11:39:04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 김용관, 오늘의책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조선 국왕은 모두 나라를 경영하는 경영자였다.

그리고 정조는 썩 훌륭한 최고경영자(CEO)였다. 조선 임금들 가운데서도 나라를 잘 경영했다고 상당히 높게 평가받는 군주다. 물론 어느 임금이나 그렇듯 정조 치세도 명(明)과 암(暗)이 있지만, 그가 조금 더 살아서 조선을 지탱했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거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 책,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는 정조의 국가경영 방식에서 시사점을 도출해 오늘날 경영자들에게도 많은 지혜를 주는 책이다. 경영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만큼, 정조의 경영방식 가운데는 오늘날에도 취할 것들이 꽤 많다.

 

 

그의 경영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그는 기본적으로 적을 강하게 키워 적도 승리하고 나도 승리하는 상생경영을 펼쳤다. 조선시대 많은 당쟁의 역사에서 보듯 ‘나 살고 너 죽자’ 식으로 반대편의 씨를 말리는 그런 섬멸전법을 구사하지 않았다. ‘호적수’를 만났다 싶으면 오히려 그 사람을 크게 키워 견제세력으로 활용했다.

 

이는 어찌 보면 적이 강해도 내가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사에 자신의 의견에 순응하는 ‘예스맨’을 원하지 않았다. 임금의 뜻이라도 자신의 의견과 다르면 끝장토론을 펼치는 그런 기개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p.5)

정조는 집권 후반부 심환지를 강한 상대로 놓고 정치를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강한 상대에 대해 더 강해지길 요구했다. 상대를 제거의 대상이 아닌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로 본 것이다. 권력은 언제나 상대가 있는 법이다. 권력(權力)이란 말의 ‘권(權)’이 저울추를 뜻하는 것은 이런 의미다. 권력은 아주 정밀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는 종합예술이다.

 

둘째, 그는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적에 둘러싸여 있어도 끊임없이 개혁을 추진한 깨어있는 임금이었다. 그 당시에는 개혁을 ‘거문고 줄을 고친다’라는 뜻으로 ‘경장(更張)’이라 했다. 정조 때를 기록한 실록에는 이 단어가 포함된 기사가 150건이나 되는데, 이는 영조 시절 66건에 견줘 두 배 반이나 많은 수치다.

 

물론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적이 조정에 가득한 상황에서 개혁은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개혁을 선두에서 이끌고 갈 채제공을 공조판서로 임명했더니 정승 셋이 사표를 내고 반년 넘게 입궐하지 않는 초유의 사태도 있었다.

 

(p.137)

세 명의 정승이 자리를 비운 지 6개월이 넘었다. 인내심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조는 10월 11일 영의정에 서명선, 좌의정에 홍낙성을 임명했다. 1년 가운데 절반 이상을 정승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초유의 일이 1784년에 있었다. 그들이 대궐을 비운 이유는 채제공을 통한 개혁의 고삐를 쥐고 있는 정조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실제로 세계사적으로도 앞서나간 경장을 여러 차례 이뤄냈다. 한 예로 1778년 1월 12일 발표한 ‘흠휼전칙(欽恤典則)’은 1804년 발표된 ‘나폴레옹 법전’보다 훨씬 앞선 인권법의 시작이었다. 서문에 인권에 대한 언급이 있는 이 법은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정확한 법적 근거에 따라 형량을 준수하게 했다.

 

그 밖에도 서얼들에게 정치 참여의 길을 열어주고, 서울ㆍ경기 지역 가문의 관료 독점을 해소하기 위해 규장각 벼슬아치들을 각 지방에 보내 선발한 현지 유생들을 성균관에 입학시키고, 종로에 큰 상점을 가진 상인들의 물품 판매 독점권을 폐지하여 소상공인을 살리는 등 그의 개혁은 점진적이고도 치밀했다.

 

마지막으로, 정조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으며 누구보다 큰 분노와 상처를 품게 됐지만 이를 연산군처럼 폭정으로 터뜨리기보다 ‘차가운 열정’으로 승화시켜 통치의 무기로 활용했다. 그의 취임 일성은 잘 알려진 것처럼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일 정도로 과거의 비극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지만, 대단하게도 그 분노를 학문을 향한 열정과 자신을 엄격히 관리하는 자기통제로 풀어냈다.

 

(p..24)

정조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책을 읽었고, 매일 일어난 일을 그리고 과거의 일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단정한 자세로 책을 읽는 것은 적들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정조는 집권 20년 무렵인 1796년 4월 26일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꿇어앉아 있어서 버선 끝과 바지의 무릎이 모두 헤어졌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두건을 벗은 적이 없었다. ...(줄임)... 20년이나 집권했으면 여유 있을 만도 하지만 정조는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긴장했고 여전히 자신에게 채찍을 들며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그의 정신력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지나친 자기통제가 몸에 무리를 주었던 듯하다.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는 삶, 세손 시절부터 이런 삶을 수십 년 동안 견디고도 살아남은 것은 그가 타고난 임금의 재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가 쓴 것처럼 정조의 죽음 역시 분노가 화근이 된 것이니, 이런 점에서 분노 통제형 리더십은 ‘사람을 골병들게 한다’라는 말도 과언은 아니다.

 

정조가 1800년 세상을 떠나고 조선은 급격하게 무너졌다. 정조가 우려했던 지역 차별의 반작용은 1811년 홍경래의 난으로 터져 나왔고, 60년 뒤에는 전국적인 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110년 후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등 해방 전까지 고난과 억압의 역사가 계속됐다.

 

어찌 보면 조선 역사에서 영명한 임금의 시대는 정조를 끝으로 막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분노와 복수심의 열기를 식히고 식혀 차가운 열정으로 뿜어냈던 정조. 비록 그의 통치가 완벽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런 초인적인 절제와 인내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송받을 만하다. 반대파를 포용하고, 개혁을 지속하고, 분노를 열정으로 승화한 그의 경영방식은 오늘날 수많은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경영자들에게도 좋은 통찰을 줄 것이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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