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조선의 출산문화’라는 주제로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9월호를 펴냈다. 다산다사(多産多死)의 시대였던 조선의 출산문화를 들여다보고, 행복한 가정을 위한 좋은 양육과 교육 시스템에 대한 해답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시대 출산문화는 어떠했을까?
박희진 교수는 <조선의 출산 조절기제와 문화>에서 조선시대의 출산 장려와 제한이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 살펴본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여성 1인이 평균 5.09명을 출산했고 이 가운데 제사를 모실 수 있는 남성은 1.25명 수준에 불과했다. 사망률이 높았던 시대라 아들이 있어도 더 많은 아들을 원했다.
특히 18세기 종법 질서의 강화로 아들을 낳아 가계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가 여성에게 지워지며 다양한 문화적 행위가 만들어졌다. 바위를 쓰다듬거나 껴안기도 하고, 돌을 넣거나 타고 놀기, 동전이나 돌 붙이기, 구멍에 나뭇가지 등을 끼우기 따위 행위는 유사 성행위를 흉내 내는 행태로 나타났다.
다산을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에도 조선 후기 출산율은 17세기 이후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출산율 하락의 원인으로 성에 대한 터부, 여성의 재가 금지 등을 들 수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을 대표로 하는 성을 금기시하는 풍속은 가옥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쳐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하였고, 성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 ‘씨 내리는 날’을 정해 남편이 안채와 사랑채를 오고 가는 것이 암묵적 관행이었다. 쾌락으로서의 성을 터부시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의식이 드러나는 속담이 지역마다 생길 정도로 고착되었다. 또한 여성의 주체성 제한과 함께 선비가 여인들의 재혼 금지 풍속은 일반 평민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출산율이 급격히 낮아지기도 했다.
박 교수는 사회의 인구는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사회변동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사회의 한 구성이므로, 오늘날 한국의 인구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존재하는 장기적 사회구조와 변동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기의 건강과 장수를 비는 배냇저고리
<박물관 소장유물에 나타난 전통 배냇저고리의 미학>에서 안귀주 대표는 배냇저고리에 담긴 문화적 상징 코드를 풀어낸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조선시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처음 입는 배냇저고리는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옷이다. 신생아는 목이 짧고 피부가 연약하여 깃이 목둘레에 스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깃을 달지 않았다. 이처럼 깃이 없는 불완전한 옷을 입힌 이유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 악령으로부터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름은 길게 하여 옷이 풀리지 않게 몸을 돌려 감았는데, 긴 고름처럼 장수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깃과 섶이 없는 배냇저고리를 ‘눈, 코 없는 옷’이라며 비약해서 부르고, 이것을 입히면 잡귀들이 못 알아본다고 생각한 것에는 불안을 희화화하려는 의도가 있다. 안 대표는 배냇저고리에서 해학이 전해지는 것은 어렵게 아이를 낳아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은 인간의 정성과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현실의 애환과 번뇌를 공감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를 이어 번성하고자 하는 욕구
이 밖에도 웹진 담(談)에서는 ‘조선의 출산문화’에 대한 다양한 일화를 다룬다.
<배내옷 긴 끈 사연>에서는 최흥원의 《역중일기(曆中日記)》 속 기록을 발췌하여 출산을 앞둔 딸 시점으로 웹툰을 그렸다. 출산일이 다가오자 태어날 아이를 위해 무명의 배냇저고리를 준비하고, 출산을 걱정하며, 아버지를 위해 비단으로 수의를 짓는 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람을 낳다>에서는 출산과 아이의 죽음을 겪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녀의 조각들>을 통해, 사회에서 출산과 양육을 여전히 ‘여성의 일’로 보는 제한적인 시선에 대해 답답함을 풀어낸다.
비야의 사건일지 <사라진 아기를 찾아라>에서 딸을 낳는다는 당골네 예언과 달리 인화당 아씨가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이 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산비는 명석한 수사력으로 아이를 찾아낸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대대손손 이어질 화락(和樂), 화수당(花樹堂)>에서는 안동 오미리 풍산김씨 문중의 화합 공간이었던 화수당을 소개한다. 꽃과 나무가 가지를 치며 무성하듯 문중이 번성하기를 바르는 마음을 담아 지은 화수당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초서체로 쓴 편액이 걸려있다.
웹진 담(談) 9월호는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누리집(http://story.ugyo.net/front/webzine/index.do)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