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 귀화하여 공 세워

  • 등록 2024.09.09 11: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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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 활약한 굵직한 외국인들
《우리 역사에 뿌리내린 외국인들》, 정혜원, 해와나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51)

서울 달 밝은 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로되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쩌랴

 

아라비아 상인이었던 처용이 외간 남자와 있는 아내를 보고 부른 노래다. 처용은 신라 49대 헌강왕 때 아라비아에서 건너와 오랫동안 서라벌에서 신라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다. 처용은 아내를 용서했지만, 다시 혼인하지 않고 풍류를 즐기며 행복하게 지냈고, 죽어서는 동해바다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정혜원이 쓴 이 책, 《우리 역사에 뿌리내린 외국인들》은 생각보다 많은 우리 역사 속 외국인들을 차례차례 조명한 책이다. 흔히 ‘단일민족’이라는 인상 때문에 역사 속 외국인이 많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뜻밖에 역사에 발자국을 남긴 굵직한 인물들이 많다.

 

 

인도 아유타국에서 건너와 가야 김수로왕과 혼인한 허황옥 공주, 신라의 수호신이 된 푸른 눈의 아라비아 상인 처용, 베트남 왕실의 혼란을 피해 고려로 망명한 안남국 왕자 이용상, 조선의 유학을 사랑한 일본 장수 김충선, 《하멜표류기》로 널리 알려진 하멜이 그 주인공이다. 그뿐 아니라 외국에 뿌리내린 우리나라 역사 속 인물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은 안남국(오늘날의 베트남) 왕실의 혼란을 피해 고려로 건너온 이용상이다. 이용상은 베트남 리 왕조 영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는데, 왕위 계승 다툼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고려로 망명하여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용상은 고려로 넘어와 공을 여러 차례 세웠다. 고려 옹진에 도착한 이용상은 마을 사람을 잡아가는 해적들을 처치했는데, 옹진을 다스리는 현령은 이용상과 부하들의 활약을 알리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을 읽은 임금은 그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옹진 땅에 집과 논밭을 내렸고, 그는 이렇게 고려의 백성이 되었다.

 

몽골군이 침략했을 때도 이용상은 뛰어난 병법으로 승리를 거두며 맹활약했다. 큰 공을 쌓은 그는 높은 관직을 얻고 많은 땅을 하사받아 명실상부한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먼 이국땅에 들어와 인정받고 가문을 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건만, 이용상은 지모와 용기가 참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한편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 ‘사야가’로 조선을 침공했다가 조선의 유학에 감명받고 귀화한 장수 ‘김충선’도 인상적이다. 사야가는 세 부대로 편성된 일본군에서 두 번째 부대의 왼편을 이끄는 좌선봉장이었다. 순식간에 동래성과 부산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한양을 향해 물밀듯이 진격했다.

 

사야가는 비록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무사의 길을 걷긴 했지만, 원래 꿈은 유학을 공부하는 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도 조선의 유명한 학자들이 펴낸 책을 구해 읽으며 조선의 유학을 선망하다가, 한 효자가 늙은 부모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등에 업고 피난가는 것을 보면서 조선이야말로 충효의 정신이 살아 있는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p.89)

나는 조선의 유학을 사모합니다. 그리하여 조선을 공격하거나 침범할 뜻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군사를 보면 달아나지 말고 각자 맡은 일을 계속 하십시오. 만약 우리 군사들 가운데 당신들을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목을 베어 사죄하겠습니다.

 

사야가는 이와 같은 글을 써서 조선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에 붙이는 한편, 투항 편지를 써서 경상병사 김응서 장군에게 보냈다. 사야가의 편지를 두고 진심이다, 아니다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김응서 장군은 사야가의 마음을 믿어주었다.

 

(p.89)

임진년 4월 일본국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 사야가는 조선국의 장군님께 편지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섬나라 오랑캐에 불과하나 오래전부터 조선의 문화를 좋아하고 학문을 숭상하였습니다. 조선에 도착하여 문물을 직접 보니, 조선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솟구쳐 오릅니다. 뜻을 함께하는 부하 3천 명을 거느리고 장군님의 진영에 투항하려 하니 부디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사야가는 조선에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투항한다. 사야가는 일본군 고위 장수로 조총과 탄약 만드는 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선군에 큰 힘이 되었다. 그가 평양성에서 큰 공을 세우는 등 임진왜란 전반에 큰 활약을 보이자, 선조 임금은 큰 상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여 대구 삼성산 아래 우록마을이라는 곳에 정착했다. 거기서 원하던 유학을 공부하며 평화롭게 지냈으나, 다시금 후금이 쳐들어와 병조호란이 일어나자, 조선을 위해 떨치고 일어섰다.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인조 임금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모아 한양으로 올라갔지만,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 뒤로 상심한 김충선은 우록마을로 돌아와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았고, 학문을 닦고 주변 학자들과 교류하는 데만 힘썼다. 그가 죽자, 마을에는 녹동서원과 그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고, 지금도 해마다 3월이 되면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조선 사람도 근왕병을 이끌고 임금을 구하러 가기 어려운 상황에, 일본군 장수였다가 귀화한 김충선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으니, 인조는 얼마나 반가웠을까? 비록 대세를 꺾지는 못했지만, 임진왜란 일주일 만에 투항하여 오래도록 조선을 도왔던 김충선은 조선에 참으로 귀한 인재였던 셈이다.

 

한 나라의 국력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다양성을 잃으면 새로운 생각이 나오지 않고, 생각의 물꼬가 막히면 발전도 막힌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기 100년 동안 귀화한 외국인이 17만 명에 달할 만큼 고려는 역동적인 나라였지만, 개방과 교류를 이어가지 못하고 조선시대 지나치게 폐쇄적인 사회가 되어버린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다. 외국인이 들어오는 것도, 우리 국민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도 자연스럽다. 어려운 시절, 우리 땅에 정착하느라 참으로 고생했을 외국인들을 떠올리며 다양성의 값어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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