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2018년, 향년 82살로 별세한 황병기 명인은 한국 가야금계의 독보적인 장인으로, 대표작 ‘미궁’을 비롯해 신라음악을 되살린 ‘침향무’ 등 많은 실험적인 곡을 작곡해 가야금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런 그가 가장 아끼던 책이 있었으니, 바로 《논어》다. 여러 가지 번역서를 참고해서 《논어》를 정독하고, 보석처럼 마음에 새길 말씀만 100문장을 모아 그만의 ‘논어 명언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외출할 때 품에 지니고 다니며 읽었다. 이 책은 논어 명문장에 이런저런 생각을 곁들여 쓴 수필 모음집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황병기 명인을 만든 철학의 팔 할이 《논어》라는 생각이 든다. 거장에게는 항상 그의 삶과 작품을 추동하는 철학이 있다. 그는 《논어》를 통해 언행을 정제했고, 늘 수양하며 구도하듯 음악을 했다.
(p.158)
옛것을 익히어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스승이 될 수 있다. -<위정>편 11장-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작정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 말고 옛것을 충분히 익힌 후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옛것을 모르고 새로운 것만 좇으면 허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황병기 명인의 여정 또한 그랬다. 1951년부터 10년 동앙 전통적인 가야금곡을 배운 뒤, 1862년부터 새로운 창작 가야금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초기 가야금곡은 모두 조선조의 전통에 바탕을 두었고, 197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신라 미술의 미를 탐구한 획기적인 작품 〈침향무〉를 내놓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옛것을 배워 숙달한 뒤에, 새로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선보인 것이다.
작품을 만들 때, 황병기 명인이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 가운데 하나는 ‘바탕과 겉치레를 잘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바탕과 겉치레가 잘 어울려야 군자가 된다’라는 공자의 말에 공감해서였다.
(p.272)
바탕이 겉치레보다 두드러지면 투박하게 되고, 겉치레가 바탕보다 두드러지면 기교적이게 된다. 바탕과 겉치레가 잘 어울려야 군자인 것이다.
-<옹야>편 16장
그는 한국의 전통음악에 대해, 정악에서는 겉치레보다 바탕이 두드러지고 민속악에서는 바탕보다 겉치레가 두드러진다고 평했다. 그래서 작곡할 때, 정악적인 바탕에 민속악적인 겉치레를 갖추어 잘 어울리도록 하는 데 신경을 썼다.
또한 공자가 예악에서 세련된 것보다는 차라리 질박한 것을 좋아한다고 한 것을 매우 멋진 말이라 여겨, ‘질박하면서도 세련된’ 음악을 하고자 했다. 좋은 예시로 든 것이 판소리다.
(p.275)
판소리에서는 그냥 맑고 예쁜 소리는 알아주지 않는다. 그건 ‘노랑 목’일 뿐이다. 목소리가 쉬어서 탁해졌다가 탁함 속에서 피나는 공력으로 다시 맑아진 소리를 알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맑아진 소리는 아무리 노래를 해도 다시 쉬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금에 있는 ‘청공(淸孔)’이라는 구멍의 존재도 흥미롭다. 대금에는 취구 옆에 ‘청공’이라는 구멍을 하나 더 뚫어 그 구멍을 갈대 속에서 얻은 얇은 막으로 덮어둔다. 대금을 불 때면 이 갈대 청(막)이 공명하여 대밭에 부는 바람 소리 같은 음색을 낸다. 이런 대금의 청 소리는 맑기만 한 소리를 피하여 흙내 나는 소리로 만들기 위한 슬기로움이었다.
맑고 예쁜 음을 으뜸으로 여기지 않고, ‘흙내 나는’ 질박함을 소중히 여기는 것. 이것이 바로 깊이 있는 한국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인생도 마음먹은 대로 뭐든지 이룬다면 심심한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눈물과 땀, 고통이 얽힌 ‘흙내’야말로 인생에 풍미를 더하는 ‘한 끗’일 수도 있다.
이 책은 황병기 명인이 평생 가슴에 담고 새겼던 논어의 명문장과 더불어, 음악 뒤에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높은 사유의 힘과 철학까지 음미할 수 있는 책이다. 거장의 작품을 만들어낸 철학을 천천히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동양고전의 깊이가 음률에 묻어나기까지, 많은 ‘흙내’를 거쳤을 그의 여정을 책과 함께 따라가 보자. 이번 겨울엔 황병기 명인의 가야금 연주를 하나하나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어딘가 실험적이면서도 어딘가 마음을 잡아끄는, 묘한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