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학계가 꼽은 위대한 철학자 ‘다석 류영모’

2022.01.22 12:10:52

《저녁의 참사람》, 이상국ㆍ박영호, 메디치미디어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84]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빈섬 이상국 아주경제 논설실장이 《저녁의 참사람》이라는 제목의 다석 유영모(1890~1981) 선생 평전을 냈습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월간중앙에 <양승국 변호사가 산에서 만난 사람>을 연재할 때, 중앙일보 기자였던 빈섬은 월간중앙에 <미인별곡>을 연재하였지요. 그 당시 김광수 월간중앙 대표를 통해 빈섬을 알게 되어 가끔 식사도 하면서 소식을 이어왔기에, 얼마 전에 빈섬이 낸 다석 평전을 사 보았습니다.

 

 

2008년에 제22회 세계철학자대회가 한국에서 열렸습니다. 빈섬의 말에 따르면 당시 우리 철학계에서는 조선 시대의 이황, 이이, 송시열, 정약용과 현대의 류영모, 함석헌을 한국의 철학자로 내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세계에 내놓을 만한 독창적인 사상적 심화를 이뤄낸 사람으로 꼽힐 사람은 다석 류영모뿐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석이 그렇게 뛰어난 철학자였단 말인가?’ 하며 놀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다석 자체에 대해서도 ‘그런 철학자가 있었나?’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다석은 그의 심오한 사상체계에 견줘 우리에게 덜 알려진 인물이지요. 사실 다석이 1981년 2월 3일 세상을 떴을 때도 언론에선 이를 살피는 글 한 줄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빈섬은 2021년 2월 3일 뒤늦은 다석의 부음기사를 다석이 세상을 벗어난 시간인 저녁 6시 30분에 맞추어 인터넷 기사로 송고를 하였다고 합니다. 빈섬이 쓴 부음기사 일부를 인용해보지요.

 

류영모가 돌아갔다. 그의 호 다석(多夕)에 들어 있는 저녁 시간, 오후 6시 30분에 91년 입은 세상의 몸옷을 벗었다. 90년 10개월 23일, 날수로 3만3,200일을 살았다. 약 9억 번 숨을 쉰 뒤 멈췄다. 고통과 격동의 시간이 뒤엉킨 20세기 한국에서 참된 ‘인자(人子)’로, 신의 성령을 받은 사람의 아들로 실천궁행하는 삶을 살았다. 서구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 100년 역사 속에서, 2,000년 전 예수의 뜻을 제대로 섬기려는 굳센 길을 걸었던 뚜렷한 사람이다.

 

삶은 간소했지만 치열했다. 예수가 십자가 죽음으로 전한 ‘신의 복음’은 류영모의 사상적 감관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 충격과 감동으로 전해졌다. 그의 생을 돌아보건대, 그를 드러내는 걸맞은 칭호는 ‘K-영성(靈性)을 돋운 세계적 사상가’다.

 

빈섬의 부음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다석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철학자입니다. 다석은 15살 때 서울 연동교회에 나가면서 먼저 기독교에 입문하였습니다. 그리고 20살 때 남강 이승훈의 초빙으로 2년간 오산학교 교사를 하였는데, 남강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오산학교가 기독교 학교로 거듭나게 된 것도 다석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석은 이후 제도화된 기독교를 넘어섭니다. 빈섬은 이를 기독교가 세속화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신과의 참된 접속을 보정하는 방편으로 다석이 석가, 노자, 공자가 추구하고 득의(得意)한 경지를 빌려 쓴 것이라고 합니다.

 

다석의 종교적 사유의 핵심은 ‘얼나’입니다. ‘얼(聖靈)’이 ‘나’라는 개별적 인간과 결부된 것이 ‘얼나’입니다. 다석은 ‘얼나’에 대응한 개념으로 ‘몸나’를 말하는데, 우리는 내 속의 ‘얼나’를 만나 육신의 ‘몸나’를 벗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과 비슷한 개념 같습니다. 또한 불교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불성(佛性)이 있으며 이러한 불성을 만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몸나인 내가 얼나를 만나는 것도 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석의 심오한 사상을 제대로 체득(體得)하지 못한 내가 그 이상 말하는 것은 언어 공해이므로 다석의 사상에 대해서는 입을 닫겠습니다. 다만 ‘얼나’, ‘몸나’에서 알 수 있듯이, 다석은 순수 우리말로 된 신학용어를 만들어 낸 한글 신학자라는 것은 말하고 싶습니다. 다석은 ‘빈탕한 데(虛空)’, ‘없이계심(無有)’, ‘가온찍기’ 등 우리말로 자신의 신학 사상을 풀이했습니다.

 

광주를 ‘빛고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광주를 ‘빛고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람이 다석입니다. 다석은 광주가 영성이 높은 도시로 헌신적 삶을 일관한 성자들이 배출된 성지라는 의미에서 ‘빛고을’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리고 함석헌 옹이 《씨ᄋᆞᆯ의 소리》라는 잡지를 펴내면서 ‘씨ᄋᆞᆯ’ 사상을 전파하였지요? 이 씨ᄋᆞᆯ 사상도 다석의 제자인 함석헌 옹이 다석에게서 배워 이를 널리 전파한 것이지요.

 

빈섬이 위 부음기사에서 다석이 날수로 3만3,200일을 살았으며, 약 9억 번 숨을 쉬었다고 했지요? 부음기사에 이렇게 살아온 날수의 합계를 표시하고 숨을 몇 번 쉬었는지 말하는 것은 별로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석은 평소에 이렇게 자신의 살아온 날수와 숨을 쉰 횟수를 얘기하였는데, 그렇기에 빈섬도 부음기사에 이렇게 표시한 것이지요. 다석은 하루하루의 현재의 삶을 중시하였기에, 이렇게 얘기했던 것입니다.

 

다석은 28살 때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청춘》에 ‘오늘’이란 글을 기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삶으로 산다는 궁극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가로대 오늘살이에 있다 하노라.”, “어제란 오늘의 시호(諡號)요, 내일이란 오늘의 예명(豫名)일 뿐이다. 거기라 저기라 하지만, 거기란 거기 사람의 여기요, 저기란 저기 사람의 여기가 될 뿐이다. 산 사람은 다 나를 가졌고, 사는 곳은 여기가 되고 살 때는 오늘이다.”, “너무 내일만 허망(虛望)하다가 오늘을 무료히 보내게 되면 이것은 나지도 않은 용마를 꿈꾸다가 집에 있는 망아지까지 먹이지 않는 격이라. 산 것은 사는 때에 살 것이니라.”

 

제 지인 가운데 다석을 흠모하는 분이 있어, 저는 예전에 그분을 통해 다석의 사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용어가 생경해서인지 다석의 사상이 쉽게 와닿지 않더군요. 그런데 이번에 빈섬이 쓴 《저녁의 참사람》을 통해 다석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녁의 참사람》은 빈섬이 아주경제에 연재한 글을 모아 다듬어 책으로 낸 것인데, 역시 기자인 빈섬이 독자들 눈높이에서 쓴 것이라 이해가 쉽네요.

 

그런데 빈섬이 언제 이렇게 심오한 사상을 자기 것으로 체득할 수 있었을까요? 빈섬이 다석 평전을 낼 수 있었던 데에는 다석의 생존 제자 박영호 선생의 공이 큽니다. 그래서 《저녁의 참사람》 책 표지에는 ‘박영호 공저 및 감수’라고 표시해놓았습니다. 저녁의 참사람 다석! 빈섬의 이 책을 통하여 사람들이 다석 류영모 선생을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양승국 변호사 yangaram@lawlog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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