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자의 아름다운 초상

  • 등록 2025.02.20 11:3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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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할 때면 아버지의 눈에 광채가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17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938년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 벅은 1963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소설로 펴냈다. 《살아 있는 갈대(Living Reed)>. 사실과 상상이 잘 버무려져 있다. 주인공 김일한은 진보 개혁 사상을 품고 있다. 그는 1883년 가을 조선 첫 방미사절단(‘보빙사’)의 고문격으로 동행한 바 있어 나라 밖 세상을 본 바 있다. 그의 부친과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보수주의자들이다.

 

 

펄 벅은 일한의 부친을 눈앞에 보이듯이 잘 그려낸다.일한이 둘째 아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하러 갔을 때의 장면이다.

 

“좋은 소식이다. 좋은 소식이야!”

노인은 소리쳤다. 쭈글쭈글한 주름살이 웃음으로 치켜 올라가고, 얼마 안 되는 회색 수염이 그의 턱 위에서 떨린다.

“네, 아이는 어제 아침나절에 났는데, 잘생겼고 튼튼하며 큰 놈보다 약간 작은 정도입니다. 외양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이의 귀를 생각하고 잠시 멈춘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재촉한다.

“그 애의 왼쪽 귀가 좀 온전치 못합니다. 사소한 흠입니다만…”

“김씨 가문에 흠이란 없느니라. 틀림없이 네 처가인 박씨의 혈통에서 온 것이겠지.”

노인은 단호하게 말한다.

일한은 화제를 바꾸려고 하나…

“말하자면…이 온돌 바닥도 단순히 걷거나 앉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따스하게끔……”

아버지는 자기 옆의 방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일한은 전에도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듣는다. 그의 아버지는 이씨 왕조의 발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지금은 어느 집에나 있는 온돌방은 옆에 붙어 있는 부엌보다 한 자는 더 높이 놓여 있다. 부엌의 아궁이로부터 다섯 개의 방고래가 벽 밑으로 해서 온돌방으로 뚫려 있다.

 

이 방고래 위를 가로질러서 구들장이 놓인다. 돌로 된 구들장 위로 다시 진흙을 얹고, 그다음에 모래와 회를 깐다. 다시 그 위에 종이를 바르는데, 마지막으로 바르는 장판이라고 하는 종이는 뽕나무로 만든 것이다. 장판은 매우 튼튼하고 질기다. 그 장판에 콩을 간 것과 들기름으로 콩댐을 한 뒤 말리면 방바닥은 미색을 띠며 매끄럽게 윤이 나고, 청소하기가 쉽다.

 

아버지가 온돌방의 칭찬을 마치면 그다음에는 히데요시를 몰아낸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서는 나라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연설이 시작된다. 과거 이야기를 할 때면 아버지의 눈에 광채가 보인다. 그리고 똑같은 자세를 취한 채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 그 여윈 얼굴에 고고하고도 오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몸을 꼿꼿이 세우고, 마치 무기를 든 것처럼 오른팔을 쳐들며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가 과거로 돌아갈 때는 목소리조차 바뀐다. 힘줄이 선 목에서는 젊은이 같은 힘찬 음성이 흘러나온다.

 

반나절 가량을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가 다시 이순신 장군으로 되돌아가, 장군이 어떻게 조선을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구해냈는지까지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정복된 적이 없느니라. 앞으로도 절대로 김 씨나 이 씨는 정복되지 않을 것이다.”부친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며, 윤이 반질반질 나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 여기서 그의 아버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옛 시를 읊는 것이다.

 

바람은 손이 없어도 초목을 뒤흔들고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달리노라

 

부친은 그렇게도 많은 이야기를 한 뒤, 자기 아들에게 할 말을 다 했다는 뜻으로 침묵 속에서 눈을 감는다. 일한은 아버지의 고개가 가슴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본 뒤에야 조용히 일어나서 방을 나선다.

 

 김선흥 작가

전직 외교관(외무고시 14회), 《1402강리도》 지은이

 

 

 

 

 

 

 

김선흥 작가 greensprout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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