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일본의 관동지역은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일본에서 고구려는 '고마'라고 발음한다. 반면 고려시대의 고려는 '코우라이'라고 함을 이해하고 읽어주었으면 한다.도쿄에서 1시간 거리인 사이타마현에는 1,3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마신사(高麗神社)가 있다. 이곳은《일본서기》에 보이는 고구려 약광(若光)을 모신 사당으로 고구려인들은 이 일대를 개척하여 비옥한 옥토로 만들었다. 668년 고구려 멸망과 함께 건너온 약광왕 일행을 떠올리는 땅이름과 약광왕을 모시는 신사와 절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가장 큰 규모로 남아 있는 고마신사(高麗神社)와 바로 옆에 있는 약광왕을 모시는 기도사찰 성천원(聖天院)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1시간 여 거리에 있는 승낙사(勝樂寺) 불장원(佛藏院) 등이 있다. 유서 깊은 관동지방의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여 소개한다. |
▲ 시골 간이역을 연상케 하는 주홍빛 기와지붕의 소박한 고마가와(高麗川)역 |
1월의 동경은 서울처럼 춥지 않다. 도심엔 동백과 산다화 꽃이 키 낮은 울타리가 되어 피어 있고 주택가 거리마다 팬지꽃 화분이 얼지 않고 색색으로 피어있다. 사이타마에 있는 고구려마을을 찾아 나서던 날도 서울의 봄 날씨처럼 따스했다. 신주쿠 역 플랫폼에서 JR사이쿄선을 기다리는 “한일문화답사단원”들은 먼 시간 여행을 떠나기라도 하는 듯 연신 열차 도착 시각표에 눈을 떼지 못한다. 아무렴, 고구려란 얼마나 먼 시간 속의 나라던가?
전철을 1시간여 달린 뒤 고마가와역(高麗川驛)에 내린 시각은 오전 11시가 채 안 된 시각이었다. 고마신사(高麗神社)에 미리 찾아간다는 약속을 해둔 터라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마가와역에 내리니 역 주변 안내도에 고마가와(高麗川)역, 고마고개(高麗峠), 고마천(高麗川), 고마본향(高麗本鄕), 고마마을(高麗の里), 고마향(高麗鄕)민속자료관 등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곳의 땅 이름이나 건물 이름에는 유달리 “고마”란 말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일본인들은 삼국시대의 고구려를 “高麗”라 쓰고 고마라 부르며 고려국(高麗國)은 “코우라이”라고 부른다. 이 지역에 ‘고려’ 땅이름이 많은 것은 이 일대가 고구려인들의 집단 주거지였음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 고마천역(高麗川)역에서 20여분 걸리는 고마신사 가는 안내판이 곳곳에 있어 찾기는 비교적 쉽다
우리 일행이 내린 고마가와역(高麗川)에서 20분 여분 거리에는 고마역(高麗)이 있다. 고마역과 고마가와역이 있는 이 광활한 평야에서 고구려인들은 신도시 개발 프로젝트의 주역으로 대활약을 했다. 1300여년이 지난 오늘날도 이곳에는 ‘고려신사’가 있고 ‘고려’라는 땅이름이 즐비하다.
재일사학자 김달수 씨는《일본의 조선문화, 日本の朝鮮文化》에서 일본인들이 고려“高麗”라고 쓰고 고마라고 읽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조선에는 단군신화가 있는데 여기에서 곰(gom)은 인내심이 많은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다. 곰을 뜻하는 일본어 ‘구마’는 고대 조선어 ‘고마’에서 간 말이며 고구려를 곰의 신화 나라라는 뜻에서 ‘구마-고마’로 인식하여 오늘날도 삼국시대의 고려는 고마이며 그 대신 고려시대는 고라이로 발음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곰 토템의 나라 고구려인 것이다.
▲ 고마신사 가는 길에 보이는 채소밭과 차밭, 한국의 농촌을 연상케 한다.
역에서 걸어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신사까지는 택시 외에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다. 이른 봄 같기도 한 사이타마 날씨는 구태여 비싼 택시를 타기보다 고마가와(高麗川)를 끼고 걷는 편이 운치가 있다. 황무지를 개척한 고구려인들의 기상과 용맹을 더듬으며 우리는 평범한 한국 농촌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다.
군데군데 고마신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잘되어있고 마을로 들어서는 2차선 도로변에는 무, 배추, 당근, 파 등이 그대로 자라고 있어 마치 우리네 농촌의 봄 풍경으로 착각하게 한다. 왠지 낯설지 않은 것은 이곳이 고구려의 후예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다간 곳이기 때문이리라. 한여름에는 동네 사람들이 나와 더위를 식히는 곳 고마가와(高麗川)는 겨울이라 그런지 물줄기가 마치 좁은 도랑 같이 흐르고 있었지만 상류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것이 마치 옛 조상들의 혼과 넋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 고마신사 옆을 흐르는 고마가와(왼쪽), 고마가와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있는 제2주차장에는 고마가와역으로 가는 안내팻말을 세워 놓았다.
“머나먼 2천 년 전 유구한 세월 동아시아에 일찍이 국가를 형성했던 고구려. 여러 나라들의 맹공을 저지하는 강국이면서도 예술과 문화 영지(英知)룰 남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아름다운 나라. 먼 이국땅에서 넘어온 왕족 고구려왕 약광(高麗王 若光)을 모시며 천삼백 년의 긴 역사를 새겨온 고마신사(高麗神社)에 아름다운 나라의 숨결이 들려온다,”
▲ 고마신사 들머리(입구), 장승 뒤로 도리이가 보인다. (왼쪽)고마신사가 출세신사로 유명해진 유래를 적은 안내판
이 글은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자리한 고마신사에서 만든 《고마신사와 고마향》 한글판 안내 책자에 나온 말이다. 전 궁사(宮司, 신사의 최고 신관 지위) 고마스미오(高麗澄雄)의 정정한 사진을 1쪽에 실은 이 책자는 고구려 역사의 유래와 고마신사에 모시는 고구려왕 약광(高麗王 若光)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또한, 고마씨족의 계보와 전해 내려오는 문화재 등을 깔끔한 사진과 함께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처리해 신사를 찾아오는 한국인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이는 일본 내의 한국 관련 다른 신사에 비해 파격적인 홍보 방법이며 그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미리 방문 약속을 한 덕에 우리가 고마신사에 도착했을 때는 명함에 ‘고려군 건군(建郡) 1300년 기념사업개최 고려신사’라는 긴 글과 함께 ‘사사(社誌)편찬위원회 주임조사원’이라는 직책을 써 넣은 요코다(横田稔)씨가 신사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코다 씨는 서른이 될까 말까 한 젊은 사람으로 인상이 서글서글해 보인다. 맨 먼저 신사입구 도리이가 있는 곳부터 차근차근 쉬운 일본말로 설명을 해주는 배려심이 곱다.
▲ 고마신사를 방문한 사람들의 이름표, 최규하 전 대통령도 보인다(붉은 표시)
출세개운, 가내안전, 사업번창, 합격기원, 교통안전, 7·5·3참배 (일본엔 아기의 돌잔치가 없는 대신 7살, 5살, 3살 때 신사참배를 한다.), 액막이 기도 등은 일본 신사의 중요 업무이지만 특별히 신사마다 용하다고 알려진 신사특유의 전문분야(?)가 있는데 예를 들면 합격기원에 용하다는 학문의 신 스가와라미치자네를 모시는 텐만궁(天満宮)이라든지 연애성사의 신사로 연인들에게 인기있는 기요미즈데라(靑水寺) 안의 지주신사(地主神社)처럼 일본의 각 신사는 나름대로 자기들의 용한 점을 부각시켜 참배객을 모으고 있다.
그렇다면, 고마신사가 내거는 것은 무엇일까? 요코다 씨는 우리를 맨 먼저 신사 입구 왼쪽에 이름표가 주욱 걸린 곳으로 안내한다. ‘참배자 명사 방명’이란 한자말이 선명한 까만색의 명패에 일본인과 한국인 이름들이 즐비하다. 근래에는 배우 최수종 씨도 다녀간 기록이 있고 거슬러 올라가면 최규하 전 대통령 이름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일본 하토야마(鳩山由紀夫) 수상은 부자지간에 이 신사에 참배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요코다 씨는 하토야마 수상 아버지가 이곳에 다녀갔기 때문에 하토야마가 수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은근히 출세신사의 본거지인 고마신사 자랑이 뜨겁다. 그러면서 “여기 다녀가시면 자녀가 출세합니다.”라고 한 수 거든다. 누구든 요코다 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어질 것 같다.
자식의 출세만 한 큰 행운이 어디 있으랴! 순간, 대학을 나오고도 변변한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수많은 한국 청년들이 떠오른다. 만일 한국에도 고마신사 같이 출세를 보장(?)해준다고 하는 곳이 있으면 그곳이 절이든 교회이든 갓바위이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일본의 신사는 발 빠르게 시대의 아픔을 간파하고 선전함과 동시에 그들을 불러 모아 마음을 위로하고 장래를 밝게 예언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한 신사에 일본인들이 몰려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 한 일인지 모른다.
아무에게도 털어낼 수 없는 아픔이 가슴 속에 응어리질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하는 일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이든 자비로운 부처님이든 그 대상이 그 무엇이든 중요치 않다. 그저 간절히 냉수 한 그릇이라도 떠놓고 정성을 다한 기도는 효험이 있는 법이다. 이럴 때 찾아와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고 액막이 기도를 해줄 뿐 더러 출세 길을 열어준다면 이 얼마나 금상첨화란 말인가? 고마신사는 그런 곳이다. 출세를 보장해주는 신사로 일본인들 사이에 유명한 곳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고마신사인 것이다.
▲ 전 궁사 고마 스미오 씨, 고마신사를 방문한 이방자 여사(1942. 11. 22), 고려왕 약광에게 왕의 성을 내린다는 《속일본기》, 13세기 대반야경 456첩(국가지정 중요문화재)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고마신사에 모셔진 약광은 고구려 왕손
▲ 고마신사 본당으로 안에는 고구려 약광왕이 모셔져있다
그렇다면 고마신사에 모셔진 약광(若光、じゃっこう、쟉코)은 누구인가? 《일본서기》에 이위현무약광(二位玄武若光)이라는 이름이 보이는 데 이분이 바로 고마신사의 주인공 약광왕이다. 일본이 7세기 중반 대화개신(大化改新) 이후 율령국가를 형성할 무렵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패권 다툼을 하고 있었고 그러는 가운데 신라는 당과 손을 잡고 663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뒤이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한반도의 많은 망명객이 이웃 일본 땅에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 고려씨 계보도, 1259년 원본이 불타자 후손들이 자료를 모아 다시 만들었다.
《일본서기》 천지 5년 겨울조(天智5年冬条)에는 “백제 남녀 2,000명이 동국에 살았다. 승속을 가리지 않고 3년간 정부로부터 녹읍을 하사받았다.”라는 기사가 보이며 천무 13년 5월조(天武13年5月条)에는 “귀화한 백제 승속 23명을 무사시국에 이주시켰다.” 또한 지통 12월조(持統12月条)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백성 62명을 받아들였다.”라는 기록을 볼 때 어지러운 한반도 정세를 피해 일본 땅으로 건너온 한계(韓系) 조상의 이동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왕 약광도 이 무렵 일본 땅을 밟았다. 당시 한인들의 이동을 《일본서기》에서는 귀화(歸化), 화래(化來), 화귀(化歸), 흠화(欽化) 같은 말로 표기하고 있다.
특히 《속일본기》에는 고구려인 1,799명을 오늘의 관동지방인 무사시국에 이주 시키고 이곳에 고구려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드넓은 관동지방 일대에는 가는 곳마다 고구려와 신라 지명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관동지방은 한인들의 독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때 관동지방은 사가미국(相模國), 무사시국(武蔵國), 히다찌국(常陸國)을 포함하여 8국으로 나뉘었으며 이는 오늘날의 도쿄도(東京都)를 포함한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사이타마현(埼玉県) 등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고구려인 1,799명이 안착한 무사시노(武藏野) 지방의 고구려군 우두머리는 고마신사의 주인공 약광이다. 《속일본기》 703년 4월조에 “종 5위 이하 고구려 약광에게 왕의 성을 내린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각 가문을 규정하여 야마토 조정이 수여하는 칭호로 왕이라는 것은 외국의 왕족 출신자에게 주는 성이다.
여기서 무사시노(武蔵野)란 말의 유래를 잠시 살펴보면 “무사시”는 한국어 “모시 씨” 곧 모시풀의 씨앗에서 나왔다고 재일 사학자 김달수 씨는 풀이한다. 그는 도리이(鳥居龍藏) 씨가 쓴 《무사시 및 그 주위》를 들어 “무사시란 지명은 한국어의 모시 씨를 의미하며 맨 처음 모시 씨를 심었던 그곳의 이름이 점차적으로 퍼져 마침내 넓은 무사시의 지명이 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고구려인들이 모시 씨를 가져와 심고 직물업을 발달시켰던 흔적은 1,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지명에 남아 있는데 도쿄 도심에서 남동부 쪽으로 20여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쵸후시(調布市)와 후다(布田)의 “포(布)” 자는 직물 산업을 하던 흔적이며, 이 밖에도 소메치(染地) 등 지명에 보이는 “염” 자도 이를 입증해주는 좋은 자료다.
고구려 왕 약광은 고구려인의 빼어난 기상으로 황량한 황무지를 개척하여 비옥한 옥토로 만들고 모시 등의 직물 산업을 일으켰으며 드넓은 무사시노 벌판은 말을 키우는 목장을 만들었다. 여기서 기른 군사용 말은 훗날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무사 태동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이렇게 이주민의 정착과 산업을 일으켜 생활기반을 닦아준 약광은 백성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으며 그가 죽자 그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고마신사의 제신(祭神)이 바로 약광인 것이다.
고마신사는 고려(高麗)씨 자손이 대대로 궁사(宮司)를 맡아온 일본에서 보기 드문 신사이다. 고려씨계도에는 약광의 후예가 걸어온 길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려신사는 14대인 일풍(一豊, 996년) 시대에 대궁이란 칭호를 받아 일본 대사원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고 22대인 1146년까지 대궁사라는 칭호로 불리었다. 이후 26대까지는 고구려인 자손끼리만 혼인을 하다가 27대 풍순(豊純, 1242년) 때에 고구려인이 아닌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源賴朝) 집안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막부의 후원을 받게된다. 하지만, 이내 권력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1352년에는 고려 씨 가문의 토지가 몰수되는 등 한때 폐망의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 궁사들이 살던 고구려가옥(위)과 그 안의 이모저모
이후 행고(行高) 때에 “우리 가문은 수험도이므로 앞으로 전쟁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라는 선언을 하고 싸움으로 일세를 풍미하던 사무라이 정권에서 중립을 유지했다. 수험도란 일종의 재래종교로서 일본 고유의 신앙이다. 7세기 역행자(役行者)에 의해 창시된 재래종교로 각지의 영산을 수도장으로 삼아왔으며 고려씨족들은 헤이안 시대 말부터 명치 때까지 34대에 걸쳐서 수험도를 신봉하면서 영산기도들을 통해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 하지만, 1868년 명치유신에 의해 수험도가 금지되자 고마신사의 신관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고려 씨들은 38대부터 교육에도 힘써 자신의 집을 서당으로 활용하여 마을 사람들을 교육 시켰다. 특히 56대손인 고려대기(高麗大記) 씨는 메이지 초기 근대학제가 공표되자 고려교육 심상소학교를 설립하여 초대교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고려 씨는 마을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흙 부엌 바닥 한켠에는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가 있으나 한국처럼 온돌과 연결된 아궁이가 아닌 것으로 보아 고구려후예들은 따뜻한 온돌방을 잊고 오랜 세월 일본 땅에서 일본식으로 살아가느라 애썼을 것만 같았다.
▲ 고구려음식 전골행사 안내문
고려신사의 전반적인 설명을 듣고 나오는 참도길(參道, 신사로 들어 가는 길)에는 조선의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이은)과 이방자여사가 1942년 손수 심었다는 삼나무가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상당수 일본 내 한국계유적과 지명들이 애초부터의 이름을 잃고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는 반면 사이타마의 고마신사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고구려의 아슴푸레한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명치정부 때 한국계 유적과 흔적 지우기에 앞장섰던 명치 정부에 협력한 결과 “고려”라는 이름을 보존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며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명치 정부 때 가나가와현의 오이소(大磯)에 있는 고려신사(高麗神社)가 다카쿠신사(高來神社)로 바뀌는 운명을 맞이한 데 비해 이곳 고려신사는 지금껏 이름을 그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전화위복인지도 모른다. 시대의 아픔이 일본 땅 곳곳에서 물감처럼 묻어난다.
2010년 고려신사에서 특별히 기획하고 있는 여러 행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월 1일 새해 첫날 신사참배
1월 24일 고려나베 (일본음식 "나베"란 김치찌개처럼 국물이 있는 음식을 말한다. 일종의 고구려 음식 전골행사이다.)
4월4일 벚꽃놀이 축제
5월16일 고구려군(郡)건설기념일
6월20일 도래인마을 강연회
9월11일~26일 고구려문화 페스티벌
9월 19일 마당놀이
11월1일 ~10일 국화 축제
요코다 씨의 친절한 안내를 뒤로하고 준비해간 한국 전통과자를 건네며 막 도리이를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간누시 곧 신관(神官)이 총총걸음으로 도리이를 향해 걷는 모습이 보인다. 쫓아가 말을 거니 잠시 후에 보자며 유창한 한국말을 건넨다. 그가 바삐 걸어간 곳은 도리이 바로 앞 주차장에서 좌석 비닐커버도 안 벗긴 승용차 앞이었다. 간누시가 도착하자 중년의 부부가 간누시를 향해 합장한다. 미리 약속을 한 듯 간누시는 새 차의 교통안전을 위한 기도를 집행하며 차 안과 밖의 마귀를 쫓아내는 의식을 집전하고서 부부를 보내고 우리 쪽으로 걸어와 자신을 우메다(梅田)라고 소개하면 인사를 건넨다.
▲ 궁사가 새로 산 차의 안전을 빌어 주는 하라이(祓い)의식을 하고 있다.
우메다 간누시는 듬직한 모습이었는데 일행과 함께 담소를 나눈 뒤 같이 사진까지 찍어주는 친절을 보였다. 일본의 다른 신사에서 보던 간누시의 고자세와는 사뭇 다른 친근함이 비록 성씨는 일본인이지만 고구려의 먼 후손인 것만 같아 살갑기까지 하다. 도리이를 빠져나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고마신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구려왕 약광의 무덤이 있는 성천원(聖天院)이다.
*자료인용 시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글쓴이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
*찾아가는 길*
1. 고마신사(高麗神社) :고구려 약광왕을 모시는 신사
신주쿠(JR사이쿄센,55분)- 가와고에(JR가와고에센,20분) -고려가와역에서 내려 도보 20분 또는 택시 5분 거리
* 다음 <2>에서는 고마신사와 관련된 성천원과 불장원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