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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행복은 덧셈이 아니고 분수(分數)다

유발 하라리의 행복론과 불교의 행복론
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26)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밤 12시 30분(오전 0시 30분)에 델리공항을 출발하였다. 8시간을 비행하고 시차를 적용하면 인천공항에 3월 1일 오전 12시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사피엔스>의 마지막인 제4부를 읽었다. 제4부의 소제목은 과학혁명이었다. 여러 내용 중에서 특히 유발 하라리의 행복론이 관심을 끌었다.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저자는 행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궁금했다.

 

 

수천 년 전부터 예언자, 시인, 철학자들은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가지는 것보다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현대의 여러 연구 조사 결과에서도 수많은 숫자와 도표의 뒷받침을 받아 옛 사람들과 똑같은 결론이 나온다. 하라리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하라리는 이렇게 썼다.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 기대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이 손수레를 원해서 손수레를 얻었다면 만족하지만, 새 페라리(고급 승용차)를 원했는데 중고 피아트 밖에 가지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낀다.” 새로울 것이 없는 행복론이었다.

 

내가 이해한 행복론을 조금 달리 표현한다면 “행복은 덧셈이 아니고 분수(分數)다”고 말하고 싶다. 곧 행복은 소유물이 많아질수록 커지는 것이 아니고 소유물이 적더라도 기대가 적으면 얼마든지 만족하고 따라서 행복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하라리가 지적한 것 중에서 소개할 만한 것은 “행복은 소유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행복이란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것이지 외부의 소유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합리성을 추구하여 과학기술의 발달을 주도한 서양 사람들이 20세기에 동양의 종교인 불교를 접하면서 인간 내면의 영역, 마음의 영역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라리는 지적하였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서양 위주의 세계사를 배워왔다. 서양의 문물이 동양보다 우세하여 서양의 제국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북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를 만들 수가 있었다고 배웠다. 서양 사람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에 그들은 총과 대포를 가진 군대와 함께 선교사를 데리고 왔다. 선교사들은 성경을 들고 와서 기존의 토착 종교를 우상숭배라고 비하하고 새로운 종교를 믿으라고 설득하였다.

 

기독교인이 되면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유일신이 다른 종교의 신보다도 우월하다고 은연중에 믿게 된다. 아직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불교는 부처라는 우상을 믿고 우상에게 절하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불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이전에 나타났다. 불교의 가르침 또한 기독교에 견주어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양 사람들이 불교를 알게 된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지적한 학자도 있다.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1889~1975)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였다. 옥스포드대 교수였던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학술회의에서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많은 학자들과 학생, 언론인이 참석했다. 연설이 끝나자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다.

 

"아놀드경, 당신은 오늘날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만약 미래에 그러니까 200, 300년 뒤 역사가들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무엇을 꼽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차 세계대전... 나치정권 히틀러의 대량학살일까요, 아니면 공산주의의 몰락 또는 여성 인권의 신장인가요? 우리 시대의 최고의 사건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러자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다.

"동양의 불교가 서양으로 건너온 일이지요."

 

왜 불교가 서양으로 건너온 일이 가장 세기적인 사건이라고 토인비는 말했을까? 불교의 행복론은 서양 사람들이 생각해 온 행복론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소유를 줄이고 욕심을 줄이라.”는 행복론과도 다르다. 불교에서는 집착이 고통을 유발한다는 것이 대전제가 된다. 집착에서 벗어나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집착은 양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소유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적은 소유라도 집착을 하게 되면 여전히 번뇌와 고통은 남는다. 중요한 것은 소유의 양이 아니고 소유에 대한 집착이다. 욕심을 줄이는 것이 행복이라고 해도 우리가 욕심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면 여전히 고통은 남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방향의 집착을 끊어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불교의 관점을 잘 나타내는 것이 법구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사랑하는 자도 갖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자는 만나지 못함이 괴로움이요,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만남이 괴로움이다.

 

집착이 양방향이라는 것을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어떤 부자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착한 행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고아를 돕고, 가난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불하고, 복지재단에 기부를 많이 하고,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고, 등등. 이러한 행동은 분명히 선하고 좋은 행동이지만 불교의 관점에 의하면 “좋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조차도 집착이라는 것이다. 선한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보면 그것도 집착이 되고 따라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면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의 경지는 어떠한 상태일까? 필자로서는 알 수 없는 세계이다. 오직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2017년에 발간된 《한국인을 위한 달라이 라마의 인생론》에서 ‘전체를 보라’는 제목의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좁게 봄’에 있습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면 그 속에서 편견이 생기고, 결국 편견이 진리를 보는 눈을 가려서 사람을 극단으로 몰고 갑니다.”

 

나는 이 글귀를 읽으면서 투철한 애국심으로 매주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나의 초등학교 동창생 친구가 생각났다. 그렇다. 세상을 좁게 보는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대롱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늘의 일부만을 볼 것이다. 하늘 전체를 보려면 대롱을 치우고 하늘을 바라보면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롱을 버릴 때에 우리는 자유인이 되어 넓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쉽게 버리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들고 있는 대롱은 집착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는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집착을 버리면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집착을 버리고 세상을 바라보면 성철 스님의 유명한 법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이 순풍이 불었나 보다. 8시간으로 예정된 비행시간이 짧아졌다. 비행기는 3월 1일 오전 11시 15분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