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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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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3.1운동 주역 '김반수 지사' 발자취를 찾아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 <부산진일신여학교>

[신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9일) 항일여성독립운동가 김반수 지사가 다니던 부산 좌천동에 있는 옛 부산진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전신)를 찾았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고 있는 이 학교는 경사진 높은 언덕에 있었는데 밑에서 걸어 올라가기가 힘에 부칠 정도로 가파른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126년의 역사를 지닌 부산진교회와 마주보고 있는 아담한 건물의 옛 부산진일신여학교(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 마당에 서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경사진 언덕 밑에서 바라다볼 때 우뚝 솟아 보이는 2층짜리 건물은 막상 올라가보니 외로운 섬처럼 달랑 건물 하나만 남아 있었다. 예전에 학생들이 뛰어 놀았을 운동장도 있었을 법한데 모두 주택과 교회 부지로 바뀌어 버렸고 지금은 쓸쓸한 건물 한 채 앞에 ‘부산진일신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라는 팻말 하나만이 세워져 있다. 마당에 느티나무 고목 한그루는 당시 소녀들의 함성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낙엽을 떨군 채 서있었다. 마당이 하도 적어 옛 일신학교전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기념관을 찾은 시각이 낮 12시였는데 아뿔사, 점심시간이라 1시까지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근처에서 무료한 시간

항일독립 문화유산 「안규홍ㆍ박제현 가옥」 문화재 된다

「곡성 성륜사 안심당ㆍ육회당」 등 7건도 함께 문화재 등록 예고

[신한국문화신문=한성훈 기자]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보성 안규홍ㆍ박제현 가옥」, 항일독립 문화유산 1건과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곡성 성륜사 안심당ㆍ육화당」, 「원주 모리스 선교사 사택」, 「원주 육민관고등학교 창육관」, 「원주 제1야전군사령부 구 청사」, 「태안 동문리 근대한옥」,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제대 및 세례대」 등 조두 7건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였다. 이번에 등록 예고된 「보성 안규홍ㆍ박제현 가옥」은 일제에 항거하여 나라에 헌신한 공로로 머슴과 주인이 함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유일한 곳으로, 한말 호남의병의 대표적 머슴 의병장이었던 안규홍(安圭洪, 1879~1910)과 안규홍 의병부대의 군량관이었던 박제현(朴濟鉉, 1871∼1909)이 살았던 보성군 법화마을에 있는 주거지이다. 안규홍 의병장이 약 20여 년간 담살이(머슴)를 했던 사랑채와 안규홍 의병부대에 군자금과 군수품을 지원했던 박제현의 안채가 원형대로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한말 의병장들의 생가나 주거지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애국선열의 독립정신을 선양할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의 가치가 높은 곳이다. * 독립운동가 생가: 정읍 나용균 생가와 사당(등록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개척자 "채상덕 선생"

국가보훈처가 뽑은 10월의 독립운동가

[신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채상덕(蔡相悳,1862~1925) 선생은 황해도 출신으로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일제 침략으로 조선이 강점되자 남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2월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비롯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광한단(光韓團)·보합단(輔合團) 등 각 군단의 대표들이 관전현(寬甸縣)에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회의를 거듭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채상덕 선생은 최고 책임자인 총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선생과 함께 통군부에서 활동한 인물들로는 비서장 고활신, 민사부장 이웅해, 군사부장 이천민, 교육부장 김동삼, 실업부장 변창근, 사령관 김창환, 경무감 전덕원 등을 들 수 있다. 대한통군부가 성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운동이 다시 전개되어,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가 개최된 결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선생은 부총장으로 활동하였다. 총장은 김동삼 선생이었다. 1923년 2월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자 선

서울토박이 독립운동의 자존심 김상옥 의사께 -박진호

[백년편지 273]

[신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상옥 의사님은 해방 후 어떤 민족의 모습을 꿈꾸셨나요? 저는 1919년도 혁신공보 34호 6월29일자 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의 취임연설을 읽으며, 평할아버님이 생 실천 해 나가신 독립운동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 : 우리가 우리 주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위에 모범적인 공화국을 세워 이천만으로 하여금, 천연의 복락을 누리려 함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희생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여야 하겠오.) 새벽이면 낙산에 올라 소나무에 태극기를 다시던 마음과 동대문 교회의 믿음 생활 속 함께하신 말씀은 이사야서 50장 10절 이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종의 말에 순종하느냐? 빛이 없이 어둠 속을 걷는 자는 주님의 이름을 신뢰하고 자기 하느님께 의지하여라." 그렇습니다. 저는 할아버님의 마음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헤아려 보려고 노력 해 왔습니다. 저는 김상옥 의사님의 형님의 딸 김간난의 첫째 외손주 박진호입니다.할아버님의 마음, 독립운동가의 심정을 시 한편으로 써 봤는데 이 시의 마음이 잘 전달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시한편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둠을 만날 때 박

“이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백년편지] 우당 이회영 선생님과 6형제 어르신들께 -홍석천-

[신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거나 무정부주의자로 사상을 전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우리나라의 독립에 관하여 실현하려 노력하는 나의 생각과 방법이 현대사상의 견지에서 보면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상통하기 때문에 남들이 그렇게 보는 것이다. …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알맞은 제도와 조직과 구조를 생각해야 했고 그 결과 얻어진 것이 이것이니, 나의 이 사상은 일관된 것이며, 나의 독립운동의 방향이라고 나는 믿는다. … 나는 사심 없이 공정한 민족적 양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와 같은 주장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무정부주의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무정부주의 운동이어야 할 것이다. … 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 (아나키즘이) 가장 실제적인 이론이며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사실상 모든 운동가들이 자기 사상이야 어떠하든지 이미 무정부주의 자유연합의 이론을 다 같이 이대로 실행하고 있다. 기미년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에 소속된 운동가가 자신의 자유의사의 결정에 의지하지 않고 강제 명령에 무조건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

항일민족교육자 윤윤기 따님 윤종순 여사를 만나다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5]

[신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중학교 1,2학년은 다니지 못하고 3학년으로 들어가 1년 다니고 졸업을 했지요. 아버지가 6.25때 보성경찰서에 끌려가 51살의 나이로 학살당하실 무렵 저는 겨우 9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막내 동생을 임신 중이셨으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지요. 저는 또래 애들이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학교에 다닐 때에 신문팔이, 비누장사, 식모살이 등을 하느라 제대로 교육을 받을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그래도교육가이셨던 아버지를 떠 올리며 이를 악물고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장흥중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3학년에 편입해 달라고 당당히 말했지요. 간단한 테스트를 거쳤지만 충분히 3학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판단 했는지 교장선생님은 저를 3학년에 편입해주셨습니다. 그때는 그런 융통성이 있었습니다. " 이는 항일민족교육자인 학산 윤윤기(1900.7.9~1950.7.22)선생의 둘째 따님인 윤종순 여사(76살)의 말이다. 윤 여사는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교장선생님의 권한이 컸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비명에 가셨지만 저는 중학교 졸업장을 따야겠다는 생각에서무작정 초면의 교장선생님을 찾아 간

여성독립운동가의 삶, 충북여성장애인들과 함께 이야기하다

[신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이곳은 충북여성장애인연대입니다만 우리회원들을 위해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까?” 리산은숙(전, 여성장애인 성폭력상담소장) 씨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지난 8월 24일이었다. 강연일은 1주일 뒤인 8월 31일. 한 달간 일본에서 머물다 막 귀국한 터라 처리할일이 쌓여 청주까지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여성장애인’ 들에게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려주었으면 하는 말에 선뜻 대답을 했다. 그리고 어제 31일(목), 오전 10시 30분, 강연장에 들어섰다. 40여명 되는 여성 장애인들이 빼곡히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장애 정도가 심해 보이는 분들이 꽤 눈에 띄었다. 아뿔사! 준비해온 이날 강연 자료가 혹시 이분들에게 어려운 내용이아닌가하고 내심 걱정했다.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1시간 30분 주어진 시간 동안 원래는 40분하고 10분 쉬고 다시 40분을 해달라고 주문했지만 참석자들의 강연을 듣는 태도가 너무나 진지하여 쉬지 않고 내리했다. 수많은 곳에 강연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강연태도가 진지한 곳은 보질 못했다. “저는 지체장애자로 학교 공부를 많이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오늘 강연을 듣

국가도 외면한 전국 유일의 장흥 안중근 사당

순흥안 씨인 안중근 사당, 죽산 안씨가 60년간 지켜오다

[신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스스로 잘난 체 하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 -孤幕孤於自恃(고막고어자시)-” 안중근(1879~1910) 의사를 모신 국내 단 한 곳의 사당인 해동사(海東祠)안에는 안 의사의 심지 곧은 마음이 드러난 유품 몇 점 만이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국내 유일의 안 의사를 모시는 사당이 전라남도 장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26일(토), 서울에서 부랴부랴 달려갔다. 그간 기자는 안 의사의 유적지를 쫓아 거사 현장인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과 그곳에 들어선 안중근의사 기념관 그리고 거사 뒤 처음으로 잡혀갔던 일본영사관 건물과 자신이 죽으면 뼈를 묻어 달라던 하얼빈공원(현 조린공원)의 "청초당" 이란 돌비석을 세운 자리까지 찾아다녔지만 국내에 안중근 의사를 모신 사당이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부끄러웠다. 출발에 앞서 길찾개(네비게이션)에서 해동사(海東祠)를 찾으니 뜨질 않았다. 간신히 알아낸 정보를 통해 죽산 안씨 사당인 만수사 (萬壽祠,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길 25-121)에 안 의사를 모신 해동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극비스런(?) 정보를 준 사람은 장흥의 향토사학자 안명규 씨였다. 안중근 의사 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