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최근 언론에는 “29일 청와대에 봉황기 게양…대통령실 명칭 '청와대'로 변경”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 ‘봉황기’란 대한민국 국가수반을 상징하는 깃발로, 대통령의 주 집무실이 있는 곳에 상시 게양해 놓습니다. 따라서 용산에서 대통령의 집무실을 청와대로 옮기면서 용산에 걸려있던 ‘봉황기’도 함께 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조선시대 임금의 지휘권을 상징하는 의장기로 황룡대기(黃龍大旗)라고도 부르는 크기가 4m에 가까운 ‘교룡기(交龍旗)’가 소장돼 있습니다. 임금의 의장 행렬 맨 앞에 배치되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고, 임금이 전체 행렬을 움직이고 통솔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어가행렬에서 말 탄 장교가 깃대를 받들고 그 주위에 네 명의 군사가 깃대에 연결된 끈을 잡고 나아가지요. 옥색 직물 바탕에 5개의 발톱을 갖춘 황룡 두 마리가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여백에는 구름무늬를 가득히 채워 그렸고 깃발의 테두리는 붉은색 화염각(火焰脚, 불꽃 모양의 갈기)을 붙였습니다. 정조의 <화성원행도(華城園幸圖)> 그림에도 보면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부분 가운데 이 교룡기가 보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가 태어난 성탄절 전날입니다. 그런데 이 구세주 신앙이 우리나라에서는 미륵신앙이 됩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56억 7,000만 년이 지난 미래의 사바세계(중생이 갖가지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이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님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미륵불 신앙과 관련된 기록이 있을 정도였는데 오랫동안 백성들의 희망 신앙으로 받아들여 폭넓게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 가면 친근한 모습의 돌미륵들을 쉽게 볼 수 있지요. 또한 고려말에는 바닷가 개펄에 향나무를 묻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는데 이도 역시 미륵신앙의 하나였습니다. 당시 자주 출몰하던 왜구 때문에 고통받던 백성들이 침향을 정성으로 준비하여 바닷가에 묻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미륵불이 오시기를 빌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서양에서는 성탄절 신앙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미륵불 신앙으로 많이 닮았습니다. “궁예(弓裔)는 호를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금모자를 쓰고 몸에는 네모난 가사를 입으며 큰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이라 하고 나아갈 때에는 비단으로 장식한 백마를 타되 어린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905년 오늘(12월 21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초대 통감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 하얼빈역에서 독립투사 안중근이 쏜 총에 사살되었지요. 이는 대한제국 침탈의 원흉에 대한 응징이었습니다. 이토는 일본의 조선 침략 정책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는데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고려청자 장물아비였다고 합니다. 1906년에 서울에 왔던 미야케라는 일본인이 쓴 회고기 <그때의 기억-고려고분 발굴(도굴)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예술적인 감동으로 고려청자를 모으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대개는 일본으로 보내는 선물감으로 개성 인삼과 함께 사들이는 일이 많았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매우 많은 수집을 한 사람이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점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런데 고종임금도 이토 히로부미가 고려청자를 보여주자, 이 나라엔 없는 물건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조선사람들은 고려청자를 몰랐습니다. 조선사람들은 조상의 묘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기에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