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몇 해 전에 우리나라에서 요구한 대장경(大藏經) 인쇄판을 귀국에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절과 신사(神祠)에 비치해 둘 것이 없습니다. 이제 귀국의 사신이 돌아가는 배에 부탁하여 한 질을 청구하오니, 반드시 7천 권을 모두 갖춘 인쇄본으로 부쳐 오면 백마(백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어 맹세한 것)의 지난 일을 금오(金烏) 해가 돋는 곳에서 거듭 보게 되겠습니다. 이웃나라의 변하지 않는 서약이 어떤 일이 이와 같겠습니까.“ 위는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1443년) 11월 18일 기록으로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장경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음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국보인 《팔만대장경》은 목판본이 6,815권으로 모두 8만 1,258매이며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은 몽골의 침입 때 불타버린 뒤 1236년(고종 23) 만들기 시작하여 1251년 9월에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기로 유명합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우왕 14년(1388) 포로 250명을 돌려보내 주면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올해에 낸 문제가 혹 다음 해에 나오기도 하고, 서울에서 출제한 것이 혹 지방에서 나오기도 하며, 유생이 사사로이 지은 문제가 역시 국시(國試)에서도 나올 수 있어서 혹 남의 작품을 외웠다가 합격하는 자도 있고, (가운데 줄임) 또 과장이 엄격하지 못해 무뢰배가 요란하게 밟고 다니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갖은 수단으로 엿보고, 책을 끼고 들어와 답안을 대신 써주므로 공부하는 자가 이 탓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 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위는 《명종실록》 8년(1553) 6월 9일 자 기록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조 18년(1794)에는 "손으로 붓 잡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분수없는 생각을 가지고 함부로 과거에 응시한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 응시생인 양반집 자제들은 과거장에 여러 명의 조수를 데리고 들어가는데 글을 짓는 '거벽(巨擘)', 글씨를 써주는 '서수(書手)'가 따라 들어갑니다. 정작 과거를 보는 사람은 손도 까닥 안고 대리시험을 보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좋은 자리를 먼저 잡고 답안지를 다 쓰면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답안지를 대신 내주는 '선접군(先接軍)'이 있었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성을 쌓는 데에 든 비용이 거의 80만에 가까운데, 소중한 역사를 조금이라도 구차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본래 생각이었다. 이 책을 간행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성의 공사에 관한 본말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1796년) 11월 9일 기록으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을 펴냈음을 날리고 있습니다. 《화성성역의궤》는 조선시대 화성유수부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 ‘화성(華城)’을 쌓은 경위와 제도ㆍ의식을 기록한 책입니다. 정조 18년(1794) 1월부터 정조 20년(1796) 8월에 걸쳐 쌓은 화성성곽은 큰 토목건축 공사로서 많은 경비와 기술이 필요하였으므로, 그 공사 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야 하겠다는 뜻에서 정조가 김종수(金鍾秀)에게 명을 내려, 1796년 9월에 시작하여 그해 11월 9일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1801년(순조 1) 9월에 인쇄하였습니다. 화성성곽은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무덤을 1789년(정조 13) 10월 화산(花山: 지금의 융건릉)으로 이장한 뒤 3년에 걸쳐 쌓은 곳으로, 전체 길이 5.4km가량의 조선시대 축성기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