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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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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예방하려면 종이를 말아 코에 넣고 재채기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45]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 전염병이 돌면 바빠지는 관청은 병든 도성 주민의 치료를 담당하던 활인서(活人署)였습니다. 이 활인서는 고종 때에 근대 의료시설로 재탄생하면서 광혜원이 되었고, 곧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요. 활인서는 원래 1392년 태조 1년에는 고려의 제도에 따라서 동ㆍ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두어 병자와 갈 곳이 없는 사람을 수용하여 구조하였습니다. 그리고 1414년(태종 14)에는 동ㆍ서대비원을 동ㆍ서활인원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세종실록》 지리지 한성부조(漢城府條)에 보면 동활인원은 동소문 밖에, 서활인원은 서소문 밖에 두어 도성내의 병자와 오갈 데 없는 사람을 치료하고 의식(옷과 먹거리)을 지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어서 1466년(세조 12) 동활인원과 서활인원을 통합하여 활인서로 고쳤습니다. 그러나 활인서 따위 기관이 있었어도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질병 예방법도 원시적인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세종실록 16년(1434) 6월 5일 기록에 있는 내용들을 보면 질병예방법으로 “새 베로 만든 자루에 붉은 팥 1되를 담아 우물 안에 담갔다가 3일 만에 꺼내어 온 식구가 27알씩 복용한다.”, ”날마다 이른 아침에

오늘은 박재혁 애국지사가 부산경찰서장을 처단한 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44]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박재혁(朴載赫, 1895~1921) 애국지사가 부산경찰서 하시모토 서장에게 폭탄을 던져 처단한 날입니다. 박 지사는 부산공립상업학교 학생 시절부터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최천택, 김병태, 박홍규 등과 함께 대한제국에서 펴낸 보통학교 국사 교과서인 《동국 역사(東國歷史)》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하였습니다. 또 1913년에는 최천택, 김병태, 박홍규, 오택(吳澤) 등과 구세단(救世團)을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단보를 발행하여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 배포하였으며, 이러한 구세단의 활동으로 일찌감치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지요.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기도 했지만 1920년 8월 의열단 김원봉(金元鳳) 단장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하였습니다. 의열단은 1920년 진영ㆍ밀양 폭탄 사건에서 의열단 탄압에 앞장선 부산경찰서를 응징하기로 합니다. 거사 준비 과정에서 박 지사는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가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역업을 하던 경험을 살려 중국 고서 상인으로 위장하였지요. 박 지사는 부산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했고, 최천택, 오택

모양 빼어나고 무늬 훌륭한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43]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기도 용인시 용인대학교박물관에 가면 국보 제263호 “백자 청화산수화조문(白磁 靑畵山水花鳥文) 항아리”가 있습니다. 이 항아리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크기는 높이 54.8㎝, 아가리 지름 19.2㎝, 밑 지름 18㎝입니다. 아가리 부분은 수직으로 낮으며, 부드럽게 몸체가 벌어지다가 어깨부에서 크게 팽창한 다음 서서히 좁아진 뒤 몸통 아랫부분에서 약간 벌어져 바닥면에 이르지요. 항아리의 양감이 풍부하고 아랫부분이 좁아서 모양이 빼어난데, 몸통 가운데에는 위아래를 따로 만들어 붙인 흔적이 있습니다. 몸통 윗부분의 4곳에 푸른색 물감으로 4개의 반원을 연결시켜 만든 마름모 형태의 꽃창(꽃 모양의 창)을 큼직하게 그린 다음, 그 속에 산수문과 화조석문(花鳥石文)을 교대로 그려 넣었지요. 각각의 꽃창 안에는 도안화된 ‘富(부)’자를 넣어 사다리꼴로 연결시켜 놓았으며, 꽃창 사이 위아래 네 곳에 역시 안에 도안화된 ‘壽(수)’자와 ‘疆(강)’자가 들어 있는 동그라미 무늬가 있습니다. 유약(釉藥)은 투명하고 광택이 좋은 백자유를 전면에 고르게 발랐고, 표면의 빛깔은 옅은 회백색(灰白色)이며 빙렬(氷裂, 도자기 따위 겉면에 올린

오늘은 김익상 의사가 조선총독부에 폭탄 던진 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42]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독립운동가 김익상(金益相, 1895년 ~ 미상) 의사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날입니다. 김 의사는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학교의 교사와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전근된 것을 기회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중국 광동(廣東)으로 갔으나 학교가 폐교되어 뜻을 이루지 했습니다. 얼마 뒤 김 의사는 항일 운동에 몸 바치리라 각오하고 북경으로 가서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지요. 1921년 의열단 김원봉 단장으로부터 총독 암살 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한 뒤 9월 12일 총독부에 잠입하여 2층 비서과(총독실로 오인)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이때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큰 소리를 내며 폭발하였고, 이에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 왔지요. 의사는 이들에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나왔습니다. 그 뒤 1922년 김 의사는 동지 오성륜과 함께 일본의 전 육군대신이며 육군 대장인 다나카(田中義一)를 암살하기 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거사 당일인 3월 2

육십년 전에는 나도 23살이었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41]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腹裏詩書幾百擔(복리시서기백담) 배 안에 시와 글이 거의 백 짐은 되는데 今年方得一襴衫(금년방득일란삼) 금년에야 한 난삼을 얻었네 傍人莫問年多少(방인막문년다소) 곁에 있는 사람들아! 나이 많고 적음을 묻지 마라 六十年前二十三(육십년전이십삼) 육십 년 전에는 나도 23살이었네“ 이는 지은이 조수삼(趙秀三)이 83살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지은 것으로 “사마창방일 구호칠보시(司馬唱榜日 口呼七步詩)”라는 제목이 붙은 자전적인 한시입니다. 그는 역관중인(譯官中人)이라는 신분 탓으로 벼슬을 하지 못하다가 83살이 되어서야 노인에 대한 예우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오위장(五衛將)의 벼슬을 받은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83살이 된 지금에야 과거급제한 뒤에 입는 옷 “란삼(襴衫)”을 입었다고 고백하지만, 자신의 배에는 지은 시와 글이 백 짐은 되며, 육십년 전에는 겨우 23살이었다고 말하면서, 나이 적고 많음을 묻지 말라고 합니다. 조수삼은 60살이 돼서야 벼슬에 나아간 강세황보다 더 훨씬 늦은 나이에 겨우 벼슬자리 하나 받지만 자부심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시를 씁니다. 그는 송석원시사(宋石園詩社, 서울의 중인계층들이 인왕산 아래에

세종 때 만든 자격루, 자랑스러운 첫 자명종시계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40]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며칠 전 KBS 텔레비전에서는 중국 송나라 때 만든 자명종 시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은 세종 16년(1434년)에 장영실 등이 주관하여 만든 우리나라의 자격루(自擊漏)보다 앞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시계는 송나라 때의 “수운의상대(水運儀象臺)”를 말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는 우리의 자격루와 달리 완벽한 자명종 구실을 하지 못했던 것을 프로그램이 정확한 검증없이 내보낸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2007년 자격루연구회 이사장 남문현 건국대 교수와 국립고궁박물관 서준 학예사를 중심으로 천문과학자와 중요무형문화재 기능장 등 30여 명이 함께 하여 무려 570년 만에 보루각 자격루는제 모습을 찾아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공개 때 자명종을 치는 것에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음을 두고 조선일보는 이 복원 자격루가 스스로 종을 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쳐서 소리 나는 “타격루”라며 비아냥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종 때 만든 자격루는 당시 중국도 만들지 못한 자명종시계였으며, 2007년 복원한 새 자격루는 세종 때 만든 이후 전해지지 않아 잊힐

조선 초기 석등 양식을 잘 보여주는 충주 사자석등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38]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북 충주시 소태면에 가면 보물 제656호 “충주 청룡사터 보각국사탑 앞 사자석등(獅子石燈)”이 있습니다. 이 석등은 청룡사터에 있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청룡사 절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청룡사터에는 조선 초기 석등의 양식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자석등과 함께 보각국사의 사리탑과 탑비가 절터 북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사자석등은 보각국사(普覺國師)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 사리탑 앞에 세워진 것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이 있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습니다. 3단의 받침 가운데 아래받침돌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는 사자를 조각하였기 때문에 사자석등이라 부릅니다. 승탑ㆍ탑비와 더불어 한 줄로 자리 잡은 이 사자석등은 조선 전기의 배치 방법을 따르고 있는 데,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의 배치 형태와 비슷하다고 하지요. 탑비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인 태조 1년(1392)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조선 초기의 석등으로서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