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가정에 보관하고 있는 사초에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닌 것으로 단지 사람을 투박하게 만들 뿐입니다. 의논하는 사람 가운데 만약 이름을 쓴다면 직필(直筆)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나 이는 더욱 그렇지 않습니다. 옛적에 사필(史筆)을 잡은 자는 도끼가 앞에 있더라도 이를 피하지 않고 썼습니다. 만약 강개(慷慨)한 선비라면 임금의 허물에 대하여 면전에서 옳지 않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간절하게 말하는 법인데 유독 가정에 보관하고 있는 사초에 대해서만 두려워하여 꺼리겠습니까? 이미 올린 것은 추서(追書)할 필요가 없거니와 아직 올리지 않은 것은 옛 제도대로 이름을 쓸 것을 영원한 법식으로 만드소서.“ 이는 《명종실록》 9권, 명종 4년(1549년) 1월 13일에 있는 기록입니다. ‘사관(史官)’이 임금의 곁에서 날마다 기록한 일기를 ‘시정기(時政記)’라고 하는데, 시정기는 매달 책으로 묶어서 춘추관에 보관하고, 시정기에 쓸 수 없는 긴밀한 이야기는 사관이 따로 적어 자기 집에 보관했지요. 사관이 집에 간직한 글과 시정기가 훗날 실록을 만드는 기초 자료인 ‘사초(史草)’가 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랑이”라는 말이 무려 877차례나 등장합니다. 《태조실록》 1년 윤12월 20일 “성안에 들어온 호랑이를 흥국리 사람이 쏘아 죽였다.”로 시작하여 《태종실록》 5년 7월 25일 “밤에 호랑이가 근정전 뜰에 들어왔다.”, 《세종실록》 7년 8월 7일 “삼군 진무와 호랑이 잡는 갑사(甲士) 10명을 보내어 잡게 하였다.” 등의 기록이 있습니다. 또 《단종실록》 2년 8월 17일에는 “영산현의 박연수는 나이가 열 살인데, 그 아비가 호랑이에게 물려가므로 낫을 휘두르며 쫓아가서 호랑이가 마침내 버리고 갔습니다.”라는 믿지 못할 기록도 있습니다. 이 예문의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보면 모두 한자 ‘호(虎)’로 표기되었는데 현대에 와서 국역하면서 호랑이와 범을 섞어 썼습니다. 그러면 이 “범”과 호랑이는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먼저 국어사전에서 ‘범’을 찾아보면 “같은 말=호랑이”라면서 “‘범’과 ‘호랑이’는 모두 널리 쓰이므로 둘 다 표준어로 삼는다.”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1459년에 펴낸 《월인석보》에 보면 ‘호(虎)’와 ‘랑(狼)’은 각각 범과 이리(늑대보다 큰 갯과 동물)를 말한 것이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국보 <청자 인물형 주전자>가 있습니다. <청자 인물형 주전자>는 고려시대인 13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형 고려청자 주전자인데, 높이 28cm, 밑지름 11.6cm 크기로, 화려한 도포를 두르고 머리에는 높은 관을 썼으며, 구름형의 대좌 위에 앉아서 복숭아로 추정되는 과일이 여섯 개가 올라가 있는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앞으로 내밀고 있습니다. 청자 인물형 주전자는 1971년 대구 외곽에 있던 한 과수원의 땅속에서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현전하는 고려청자의 대부분이 도굴로 세상에 나와 있는 것들이지만, 이 청자는 출토지가 명확하다는 점에서도 값어치가 큽니다. 주전자는 높은 장식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데 이것들은 청자의 표면에 퇴화기법(堆畵技法)으로 그린 것이지요. 퇴화기법이란 흑토와 백토를 물에 개서 먹으로 그림을 그리듯 무늬를 그리고 유약을 씌우는 기법을 말합니다. 이 주전자에 조각된 장식들에서는 도교 사상이 짙게 드러납니다. 도포와 같은 옷과 앉아 있는 구름 모양의 대좌 그리고 인물이 쓰고 있는 높은 관을 보면 불교의 보살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