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3 (목)

  • -동두천 26.7℃
  • -강릉 22.9℃
  • 서울 26.1℃
  • 대전 24.3℃
  • 대구 25.4℃
  • 울산 26.2℃
  • 박무광주 29.2℃
  • 구름많음부산 29.5℃
  • -고창 26.8℃
  • 흐림제주 33.6℃
  • -강화 25.4℃
  • -보은 21.9℃
  • -금산 25.8℃
  • -강진군 30.1℃
  • -경주시 24.9℃
  • -거제 29.9℃

한국문화편지

전체기사 보기
배너
배너

“시일야방성대곡” 쓰고 뒤에 변절한 장지연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91]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1905년 오늘(11월 20일), 언론인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의 논설을 올렸습니다. 이 논설은 피를 토하듯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부당함을 전 국민에게 알리고, 일본의 흉계에 의한 조약 체결에 찬성을 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한 당시의 대신(大臣)들을 크게 꾸짖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을사늑약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1905년 11월 17일 대신(大臣)들을 압박, 강제로 체결한 조약입니다. 이때 을사늑약에 앞장선 을사오적에는 외부대신 박제순, 내무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부대신 권중현입니다. 그런데 을사늑약은 고종황제가 참석하지 않은 채 열린 것은 물론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재가(裁可)를 받지 않은 원인 무효의 조약이었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 조약을 을사조약이 아니라 ‘억지로 맺었다는 뜻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이 논설로 체포된 장지연은 90여 일간 옥살이를 한 뒤 1906년 1월 24일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지연은 1914년 이후 조선총독부를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논

고려시대 청백리 최석과 여덟마리 말의 ‘팔마비’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90]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전남 순천시 영동 1번지에는 여덟 마리의 말을 나타내는 팔마비(八馬碑)가 서있습니다. 순천지역에서는 꽤 이름난 이 팔마비는 우리나라 역사상 지방관리의 선정(善政)과 청렴결백의 효시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비석이지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팔마비는 고려 말의 청백리 최석(崔碩)의 송덕을 기리는 기념비입니다. 《고려사》 고려열전 권121에는 “양리(良吏), 최석”이라는 이름으로 “최석이 승평부사가 관례대로 받던 말 8필을 거부하다.”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최석(崔碩)은 충렬왕 때 사람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거듭 승진하여 승평부사(昇平府使)가 되었고, 임기를 마치고 〈개경으로〉 들어와서는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승평부(지금의 순천)에서는 관례상 태수(太守)가 돌아갈 때면 반드시 말 8필을 주고, 부사(副使)에게는 7필, 법조(法曹)에게는 6필을 선물로 주면서 마음대로 고르게 하였다. 최석이 교체되어 돌아가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말을 바치며 좋은 것을 고르라고 하니, 최석이 웃으면서 ‘말은 개경까지만 타고 갈 수 있으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고르겠는가?’라고 하였다. 집에 도착한 후에 그 말을

궁중음료 “배숙”과 고종이 좋아한 “배동치미”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89]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배”는 시원하고 단맛이 있어서 우리 겨레가 예부터 즐겨 먹었습니다. 《신당서(新唐書, 구양서 등이 1044년 ~ 1060년에 걸쳐 펴낸 당나라 역사서)》에는 발해의 배가 소개되어 있고,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배나무를 심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재배의 역사도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지요. 허균이 쓴 책 《도문대작》에 다섯 가지 품종이 있고, 대한제국 말기에 황실배, 청실배 같은 배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품종이 널리 재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배는 야생 돌배였고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품종은 일본에서 개량된 신고, 장십량, 풍수 따위입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음식에 배를 많이 썼는데, 특히 “배숙”은 생강물에 배와 꿀을 넣고 끓여 만든 대표적인 궁중 음료로서 쌀쌀한 가을부터 추운 겨울까지 마시며 기관지를 보했던 음식이었습니다. 또 배는 고기요리를 할 때 갈아 넣으면 고기를 연하게 해주기 때문에 양념으로 쓰거나, 김치를 담글 때, 시원하고 달콤한 국물을 더 내고자 할 때도 쓰였지요 고종황제는 밤참으로 배를 많이 넣어 담근 배동치미에 국수를 말아 먹는 것을 즐겼는데 이 때문에 수

문헌에 나오는 오래된 길, “문경 토끼비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88]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設險函關壯(설험함관장) 험하게 만들어져 함곡관(函谷關)처럼 웅장하고 行難蜀道奇(행난촉도기) 험한 길은 촉도(蜀道) 같이 기이하네 顚隮由欲速(전제유욕속) 빨리 가려 욕심내면 넘어져 떨어지니 跼蹐勿言遲(국척물언지) 엉금엉금 기어가더라도 늦다고 꾸짖지는 말게 조선 태종ㆍ세종 때의 문신 어변갑(1380~1434)이 지은 “관갑잔도(串岬棧道)”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있는 명승 제31호 “문경 토끼비리”를 묘사한 것입니다. “문경 토끼비리”는 수십 년 동안 인적이 끊어져 지금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이지만, 예전엔 영남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에 꼭 넘을 수밖에 없었던 길이지요. 더구나 다음과 같이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 형승조에도 기록될 정도로 역사성이 있는 길입니다. “관갑천은 용연의 동쪽 벼랑을 말하며 토천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만든 잔도(棧道, 험한 벼랑 같은 곳에 낸 길)가 구불구불 6, 7리나 이어진다.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 원정 때에 이곳에 이르렀는데 길이 막혔다. 마침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진군할 수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불렀다.” 고려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 “울주 천전리 각석”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87]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태화강 물줄기인 내곡천 중류 기슭에 가면 국보 제147호 “울주 천전리 각석 (川前里 刻石)”이 있습니다. 1970년 12월 동국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팀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그 크기는 너비 9.5m, 높이 2.7m입니다. 이 각석은 각종 도형과 글, 그림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인데, 아래ㆍ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합니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가운데의 해를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 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보입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지요.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보이는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지요. 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바다 활동을

부산진성을 지키다가 죽은 정발 장군과 정공단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86]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산악이 우뚝 솟은 것 높다할 것 없고 해와 달이 빛나는 것 밝다 할 것 없네 오직 공의 절개만이 세상의 기둥이 되니 고립된 성의 일편단심 만고의 모범 일세 노복과 첩의 충직함도 한 집안에 우뚝하고 막료인 이공도 당나라 남팔처럼 늠름하였으니 짧은 비석에 적기 어려워도 깊은 바다처럼 다하지 않으리 이는 충장공 정발(鄭撥, 1553 ~ 1592) 장군의 전망비(戰亡碑)를 쓴 통훈대부 춘추서기관 황간의 시입니다. 황간은 정발장군의 추모 시와 함께 비문도 썼는데 비문에는 “지난 임진년의 왜란 때에 부산의 첨사 정발공은 사기를 돋우며 성을 돌아다니면서 왜적을 무수히 쏘아 맞추어 하루 만에 적의 시체가 산처럼 쌓인 곳이 세 곳에 이른다. 화살이 떨어지자 부하장수들이 성을 빠져나가 구원병을 기다리자고 간청하자 공은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 또 다시 성을 포기하자고 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하니 군사들이 모두 흐느끼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뒷줄임)”고 쓰고 있습니다. 부산을 대표하는 정발 장군은 임진왜란 때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로 부산에 상륙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장렬한 전사를 하게 됩니다.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는 임진

오늘(1939년)은 창씨개명을 위한 법령 공포한 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85]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1939년 오늘(11월 10일)은 일제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위해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 공포한 날입니다. 창씨개명은 일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의 하나로 강제로 조선 사람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창씨개명을 접수하기 시작한 날은 다음해인 1940년 2월 11일부터였는데 이틀 만에 87건이 접수되었습니다. 특히 그날 아침 관리들이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려 가장 먼저 달려가 향산광랑(香山光郞)이란 이름으로 등록을 마친 사람은 조선 최고의 작가라는 이광수였습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한 변명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게 살기

유배지에서 남기고 나누는 미덕을 강조한 김정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84]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留不盡之巧, 以還造化 다 쓰지 않은 기교를 남겨서 조물주에게 돌려주고, 留不盡之祿, 以還朝廷 다 쓰지 않은 녹을 남겨서 나라에 돌려주고, 留不盡之財, 以還百姓 다 쓰지 않은 재물을 남겨서 백성에게 돌려주고, 留不盡之福, 以還子孫 다 쓰지 않은 복을 남겨서 자손에게 돌려주라. 위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시절 제자 남병길(南秉吉)에게 유재(留齋)란 호를 지어주고 써준 현판에 있는 글입니다. 남병길은 수학자, 천문학자로 이조참판을 지냈습니다.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고를 모아 《완당척독》과 《담연재시고》를 펴냈는데 이는 《완당선생전집》의 기초가 되었지요. “유재(留齋)”는 “남김을 두는 집는 집”이란 뜻으로 현판에는 예서로 쓴 ‘유재’와 행서인 풀이글, 그리고 끝에는 "완당 김정희가 쓰다(阮堂題)"라고 적혀 있습니다. 추사의 제자인 소치 허련(許鍊)의 문집 《소치실록》 부기에는 “완당이 제주에 있을 때에 써서 현판으로 새겼는데 바다를 건너다 떨어뜨려 떠내려 간 것을 일본에서 찾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많은 궁금증을 더합니다. 유재 현판은 추사의 인생과 예술의 진수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지요. 유배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