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35년 전인 1886년 1월 25일 <한성순보(漢城旬)報>의 복간형식으로 박문국(博文局)에서 우리나라 첫 주간신문인 <한성주보(漢城周報)>가 창간되었습니다. 이 신문은 창간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깨닫게 하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삼았는데 1884년 4월 19일 김윤식(金允植)이 통리아문독판(統理衙門督辦, 조선 말기 외교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의 으뜸 벼슬)에 임명되면서 발간작업이 추진되었지요. 편집체재는 1단제로서 1면 16행, 1행 40자, 1호 16면 또는 18면씩 발행되었는데 규격은 세로 22.5㎝, 가로 16.5㎝였습니다. 특히 <한성순보>가 한자만을 쓴 데 반하여 이 신문은 최초로 국한문을 섞어 썼고, 내용에 따라 순한글 또는 순한문만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일부라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국민계몽에 한 발짝 내디뎠다는 것으로 평가를 받지요. 주보는 제4호인 1886년 2월 22일 자부터는 상업광고를 실었는데 독일인 상인 에드바르트 마이어의 세창양행이 광고주로 등장한 이 광고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광고로 알려져 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50년 전인 1971년 1월 22일 집권 8년 차에 접어들었던 박정희 정권은 부처별 지시사항을 발표했습니다. 50여 개에 달하는 이 지시사항은 경제성장과 국민생활 개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속에는 장기집권에 필요한 국민 감시 규제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지요. 특히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문화 전반에 걸쳐 검열을 주도했는데 박정희는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히피 머리형의 장발족은 국영뿐 아니라 민간 텔레비전 방송에도 절대 출연하지 못하게 하라”고 직접 지시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경찰은 길거리에서 히피 머리형의 장발족에 대한 일제 단속을 벌였고, 시민을 마구잡이로 연행해 머리를 깎은 뒤 집으로 돌려보기까지 했지요. 이에 대해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은 “장발 추악한 작폐 등은 사회윤리와 법질서를 문란 시키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 건전한 국민정신을 해치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는 아울러 신문ㆍ방송ㆍ영화ㆍ음악ㆍ도서 등 문화 전반에 걸쳐 검열을 강화하도록 하는 ‘자율 규제 강화 방안’을 지시하기까지 합니다. 이후 예술과 국민의 의사 표현에 대한 자유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강화군 교동도 읍내리에 가면 교동향교 옆에 비석(碑石) 40개가 모여 있는 <읍내리 비석군>이 있습니다. 이 비석들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ㆍ도호부사(都護府使)ㆍ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ㆍ부사 등을 지낸 사람들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를 한곳에 모아놓은 것입니다. 원래는 읍내리 교동양조장 부근 비석거리에 있던 것들인데 1991년에 이곳으로 옮겨 온 것입니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암행어사,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 공조판서,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박영보(朴永輔)의 ‘휼민선정비’도 있습니다. 실제 어떤 선정비는 벼슬아치들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세워진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만 이 박영보는 조선왕조실록에 54번이나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는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것과 관련된 내용이 많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심지어 그는 경기감사로 있을 때 부하 벼슬아치가 잘못하자 이에 상관으로서 책임이 있다며, 자신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한 것은 물론 대사헌일 때 임금에게 언로(言路)를 열어 충언을 듣고 검소한 삶을 살아 백성을 사랑할 것을 간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