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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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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17살, 여자는 15살 이상에 혼인하도록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882]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람이 서른 살에 아내를 두며 스무 살에 시집가는 것이 옛날의 훌륭한 법이었는데 근래에는 조혼(早婚)의 폐단이 국민의 더없는 병폐가 되었다. 그러므로 여러 해 전에 금령(禁令)을 내렸으나 아직까지 실시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지금 정사를 새롭게 하는 때를 만나 풍속을 고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다. 부득이 옛날과 지금을 참작하여 남자의 나이는 만 17살, 여자의 나이는 만 15살 이상이 되어야만 비로소 시집가며 장가를 가도록 하되 엄하게 준수하여 어김이 없게 하라." 이는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 8월 14일 기록으로 조혼풍속을 금하도록 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종 31년에 남자는 20살, 여자는 16살에 혼인(婚姻)하도록 한 것에 견주면 오히려 뒤로 물러난 것입니다. 그 이전의 경우를 보면 원래 태종실록 태종 8년에 스무 살이 지난 처녀에게 혼인을 허락한다고 했는데 세조실록 세조 7년에 보면 남자 나이 14살, 여자 나이 13살 이상은 떳떳하게 혼인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들쭉날쭉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민법 제807조(혼인 적령) “만 18세가

조선시대 밤길을 밝히는 도구 ‘조족등’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879]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플래시는 물론 가로등도 없고, 자동차의 불빛도 없던 조선시대에 사람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어떻게 다녔을까요? “차려 온 저녁상으로 배를 불린 뒤에 조족등을 든 청지기를 앞세우고 두 사람은 집을 나섰다.” 위 예문은 김주영의 《객주》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조족등”이라는 것이 바로 조선시대의 밤길을 밝히는 필수 도구였지요. 조족등(照足燈)은 밤거리에 다닐 때에 들고 다니던 등으로 댓가지로 비바람에 꺼지지 않게 둥근 틀을 만들고 그 위에 한지를 바르고 비에 젖지 않게 기름을 칠하거나 옻칠을 했습니다. 바로 그 안에 촛불을 켜서 밤길을 밝히는 것입니다. 특히 조족등은 순라꾼이 야경을 돌 때 주로 썼다고 하지요. 조족등을 이름 그대로 풀어 보면 비출 ‘조(照)’, 발 ‘족(足)’, 등잔 ‘등(燈)’ 자를 써서 발을 비추는 등이라는 뜻이 되됩니다. 아무리 먼 길이라도 발밑을 보아야만 갈 수 있으므로 “천릿길도 한 걸음 부터”라는 속담과 뜻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조족등 없이 칠흑 같은 깜깜한 밤길을 가려면 돌부리에 채일 수도 있고, 물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으며, 움푹 파진 곳에 헛짚을 수도 있기에 그때는 밤길에 정

꽃줄기가 우산 모양으로 펴지면서 피는 문주란꽃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878]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한 하도리 사람이 토끼를 길러 많이 번식시켰다는 토끼섬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이 섬 이름은 난(蘭)이 자라는 섬이라 해서 난섬이라 불렀었지요. 이곳에는 7~8월 문주란 꽃이 피어 온 섬을 하얗게 덮은 모습이 하얀 토끼와 같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문주란이 이 섬에 생기게 된 것은 옛날 일본 유구국(오키나와) 사람이 난파된 배가 도착했을 때 씨앗이 퍼뜨려진 것이라고 하여 ‘왜반초’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문주란은 꽃말이 '청순함'으로 온난한 바닷가의 모래땅에서 자라는 늘푸른 여러해살이 흰빛 들꽃이지요. 다만 특별한 모습은 잎 사이에서 꽃줄기가 올라와 우산 모양으로 위에서 아래로 처지면서 피는데, 수술은 윗부분이 자주색이지요. 민간에서는 진통ㆍ해독이나 상처를 치료하고 붓기를 가라앉히는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문주란은 유일하게 이곳 토끼섬만이 자생지인데 무분별한 채취로 그 수가 급격히 줄었고, 이후 마을 청년들은 캐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감시를 철저히 하는 것은 물론 섬 주위에 돌담을 쌓아 풍랑을 막는 등 보호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문화재청은 천연기념물

오늘은 입추, 땡볕더위 속에도 이미 가을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877]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셋째 입추(立秋)입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때인데 이날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입추부터 가을이라 하지만 이후 말복이 들어 있고 땡볕더위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말복 전에 입추가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주역에서 보면 남자라고 해서 양기만을, 여자라고 해서 음기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듯 모든 것은 조금씩 중첩되게 가지고 있다는 얘기인데 계절도 마찬가지지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려면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이 역할을 입추와 말복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는 더위를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몇 해 전부터 더위가 들기 시작하여, 손으로 물을 희롱하였더니 더위 기운이 저절로 풀렸다. 이로 생각하건대, 죄수가 옥에 있으면, 더위가 들기 쉬워서 혹은 생명을 잃는 수가 있으니,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더운 때를 당하거든 동이에 물을 담아 옥중에 놓고 자주 물을 갈아서, 죄수로 하여금 손을 씻게 하여, 더위가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이는 《세종실록》 30년(1448) 7월 2일 치에 나오는 기록으로 옥 속에 갇힌 죄수의 건강까지도 걱정하는 세

서빙고의 얼음, 임금도 먹고 죄수도 먹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876]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냉장고가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겨울철 한강의 얼음을 떠서 동빙고와 서빙고 그리고 내빙고에 보관하였습니다. 동빙고(東氷庫)는 한강변 두뭇개, 곧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는데 나라에서 제시지낼 때 쓰는 얼음을 보관했으며, 내빙고(內氷庫)는 궁궐 안에 있으면서 궁궐 전용 얼음을 저장했지요. 그러나 지금의 서빙고동 둔지산(屯智山, 용산 미군기지 터) 기슭에 있었던 서빙고는 동빙고의 12배, 내빙고의 3배가 넘는 크기였는데 임금의 친척과 높은 벼슬아치들에게도 주었지만 특히 활인서의 환자와 의금부 죄수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었습니다. 얼음을 뜨는 것은 한강이 4치(한 치는 약 3.03cm로 12cm가량)의 두께로 어는 12월(양력 1월)에 시작되었는데 먼저 세상의 추위를 관장하는 신, 곧 현명씨(玄冥氏)에 대해 제사를 지냈지요. 또 얼음을 뜰 때에는 칡으로 꼰 새끼줄을 얼음 위에 깔아 놓아 사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세종실록》에 보면 석빙고에 얼음을 저장하는 군인 곧 장빙군(藏氷裙)에게 술 830병, 생선 1,650마리를 내려주었다고 하며, 서빙고의 얼음 저장과 시설 관리를 위해서만 한해 쌀 1,000여석의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

벽돌로 쌓은 것처럼 보이는 “분황사 모전석탑”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875]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 분황사에 가면 높이 9.3m의 국보 제30호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 模塼石塔)”이 있습니다. 이 모전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멀리서 보면 마치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돌 하나하나를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만든 탑이어서 모전석탑 곧 "전탑을 모방한 석탑"이란 이름이 붙었지요.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지금은 3층만 남아있습니다. 탑은 널찍한 1단의 기단(基壇)이 있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입니다. 탑신 4면에는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한 작은 불상을 모신 감실(龕室)이 만들어져 있고,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 절이나 불전의 문 또는 불상 등을 지키는 불교의 수호신)을 두었습니다. 이 모전석탑은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세운 것으로 짐작되며,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