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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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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설, 메주 쑤기 하는 때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6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 대설(大雪)입니다. 소설(小雪)에 이어 오는 대설(大雪)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이지만 원래 역법(曆法)이 만들어진 것이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의 계절적 특징을 반영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꼭 맞지는 않습니다. 24절기 가운데 대설이 있는 음력 11월은 동지와 함께 한겨울을 알리는 절기로 농부들에게 있어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농한기(農閑期)이기도 하지요. 십일월은 중동이라 대설 동지 절기로다 바람 불고 서리 치고 눈 오고 얼음 언다 (중간 줄임) 부녀야 네 할 일이 메주 쑬 일 남았구나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 두소 이는 <농가월령가> 십일월령에 있는 노래입니다. 이때는 겨울이 깊어가는 즈음이며, 농사일이 한가한 시기이지만 이 노래처럼 가장 중요한 메주 쑤기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 겨레의 먹거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던 된장을 만드는 메주. 예전에 서양인들은 메주에 발암물질인 아플라톡신이 있다고 비웃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메주로 만든 된장을 훌륭한 항암식품으로 평가합니다. 씻는 과정에서 아플라톡신은 남아있을 수 없고, 나중

16세기 여성옷, 문경 평산신씨 무덤 출토복식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6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북 문경시 문경읍에 있는 문경옛길박물관에는 국가민속문화재 제254호 “문경 평산 신 씨 무덤 출토복식”이 있습니다. 문경 평산 신 씨 무덤은 조선 전기 여성이 홀로 묻힌 무덤으로 2004년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키 150㎝ 정도의 미라와 함께 많은 옷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출토유물은 저고리, 치마, 바지, 단령(團領-조선시대 관리들의 관복), 장옷 같은 옷들을 비롯하여 염습구(주검을 씻긴 다음, 옷을 입히고 묶는 일을 하는 도구)와 치관류(관을 짜는 데 쓰는 것)등 74점에 이르며, 보수ㆍ보존 처리과정을 거쳐 현재 문경새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출토복식은 의생활의 시대상이 반영되는 귀중한 자료지만,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기에 원래 옷 빛깔을 잃어버리고 갈색 빛으로 변해 출토되는 문제가 있는데 이 평산 신 씨 무덤 출토 유물도 갈색으로 변한 상태지요. 옷들은 홑옷과 겹옷은 물론 솜 또는 누비옷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또 목판깃, 직선배래의 형태이고, 길이는 길고 품이 넉넉하여 16세기 여자복식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평산 신 씨 무덤에서 출토된 옷 가운데 특이한 점은 전체적으로 직금단(織金緞-비단 바탕에

학을 기르며 매화를 사랑했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6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湖上精廬絶俗緣(호상정려절속연) 호숫가 깨끗한 집 속세와 끊어진 곳이니 胎仙栖託爲癯仙(태선서탁위구선) 학이 깃들어 여윈 신선이 되었구나 不須翦翮如鸚鵡(불수전핵여앵무) 앵무처럼 깃털을 꺾을 필요 없으니 來伴吟梅去入天(내반음매거입천) 장차 함께 매화를 읊으며 하늘로 들어가세 이 시는 저장성 항저우(杭州) 서호(西湖)에서 학을 기르며 매화를 사랑한 임포를 노래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西湖伴鶴(서호반학)”이란 제목의 한시입니다. 임포는 이곳에서 벼슬도 하지 않고 아내도 두지 않았으며, 오직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는 것만 즐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퇴계는 함께 노래하며 하늘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정조(正祖)는 그의 시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16세기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하고 있습니다. “퇴계는 율곡의 선배다. 그의 사단칠정(四端七情)은 율곡이 강력히 반론을 제기해 마지않았으나 퇴계는 끝내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여기에서 퇴계의 온순하며 인정이 두터운 인품과 율곡의 명석하고 예리함

신라인, 탐라인의 미소와 백제인의 얼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6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11월 27일 문화재청은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를 보물 제2010호로 지정했습니다. “수막새”는 목조건축물 추녀나 담장 끝에 기와를 마무리하기 위한 둥그렇게 만든 기와를 말합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주 사정리(현 사정동)에서 출토된 것이지요. 이 수막새는 1934년 일본인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가 골동상점에서 사서 일본으로 빠져나갔으나 1972년 10월 국내에 반환되었습니다. 이 수막새는 기와 제작틀을 이용해 찍은 일반적인 제작 방식과 달리 손으로 직접 빚은 작품으로, 비록 오른쪽 아래 일부가 없어졌으나 이마와 두 눈, 오뚝한 코, 두 뺨의 턱 선이 조화를 이룬 자연스러운 모습을 볼 때 숙련된 장인의 솜씨가 엿보인다는 평가입니다. 특히 얼굴에 잔잔한 웃음은 신라인의 미소라 널리 알려진 것이지요. 이 신라인의 미소 말고도 제주도에 “탐라인의 미소”라 불리는 수막새도 있습니다. 여인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 이 수막새는 1960년대 초기에 절터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이 수막새는 척박한 땅, 바람 많은 고장에서 시달리며 살아온 제주여인의 얼굴이 기와에 새겨진 모습라고 하지요. 풍요로운 얼굴에서 원만하고 너그러운 그리고 포

한 많은 경희궁, 원래 경덕궁이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6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태종 5년에 지은 창덕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는데 광해군 때 복구는 하였지만,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일부 풍수지리가의 말을 믿고 불길하게 생각하여 창덕궁으로 옮기는 것을 망설였습니다. 이후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란 말을 듣고 이곳에 궁터를 잡게 한 뒤 그 이듬해부터 공사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공사 도중에 새문동(塞門洞 :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일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이 나돌자, 광해군이 이를 누르기 위하여 그 자리에 경덕궁(慶德宮)을 짓게 했습니다. 이 경덕궁은 영조 36년(1760) 이름을 경희궁으로 고쳤으며, 동궐인 창덕궁에 견줘 서궐이라고 불렀지요. 이 경희궁에는 여러 임금들이 머물렀는데 숙종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승하했습니다. 또 경종이 태어난 곳도, 영조가 승하한 곳도, 정조가 즉위한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경희궁은 창건 때 정전ㆍ동궁ㆍ침전ㆍ제별당ㆍ나인입주처 등 1,500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전각이 헐리고, 일본인들의 학교로 쓰이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습니다. 특히 1907년 궁의 서쪽에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5년엔

1920년 오늘은 강우규 지사 순국한 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5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이는 1920년 오늘(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강우규 애국지사가 사형당하기 전 남긴 짤막한 시입니다. 강우규 지사는 거사 당일인 9월 2일 남대문역에 도착한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마차를 향해 겨레의 분노와 독립의 염원이 담긴 한발의 폭탄을 힘껏 던졌습니다. 천지를 진동하듯 터진 폭탄은 비록 사이토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일제 식민통치자들과 세계만방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지요. 강 지사는 사형이 확정된 뒤 옥바라지를 하던 아들 중건이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자 다음과 같이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중간 줄임

80년 만에 귀국한 경복궁 자선당 유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5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문화재 가운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맘대로 일본으로 가져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경복궁 자선당 유구입니다. 자선당(資善堂)은 세자와 세자빈이 머무는 집으로 세종 때 처음 지었습니다. 자선당은 “어진 품성을 바탕으로 하는 집”, “떠오르는 해의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문종은 세자 시절 여기 머물면서 앵두를 좋아하는 아버지 세종을 위해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열리면 직접 따서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자선당은 일제강점기 뜯기고 허물어진 조선 궁궐의 수난을 상징하는 문화재입니다. 20세기 초 경복궁에는 330여 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광복 뒤 남은 건물은 30여 동에 불과할 정도로 일제는 궁궐 전각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미술관이나 동물원을 세웁니다. 그리고 헐어낸 건물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본계 절과 기생집, 부자들의 집으로 재조립하여 다시 지었습니다. 그런 전각들 가운데 경복궁 자선당도 들어있는 것이지요. 1915년 일제는 조선통치 5돌을 기리는 박람회를 열기 위해 자선당 등 동궁 지역을 철거하고 조선총독부미술관을 짓습니다. 이때 철거작업을 한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총독에게 부탁하여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