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윤지영 기자] 고려 시대, 몽골과 전쟁으로 나라가 어지럽고 불안할 때 옛사람들은 목숨 부지할 방책을 찾는 대신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불사를 일으켰다. 부처의 일생과 가르침을 새긴 대장경을 제작한 것이다. 8만 4천 번뇌를 의미하는 8만 4천 법문을 새긴 목판으로, 세계에 현존하는 대장경 중 가장 방대하고 오래된 것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과 더불어 그를 봉안한 장경판전 역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장경판전이 있는 합천 해인사는 법보사찰로 꼽히는 천년 고찰이다. 근엄하면서도 기품 있는 사찰의 면모는 병풍처럼 두른 가야산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다. 대장경 제작 과정과 장경판전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대장경테마파크와 해인사소리길, 합천영상테마파크도 함께 둘러보기 좋은 합천의 명소다. 문의 : 해인사 종무소 055)934-3000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센터장 정소영)는 2016년부터 5년여에 걸친 지광국사탑 보존처리를 끝냈다. 또한, 최근 연구 결과를 담은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보존‧복원Ⅲ》 보고서를 펴내 누리집에 공개했으며, 지광국사탑 관련 문화재 정보와 보존처리 관련 내용을 웹툰으로 만들어 국민에게 온라인 공개하기로 했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터에 세워졌던 고려시대 국사(國師) 해린(海麟, 984~1070)의 승탑으로,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장식으로 역대 가장 개성 있고 화려한 승탑으로 꼽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반출되는 등 십여 차례 옮겨 세움과 한국전쟁 중 폭격을 받아 파손되었던 역사적 고난과 아픔을 겪은 바 있다. * 국사(國師): 신라ㆍ고려 시대에 있었던 승려의 최고법계 * 승탑(僧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묘탑. * 장엄장식: 석탑을 아름답고 엄숙하게 꾸미기 위해 장식된 문양 지광국사탑은 그간 두 차례 있었던 정기조사(2005년, 2010년)와 특별 종합점검(2014년), 정밀안전진단(2015년) 결과, 다수의…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칼은 한쪽만 날이 있는 도(刀)와 양날인 검(劍)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의 무덤에서 출토된 도검(刀劍) 곧 칼은 당시 사람들의 신분 질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입니다. 검(劍)은 주인공의 신분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며, 보통은 허리 부근에 둡니다. 신분이 가장 높은 자는 검 3점 이상을 포함하여 많은 칼을 껴묻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 점을 껴묻거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검을 장식하는 것도 신분에 따라 달랐습니다. 무덤의 껴묻거리(부장품)는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거나 사라집니다. 그러나 신분 상징물인 도검은 청동장식손잡이 검→고리자루 큰칼→장식 고리자루 큰칼의 순서로 모양과 장식만 변해왔을 뿐, 죽은 사람의 허리 부근에 두는 정치적 행위는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무덤 주인공이 소유한 기물 가운데 신분을 직접적으로 나타낸 것을 착장형이라고 합니다. 착장형은 말 그대로 주인공이 복식의 형태로 착장한(떨어지지 않게 붙임)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도검은 신분을 나타내는 복식의 구성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동장식손잡이 검[靑銅劍把附 劍] 청동검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무덤 껴묻거리입니다. 이 검은 손잡
[우리문화신문=윤지영 기자] 새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코로나19' 비상 상황이라 마음놓고 바깥나들이 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다지 모이지 않는 곳이라면 한번쯤 발걸음을 해도 좋을 일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도에 '강화 부근리 고인돌(지석묘)'이 있다. 드넓은 공원을 산책하면서 점점이 흩어져 있는 고인돌을 둘러보는 것이 마치 보물찾기처럼 흥미롭다. 때마침 춥던 날씨가 풀려서인지 가족단위로 고인돌 공원에 나온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강화고인돌 유적지는고창, 화순 지역 고인돌과 더불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강화고인돌은 부근리 지석묘(사전 제137호), 내가 오상리 고인돌(인천광역시 기념물 제 16호), 대산리 지석묘(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1호) 등 고려산 기슭을 따라 모두 120여기가 흩어져 있다. 어제 찾은 부근리 고인돌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2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1964년 7월 11일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 가운데 대형에 속하는 것으로, 지상 높이 2.6m, 덮개돌 크기는 길이 7.1m, 너비 5.5m이며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부근리 고인돌은 모두 10기(基)로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김동영)은 어보 322과의 분석 성과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어보 과학적 분석》 보고서를 펴냈다. 어보는 의례의 산물로 제작된 인장(도장)이자 조선 시대부터 대한제국 시대까지 약 500년에 걸쳐 제작된 대표 왕실문화재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왕과 왕실 전체의 권위를 상징하는 역사성과 진귀함으로 2017년에는 ‘조선왕조 어보‧어책’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어보의 과학적인 분석자료를 확보하고자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모두 3개년에 걸쳐 연구를 진행하였다. 금보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자체적으로 분석하였고, 옥보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과 공동연구로 진행하였다. 이번 분석은 어보의 구성 재료와 제작기법에 중점을 두어 비파괴 분석방법으로 표면을 분석하였다. 어보 분석결과가 종합ㆍ정리된 이번 3편의 보고서에는 ▲ 1권에는 박물관 소장 어보의 과학적 분석 개요와 금보, 옥보의 제작기법과 재질, 특징 등 연구 결과를 정리한 4편의 논고가 담겼고, ▲ 2권에는 금보 분석결과, ▲ 3권에는 옥보 분석결과가 수록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 금보는 구리-아연 합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경상남도에 가면 한국가면무극(韓國假面舞劇)의 영남형이라 할 수 있는 무형문화재 ‘오광대(五廣大)’와 ‘야유(野遊)’가 있습니다. 합천군 초계 밤마리에서 시작된 오광대는 수영ㆍ동래ㆍ부산진 같은 곳에서는 들놀음을 뜻하는 야유(野遊)라 부르고, 기타 지방에서는 모두 오광대라 부릅니다. 오광대란 이름은 오행설(五行說)의 '5(五)'를 가리키는데 진주와 마산 오광대에서는 다섯 양반을 만들어 연출하기도 하고, 진주에서는 오방각색 가면의 문둥이광대가 다섯이 등장하며, 통영과 고성의 오광대는 다섯 과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고성 지방에 전승된 <고성오광대(固城五廣大)>는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것으로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연희하기 7~8일 전에 고성 몰디 뒷산의 산기슭 잔디밭에서 연습하여 정월 대보름 저녁 장터에서 장작불을 피워놓고 놀았다고 하지요. 연희자들이 일심계를 조직하고 한가한 봄철에 자갈밭에 모여 밤새 오광대를 놀고 물고기를 잡아 천렵하면서 즐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본래 악사들이 피리ㆍ젓대(대금)ㆍ해금ㆍ가야금ㆍ거문고ㆍ장구ㆍ북ㆍ꽹과리 등을 연주하는 <고성오광대> 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는 보물 제1319호 <경진년대통력(庚辰年大統曆)>이 있습니다. <경진년대통력(庚辰年大統曆)>은 ‘대통력법(大統曆法)에 따라 만든 경진년(庚辰年)의 역서’라는 것으로 조선 선조 12년인 기묘년(己卯年, 1579년)에 활자본으로 펴내 이듬해인 경진년(庚辰年, 1580년)에 쓰인 역서(曆書)이며, 조선의 역서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지금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의 여러 국학기관과 박물관, 도서관들에는 조선의 역서들이 수백 책이 넘게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서 1580년 이전에 펴낸 역서는 이 경진년대통력이 유일하지요. 이 대통력의 크기는 길이 39.8㎝, 너비 21.7㎝로 앞뒤의 표지를 빼고 모두 15장 30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선은 원래 중국의 제후국이어서 명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받아서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세종 이후 명나라의 대통력과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바탕으로 한 역산서(曆算書)인 《칠정산(七政算)》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역서를 따로 펴내 독자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경진년대통력(庚辰年大統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어느 왕릉을 가건 실크로드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길이 있고 소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를 비롯한 온갖 나무들이 울울창창했다. (…) 서울 근교 엎드리면 코 닿을 만한 거리에 있는 30여 개에 이르는 조선 왕릉 길은 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에서부터 정조의 건릉까지 600킬로미터로 이어져 있다. 조선왕조 500년과 그 뒤로 이어진 역사와 문화의 현장을 찾아 천천히 그 길을 따라서 걸어 보자.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산천을 사랑하고 알리는 진정한 홍보대사가 될 것이다.” - 본문 가운데 조선 왕릉은 수십 년에 걸친 연구와 복원, 관리사업의 노력으로,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올랐다. 이후 10년 동안 능제 복원, 역사ㆍ문화 환경 복원 등의 노력이 있었고, 그 결과 2020년 가을 ‘조선 왕릉 순례길’이 개방되었다. 조선 왕릉 순례길은 모두 6개 길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일본 시코쿠 순례길에 버금가는 역사적, 환경적 값어치를 가졌다. 이 책은 서울 선릉부터 영월 장릉까지, 서울, 경기, 강원도의 여러 조선 왕릉을 잇는 600km 왕릉길을 소개하며 각 왕릉에 대한 설명과 그에 얽힌…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왕실의 특별한 아기, 원자(元子, 임금과 왕비 사이에 출생한 왕세자 책봉 전의 맏아들)는 태어나면서부터 공부의 연속이었습니다. 탄생할 때부터 임금으로 죽을 때까지 보양청(輔養廳), 강학청(講學廳), 시강원(侍講院), 경연청(經筵廳)에서 끊임없는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위로는 역대 선왕들의 왕업을 이어받고, 아래로 신하와 백성들의 안위가 달려 있으며,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것이 왕세자에게 달려 있다.’라고 하며 조선 왕실은 장차 국왕이 될 왕세자에 대한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국본(國本), 나라의 근본’으로 왕실의 온갖 주목을 받았던 왕세자의 하루는 어떠했을까요? 왕세자의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부모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문안인사를 다녀오면 아침식사 뒤, 바로 아침공부, 곧 세자시강원의 관료들이 지도하는 조강(朝講)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지난번에 배운 것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어서 왕세자는 책을 덮고 배운 것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만약 제대로 암송하지 못하면 호된 질책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교수관들이 일과에 따라 교재의 본문에 나오는 글자의 음과 뜻을 풀어주고 그 문장의 의미를 해설하고 질의응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책가도(冊架圖)’란 책꽂이를 통째로 옮겨 그린 듯한 그림을 말하는데 책을 비롯하여 꽃병과 자명종 시계 등 당시의 여러 귀중품을 함께 그렸으며, 우리말로는 책거리라고도 합니다. 책가도는 당시로써는 서양화에서나 볼 수 있던 ‘투시도법’과 ‘명암법’을 응용해서 그려 조선 전통적 화법으로 그린 그림에 견줘 공간감과 입체감이 훨씬 살아 있습니다. 서민들의 풍속을 즐겨 그린 김홍도(金弘道)가 책가도를 잘 그렸다고 하며, 이윤민(李潤民)ㆍ이형록(李亨祿) 부자(父子) 같은 화원도 책가도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조선시대 때는 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책에 관한 관심도 높았는데, 이 책가도는 당시의 선비들이 책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책 읽기를 즐겼던 정조임금은 어좌 뒤에 꼭 있는 일월오봉도 대신 책가도를 배치하였다고 하며 “책을 즐겨 읽지만 일이 많아 책을 볼 시간이 없을 때는 책가도를 보며 마음을 푼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형록의 <책가도>에는 재미난 것이 있지요. 대부분 궁중회화와 민화에는 화가의 낙관이 없어 누가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이 그림에는 도장함과 여러 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