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답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이성(Logos)을 가진 동물”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다른 동물도 감정을 가질까? 이 물음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은 공포나 분노 같은 기본적인 감정은 사람과 공유하지만, 수치심이나 시기심처럼 자기 성찰이나 가치 판단이 필요한 감정은 오직 사람만이 가진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관은 중세를 거쳐 오랫동안 서구에서 받아들여졌다. 특히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에는 사람만이 이성적 영혼을 가지며 고차원적인 사고와 도덕적 생활의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 기독교 신학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동물에게도 혼이 있으나 몸이 죽으면 사라지는 혼이라고 말하였다. 인간이 수태되는 순간 하느님은 사람에게 영혼을 불어넣어 주는데, 영혼은 사람이 죽어 육체가 썩은 뒤에도 존재하는 불멸의 혼이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에서는 사람과 동물은 신의 창조물이지만 등급이 다르다고 본다. 불교에서 유정(有情)은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는 생명체를 말하는데, 동물과 사람이 포함된다. 모든 유정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 깨달음을 얻을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아시타비(我是他非)"는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옳고 그름을 넘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판단의 잣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지요. 우리는 종종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행동은 상황의 불가피성으로 정당화되고, 타인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실수나 잘못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이 운전 습관을 분석하여 점수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계의 감시와 평가를 받는 것 같아 그리 유쾌하지는 않지요. 마치 모든 행동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듯한 불편함마저 듭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다행히도 95점 이상의 좋은 점수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삶에서 크게 서두를 일이 없기에 운전에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 점수가 저의 '아시타비' 적인 본성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합니다. 가끔은 저도 급한 마음에 끼어들기를 시도하곤 합니다. 그때는 '나는 지금 너무 급해, 어쩔 수 없어!', '이 정도는 괜찮잖아!'라며 제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순간의 편의를 위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요즘 아이들을 보면 때로는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작은 어깨에 너무나 많은 기대를 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죠. 학교에서 모든 과목을 완벽하게 잘 해내기란 어른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우리 아이들은 어째서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는 걸까요? 부모의 사랑은 때로 아이의 약점에 광적으로 집착합니다. 국어 점수가 조금 떨어지면 국어 학원으로, 수학이 떨어지면 곧장 수학 학원으로 달려갑니다.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한, 이른바 ‘학원 뺑뺑이’는 우리 아이들의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내 아이가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기를 바라는 절절한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그 열정이 때로는 아이를 숨 막히게 하고, 진정으로 빛날 기회를 빼앗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이클 조던이 굳이 바이올린을 잘 켜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조수미가 100미터를 12초에 주파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재능을 꽃피웠고, 그 재능을 더 깊이 갈고닦았기에 위대한 예술가와 스포츠인이 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