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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

마차를 타고 김병화박물관에 가다
[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4]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점심 식사를 끝낸 뒤에 막상 출발하려니 햇볕은 쨍쨍 내리 쬐고 날씨가 너무도 더웠다. 병산이 슬기전화(스마트폰)로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기온이 낮 3시에는 40도까지 오른단다. 결국 병산은 이런 폭염에 걷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니 버스를 타고 가자고 말한다. 나도 찬성했다. 병산이 슬기전화로 버스 노선과 버스 번호를 확인한 뒤에 우리는 김병화박물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얼마쯤 가다가 버스에서 내렸는데, 말이 끄는 짐마차가 지나간다. 병산이 마차를 세우고 ‘김병화박물관’을 우즈벡어로 말하면서 손짓 발짓을 하다 보니 마부가 우리를 마차에 태워준다.

 

말이 끄는 짐마차에 타다

 

우리는 짐마차를 타고 약 2km 정도 갔는데, 마부가 내리라고 손짓을 한다. 병산은 택시비 정도에 해당하는 돈을 마부에게 주었다. 병산이 다시 슬기전화로 확인하더니 다른 버스를 기다리자고 말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 가다가 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거기서부터는 시골길을 걸어서 김병화박물관으로 갔다. 우리가 1960년대에 보던 한가하고 한편으로 정겨운 느낌이 나는 그런 시골길이었다.

 

 

막상 김병화박물관에 도착하였는데, 철문이 잠겨 있었다. 난감했다. 박물관 정문 앞에 작은 가게가 있어서 음료수를 사서 먹다가 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해보니 박물관장 집을 아는 자기 친구가 있단다. 그의 친구가 차를 가지고 나와서 우리를 2km 정도 떨어진 박물관장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나보다. 나중에 알아보니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자가용으로 택시 영업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불법이지만 특별히 단속을 안 하는 모양이다.

 

박물관은 상시 개방하는 것이 아니고 요청에 의해서만 개방을 한다고 한다. 박물관장은 고려인 할머니였는데, 한국말로 대화가 되었다. 우리가 박물관을 보러 서울에서부터 왔다고 하니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들어가 화장을 하고 다시 나왔다. 우리는 다시 김병화박물관으로 갔다. 김병화박물관에는 넓은 정원이 딸려 있었다. 정원은 소박하게 가꿔져 있었다. 박물관은 희색의 아담한 단층 건물이었다.

 

박물관장의 이름은 장 에밀리아 안드레예브나, 한국 성이 장 씨였나 보다. 고려인 2세였다. 1940년생이라니 우리 나이로 80살이다. 교사로 근무하다가 은퇴하였다. 김병화 선생과는 사돈 관계였다고 한다. 다른 여행기를 읽어 보니 김병화 선생의 며느리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분명히 한국말로 사돈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박물관을 한참 동안 둘러보았다. 고려인의 이주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진과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장과 대화를 나누고 또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하여 알아본 고려인의 강제 이주 역사는 다음과 같다.

 

고려인(高麗人)은 극동 지역에서 살다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민족을 말한다. 현재 고려인들이 사는 국가들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이 포함된다. 현재 고려인들은 약 5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남부 러시아의 볼고그라드 부근, 코카서스 지역, 남부 우크라이나에도 많은 고려인 공동체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은 어떻게 해서 결정되었을까?

 

러시아 공식 문서에 따르면 1864년 한민족이 연해주의 지신허(地新墟) 마을로 이주해 살았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착취와 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넘는 조선인은 해가 갈수록 불어났다. 러시아의 동방정책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가 건설되자 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인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해삼이 많이 난다고 해삼위(海蔘威)라고 불렀다. 1915년에는 연해주의 조선인이 1만 명에 이르렀다. 빼앗긴 주권을 되찾으려는 우국지사들이 계속 집결하여 연해주는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특히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있은 뒤 연해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났다.

 

1937년 8월 21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서 극동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고려인들이 카자흐공화국 및 우즈베크공화국 등지로 강제 이주 되었다. 두 달 동안에 17만 명의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보내졌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강제 이주의 원인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스탈린이 서명한 문서에도 적시되었듯이 극동 지역에서 활약하는 일본 첩자의 활동을 방지하기 위해서 고려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는 것이다. 러일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소련은 일본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외모로 볼 때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일본 첩자를 가려내기가 어려워서 극동 지역의 모든 고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설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지만 연구자들은 다른 이유도 지적하고 있다.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들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특히 한반도와 경계를 이루는 포시에트 군의 경우에는 고려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고려인들의 자치 요구가 비등하고 있었는데 소련 정부에서는 자치 요구를 미리 차단하기 위하여 강제 이주를 결정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소련에서 실시된 농업 집단화 정책으로 자체 인구가 급감하게 된 카자흐공화국 등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하여 인구의 유입이 필요하였다. 극동지역에서 카자흐공화국으로 초청된 농업 전문가들이 이미 1928년에 이주하여 활동하면서 벼농사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농업 기술을 가진 극동 거주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의 농업 생산력 향상을 위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강제 이주 정책을 추진했다는 주장도 있다.

 

강제 이주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이용되었다.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우슈토베까지 약 6,800 km를 여행한 후에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분산되었다. 강제 이주는 주로 화물 열차를 이용하였는데, 일반 열차를 우선적으로 보냈기 때문에 이주 열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였고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30~40일이 걸렸다.

 

 

강제 이주 과정의 비참한 실상에 관해서는 원로 고려인들의 회상을 통하여 많이 알려졌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체 배고픔, 추위, 식수 부족, 질병에 시달리면서 기차 안에서 보내는 한 달 동안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강제 이주 도중에 폐렴과 영양실조 등으로 2만 1천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강제 이주의 행렬은 카자흐공화국과 우즈베크공화국의 여러 도시와 지방으로 계속 이어졌고 중앙아시아 곳곳에 고려인들이 뿌려졌다. 황무지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토굴을 파고 추운 겨울을 이겨냈다. 고려인들은 이듬 해 봄에 수로를 건설하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고려인들은 낯선 땅에서 맨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를 만들었고 결국은 살아남았다. 생명이란 참으로 모진 것이다.

 

스탈린 시대에는 고려인들의 한국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이주에 대해 발언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함으로써 강제 이주의 비극은 끝나게 되었다. 흐루시초프는 1955년에 고려인의 정치적, 법적 명예회복을 선언하였고 그 결과 고려인들은 러시아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스탈린 시대에는 고려인들이 극동 지방으로 재이주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이러한 제한 조치가 풀리게 되면서 일부 고려인 중에는 옛 고향으로 귀환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현재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에 176,000명 러시아에 108,000명 카자흐스탄에 80,000명 키르기스스탄에 15,000명 우크라이나에 13,000명 타지키스탄에 6,000명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에 3,000명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