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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다시 먼 곳이 그리워지네

슈베르트의 피아노 환상곡 ‘방랑자’를 들으면서
[솔바람과 송순주 17]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대체로 독일어라는 것은 딱딱하고 정감이 없는 개념어 일색이란 비판을 듣지만 때로는 매력이 있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그 언어도 중국의 한자와 비슷한 구성법을 갖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Fernseh’라는 단어가 있다. ‘fern’은 멀다(遠), ‘seh’는 보다라는 뜻의 동사 ‘sehen’에서 나온 말로 ‘봄(視)’ 이란 뜻이니까 이 단어는 멀리서 보는 것이란 뜻의 텔레비전이 된다.

 

중국에서는 전기를 통해 멀리서 볼 수 있는 것이란 뜻으로 電視(전시)라는 말이 텔레비전의 번역어로 쓰인다. 같은 원리로 ‘Fernweh’가 있다. ‘weh’는 ‘불다, 전달하다’라는 뜻의 ‘wehen’에서 나온 말이니까 멀리 전달되는 그 무엇, 곧 ‘동경(憧憬)’이란 뜻이 된다. 그러면 ‘Fernweh’는 먼 데에 대한,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란 뜻이 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유명한 여성 수필가 전혜린의 ‘먼 곳에의 그리움’이란 글이 생각이 나서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인생의 시작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멀고 아득했기에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이 정말로 많았다. 우리의 앞은 멀고도 멀었고 기대하고 볼 것도 너무나 많았다. 그러다가 점점 나이를 먹자 눈앞에 놓인 것들의 거리가 점점 짧아지면서, 멀리 보이는 것도 성글어지고 종국에는 없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도 아직도 먼 곳에의 그리움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생을 동경과 기대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만 일생을 뭔가를 끊임없이 꿈꾸며 살아온 전혜린 같은 여성에게는 그 그리움이, 우리 같은 결혼한, 아무 꿈도 없는 중년의 남자들과는 다른 것 같다.

 

바하만의 시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

텅 빈 위(胃)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가운데 줄임) 내 영혼에 언제나 고여 있는 이 그리움의 샘을

올해는 몇 달 아니, 몇 주일 동안만이라도 채우고 싶다.​

 

사실 가을은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꼭 여자만이 그럴까? 남자들도 훅훅 털고 떠나고 싶다.​

 

그런데 굳이 떠난다고 한다면 남자들의 경우가 더 쉬울 터이다. 그렇더라도 남자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떠나기가 쉽지 않은 여성들의 경우에 그 떠나고 싶은 욕망, 갈증이 더 약하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일 것이다. 대체로 우리 그 잘난 한국남자들은 평소 집안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무슨 큰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고 유세하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여차하면 맡기고 떠날 사람이 집에 있는 셈이고 막상 떠나서 가다보면 들릴 막걸리 집이라도 있어서 떠나기 쉬운 것 같은데 요즘에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동안 한국의 여자들의 경우에는 기껏 혼자서 찾아갈 해변이나 낙엽 쌓인 오솔길이나 갈 것으로 생각해왔지만 이제는 남편에게 없는 경제력에다 시간이 많고 또 같이 대화를 나눌 친구들이 많아서 툭하면 국내나 나라밖으로 나가는 것이 현실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요즈음은 멋진 경치를 눈앞에 걸고 있는 카페가 얼마나 많은가? 거기에서는 향기로운 커피가 유혹하고 있는데 커피만이 아니라 와인도 여자들을 유혹하는 시대 아닌가).

 

그러기에 이제 남녀 구별이 의미가 없지만 남자들의 경우엔 입이 좀 무거운 편이어서 그들에게 있어서 떠난다는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서 호젓한 스스로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

 

그림자 벗을 따라 걷는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길

 

이탈리아의 지아니 모란디(Gianni Morandi)가 부른 유명한 칸초네인 ‘방랑자(Vagabondo)’를 박인희가 번안해 부른 것을 들어보면 그녀의 목소리가 맑고 보드라워서 그런지 이 경우 길을 떠남은 약간 달콤한 추억을 연상시키지만, 니콜라 디 바리(Nicola di Bari)가 이탈리아어로 부르는 것은 약간 칼칼한 맛으로 해서, 이 가을의 찬바람을 얼굴에 맞는 느낌이 있다.​

 

사람들은 이 계절에 왜 방랑자가 되어 그리 자꾸 떠나려하는가? 그 미지의 곳에 무슨 그리움과 동경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Fremd bin ich eingezogen  이방인으로 나는 왔다가

Fremd zieh' ich wieder aus  다시 이방인으로 갑니다​

 

그렇다.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이 구절처럼 우리들은 이 세상에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가는 것이다. ‘fremd’라는 단어를 이방인이라고 번역을 하지만 뭐 나그네, 길손이란 느낌이 더 강한 것이 아닌가? 그러기에 이 노래가 겨울나그네의 첫 머리에 올라온 것이리라. 어디엔가 영원히 안주할 수 없고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어디엔가 가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데, 그것은 안주는 곧 인생의 정체, 혹은 퇴보가 아니냐는 불안감이 나그네에게 늘 따라다니기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틈만 나면 어디엔가 떠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방랑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그런 마음은 찬바람을 얼굴에 맞는 가을이 되면 마치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떠나려는 충동과 욕망이 더 강해지는 것이리라.​

 

‘방랑자’, 현대에 와서 이 말은 더욱 더 힘을 얻는다. 어딘가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현대의 방랑자는 이른바 디지털 유목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예전에 공기 중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방송의 전파라던가 핸드폰을 이어주는 메시지, 군대나 경찰 등의 교신 등 수백 만 수천 만, 수억의 메시지가 늘 떠돌아다닌다. 그러기에 그러한 디지털 메시지가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뭔가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주는 것이니 현대인들이 더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것도 비난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이럴 때 슈베르트의 피아노 환상곡인 ‘방랑자’를 찾는다. 예전 LP판으로 나온 이 음반의 자켓이 너무 매혹적이었던 까닭에 일찍부터 사서 듣던 것, 그 자켓에는 카스파르 프리드리히(Caspar Friedrich, 1774-1840)라는 네덜란드 화가의 그림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가 올라 있었다.

 

어떤 중년의 남자가 산 위에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뒷모습이 애잔한 향수를 주는 그림. 눈앞의 산봉우리를 뒤덮고 있는 안개들에는 삶의 애환과 희망과 슬픔과 눈물과 기쁨이 다 잠겨 있다. 저 멀리 혹은 가까운 어딘가에 우리가 지나온 과거가 있고 또 우리가 가야할 미래가 있다. 낭만주의의 특징이라 할 먼 곳에 대한 동경, 지적 자유에 대한 희구, 이 세상의 근원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 등이 이 그림 하나에 다 담겨 있는 듯하다.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가 연주한 이 피아노곡의 자켓에 과연 가장 잘 맞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하필 음악을 별로 많이 듣지도 않던 시절에 왜 ‘방랑자’라는 곡이 눈에 들어왔을까? 아무래도 내 마음에도 방랑자 기질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것은 나만의 기질은 아니고 현대인들 누구에게나 있는 기질이겠지만 아무튼 그런 기질이 발동했기에 그 곡이 손에 들어온 것이리라.

 

그런데 아는가? 피아노환상곡으로 된 이 4악장의 곡이 원래는 ‘방랑자’라는 가곡이 원곡으로 있었고, 그것을 확대해서 피아노곡으로 다시 만든 것이라는 것을? 슈베르트는 당시에 인기 있던, G.F.슈미트란 사람이 쓴 ‘방랑자(放浪者, Der Wanderer)’라는 시가 맘에 들었는지 이것을 처음 노래로 만든다.​

 

나는 산에서 이곳으로 왔다

계곡은 김을 내뿜고 바다는 울부짓는다

나는 조용히 계속 나아간다. 나는 불행하다

그리고 언제나 탄식하며 묻는다. 어디에? 언제나 어디에?​

 

이곳의 태양은 내게 너무나 차갑게 느껴진다

꽃들은 시들고 삶은 오래되고

그들이 하는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나는 어디에서나 이방인이다

 

이 시는 이처럼 힘든 사람들의 상황을 절절이 묘사하지만 단순히 방랑하라고만 하지 않고 해답을 제시해준다. 마지막 연(聯)을 보면 그 해답이 있다​

 

나는 조용히 계속 나아간다. 나는 불행하다

그리고 언제나 탄식하며 묻는다. 어디에? 언제쯤 어디에?

유령 같은 바람사이로 내 등 뒤에서 소리가 들린다

“그 곳, 네가 없는 그 곳에 행복이 있다"

 

 

 

이 노래 자체는 지칠 대로 지쳐버린 방랑자의 실의와 동경을 낭만적인 정신으로 노래한 그의 초기 가곡 중의 걸작으로 손꼽힌단다. 이 곡을 만들 때 슈베르트의 나이는 19살이었고 이 때 그는 불우했었다. 아버지와 싸워 집을 나가서 친구의 집에 얹혀 살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고통이 많아서 <비극적>이라고 스스로 악보에 적은 제4교향곡을 쓴 해였다. 이런 때인 만큼 슈미트의 가사가 마음에 절절히 다가왔을 것이다. 아주 우울한 전주로 시작되어 쓸쓸한 절망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슈베르트는 이 곡을 만들고는 6년 뒤에 앞에서 말한 환상곡 ‘방랑자(다장조 작품 15)’를 완성한다. 그는 이 곡을 에마누엘 카를 폰 리벤베르크 공에게 헌정하였다. 전 4악장으로 이루어진 피아노곡으로서, 장중한 제1악장, 침울하고 환상적 <방랑자>를 주제로 한 변주곡 형식의 제2악장, 그리고 정열과 아름다움과 힘이 종합된 제3악장, 제1악장을 재현하는 제4악장으로 되어 있다. 끝 곡의 처량한 분위기는 리스트가 편곡을 해 주어 더욱 멋있게 되었다고 한다.​

 

30대 후반, 한창 회사에서 일이 많고 밤 샐 일도 많고, 당직을 한다고 밤을 새고 돌아가는 날이면 나는 오후에 졸린 눈으로 일어나 이 곡을 틀어놓았다.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 곡 때문이었다. 그 연주가가 좋아서 나중에 브람스의 피아노 5중주곡도 폴리니 연주를 찾는다. 확실히 손가락 끝에 힘이 넘치며, 그 피아노 소리가 심장을 해머처럼 두들긴다.​

 

전혜린의 ‘먼 곳에의 그리움’은 나에게 그런 많은 상념과 추억의 당의정이었다. 먼 곳에의 그리움은 전혜린처럼 내 혈관 속에 어쩌면 섞여 있을지도 모를 한 방울 집시의 피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가을이 되고 찬바람이 돌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기회가 많아진다. 지난봄과 여름의 그 찬란했던 꿈은 과연 얼마나 이루어지고 얼마나 성숙했는가? 그러면 올해 남은 시간에는 그 못 이룬 꿈의 어느 것을 찾아내어 다시 불을 붙여야 하나? 그런데 이루고 이루지 못하고를 따지는 것, 그런 바람(所望) 마저도 의미 없는 것이라고 전혜린은 말한다. ​

 

모든 플랜은 그것이 미래의 불확실한 신비에 속해 있을 때만 찬란한 것이 아닐까?

이루어짐 같은 게 무슨 상관 있으리요?

동경의 지속 속에서 나는 내 생명의 연소를 보고 그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만으로

메워진 삶을 내년에도 설계하려는 것이다.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특권이야 말로 언제나 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아마 유일한 선물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 본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중에서...  

 

 

요즘 가을 하늘이 하도 맑아서 마음도 맑아지긴 하지만 때때로 창밖의 하늘에 잿빛 구름이 짙게 깔리면 나는 마치 안개바다 같아서, 프리드리히가 그린 그 그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 속에 시간과 공간의 추억을 더듬는다. 전 세계는 불확실성이 너무 많아져 차분히 인생을 관조하며 즐기기가 쉽지 않은 시대에 저 구름이나 저녁 햇살 너머에 혹 우리가 잡으려다가 잡지 못한 꿈이 있는 것인 양 허공에 대고 손을 뻗어본다. 일상을 벗어나서 마음 놓고 달려갈 수 없는 사람들은 나보다 더욱 이런 감상이 솟아오를 것이다. ​

 

다시 문득 슈베르트의 ‘방랑자’라는 피아노 환상곡을 들어본다. 도입부의 그 강력한 망치소리로 점차 혼미해지는 감성을 깨어나게 해서 다시 작동시키면서 말이다. 그래 우리에게도 동경(憧憬)이 있었지!!! 우리에게 아직도 저 구름 밑으로 갈 길이 많이 남아있지. 그 곳에 있는 어떤 사랑받을 사람에게(an die ferne Geliebte) 나도 시인 고은처럼 가을의 편지를 써야겠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겠지…….​

 

그리고는 그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면 일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걱정이건 근심이건 혹은 못 이룬 것에 대한 미련이건 훌훌 털어버리고 무작정 떠나는 거다. 어디론가로 가서 어디론가를 향해 걷는 거다. 인생은 떠나는 것, 걷는 것이라고 하지 않나. 자 지금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