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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고려인의 강제이주 이야기와 아리랑요양원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을 위한 위문공연 하다
<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10>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7/18(목)

 

오늘은 타쉬켄트 근처에 있는 아리랑요양원을 방문하는 뜻깊은 날이다. 아리랑요양원은 노무현 정부 때 우즈벡 정부와 공동으로 지원하여 설립되었는데, 현재 82살 이상의 고려인 노인 38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82살 이상으로 입원 자격을 제한한 이유는 강제이주가 이루어진 1937년 이전에 연해주에서 태어난 사람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숙소에서 해결하고 병산과 나는 씩씩하게 순례길을 나섰다. 병산이 구글 지도를 이용하여 거리를 재보니 아리랑요양원이 있는 아마드 야사비이 마을까지는 24km이다. 아직은 오전 시간이라 뜨겁지는 않아서 우리는 순례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걸어가기로 했다.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큰길을 따라 걷다 보니 시끄럽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병산은 원칙에 충실한 지도자지만 때로는 유연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병산이 구글 지도를 확인하더니 지름길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지름길은 양쪽 도로 중간에 있는 철도 때문에 100m 정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병산은 좌우로 기차가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더니 1초도 지체하지 않고 성큼성큼 철길을 건넌다. 나도 순례단원으로서 무조건 병산을 따라 철길을 건넜다.

 

 

계속 걸어 아리랑요양원까지 1/3 지점까지 갔는데, 날씨가 뜨거워지면서 기온이 오르기 시작한다. 땀이 나고 속옷이 젖고 숨이 헉헉대고. 병산은 이스탄불까지 가려면 아직 순례 일정이 많이 남았는데 무리는 하지 말자면서 버스를 타고 가자고 결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택시를 한번 타고 아리랑요양원에 도착하였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는 아담한 2층 건물이 요양원이었다. 입구에는 커다란 한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미리 전화하지 않았는데 요양원장은 낯선 방문객인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지났지만, 여분이 있어서 우리는 2층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김치가 나오는 소박한 점심이었다. 요양원 시설은 매우 훌륭했다. 체육시설, 오락시설, 강의시설, 휴식시설, 그리고 산책을 할 수 있는 정원까지 모든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인생의 말년을 보낼 수 있다면 매우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우리는 자료실에서 강제이주의 역사를 증언하는 기록과 사진들을 둘러 보았다.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는 모습, 처음 도착해 지었다는 움막 사진, 80년 전을 추측할 수 있는 사진들, 그리고 요양원 입소자 38명의 증명사진 등등 여러 가지 자료들을 숙연한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병산의 요청과 요양원장의 배려로 우리는 고려인들을 위문하는 공연을 하기로 했다. 나는 2011년부터 그러니까 8년째 판소리를 배우고 있다. 나는 잘하지는 못해도 사철가와 상주아리랑 그리고 흥타령을 불렀다. 북을 치는 고수는 없었지만 마침 부채가 있었다. 부채를 들고서 정성껏 3곡을 불렀다. 흥타령을 부를 때에는 8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고려인들의 고통과 슬픔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슬퍼졌다.

 

 

흥타령은 남도 지방 민요인 육자배기 가운데 가장 많이 부르는 슬픈 노래이다. 이 노래의 제목에는 ‘흥(興)’ 자가 들어있지만 흥 대신 ‘인생무상’이 느껴지는 슬픈 노래이다. 우리 조상들은 특히 일반 백성들의 삶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다. 부패한 관리들의 폭정, 양반들의 멸시, 그리고 지주들의 수탈에 시달리면서 한(恨)이 맺힌 고단한 삶을 살았다. 그래도 우리 조상들은 한에 굴복하지 않고, 한을 흥으로 승화시키는 흥타령을 불렀다. 흥타령의 마지막 구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 나도 꿈 속이요~ 이것 저것이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련만~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 가는 인생~

부질없다-깨어나는 그 꿈을~ 꾸어서 무엇을 헐거나~~~~

 

병산이 녹음했는데, 흥타령의 마지막 부분을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생명탈핵 실크로드 카페에 올렸다. https://m.cafe.daum.net/earthlifesilkroad/iNcm/45

 

연해주에서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들의 삶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낯선 땅, 험난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역경을 이겨내고서 쌀농사, 목화농사를 성공시켰다. 가을 추수 때에는 흥겨운 추수 노래를 부르며 얼싸안고서 아리랑을 불렀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월은 흘러갔고, 지금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것이 꿈일 뿐,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은 없지 않은가? 인생이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흥타령을 끝내자 이어서 고려인 할머니 두 분이 노래를 불렀다. 밀양아리랑과 강원도 아리랑 그리고 내가 모르는 민요를 불렀다.

 

즉석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요양원장과 차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양원장은 매우 활달한 젊은 여성이었다. 본인은 젊지 않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올해 70인 나의 눈에는 요양원장이 젊어 보였다. 그녀는 10여 년 전 한국에서 자원봉사자로 여기에 왔다가 주저앉게 되었고 현재는 원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다고 한다. 요양원장에게서 생생하고 흥미있는 이야기를 몇 가지 들을 수 있었다.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는 한국말만 하고도 별 불편이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후에는 러시아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요되었다. 그 후 우즈베키스탄이 1991년 독립한 이후에는 우즈벡 언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되었다. 고려인들은 러시아말을 오랫동안 썼기 때문에 한국말이나 우즈벡말보다는 러시아말이 편하다.

 

그러나 1991년 이후 태어난 젊은이들은 러시아말을 모르고 우즈벡어만 사용하므로 부모자식 사이에도 언어로 인한 갈등 문제가 있다고 한다. 다문화 가정의 문제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인간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언어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처음 도착한 때는 가을이었고,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고 한다. 움막을 짓고서 겨울을 나면서 노인과 어린애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요양원장의 말에 따르면 다행스럽게도 우즈벡 현지인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강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그해 겨울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한다. 둘째 해에 농사를 시작하면서 사정이 나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은 초대 대통령인 이슬롬 카리모프(Islom Karimov, 1938~2016)가 1991년부터 26년 동안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했다. 카리모프 시절 미국의 인권단체인 프리덤 하우스는 우즈베키스탄을 북한, 에리트레아, 투르크메니스탄 등과 더불어 세계 최악의 인권 탄압국 9개 나라로 지정하기도 했었다. 2대 대통령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Shavkat Mirziyoyev)는 2016년부터 경찰국가 체제를 약화시키고 자유 시장 경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예전에 사진 찍는 것을 금지한 관광지에서 이제는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하였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여 기독교 선교사들의 전도도 허용하고 있다. 관광산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한국을 포함한 7개 나라에 무비자 입국을 시행했다. 화폐 개혁, 부패와의 전쟁, 해외투자 장려 등의 새로운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새 대통령은 특히 한국을 발전모델로 삼고 있으며 대통령의 아들도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2019년 4월에 문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을 국빈 방문할 때에 김정숙 여사는 4월 19일 우즈베키스탄 영부인과 함께 아리랑요양원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현직 대통령의 부인이 뜨자 우즈벡 정부에서는 요양원 복도에 최고급 카페트를 깔아주고, 요양원 입구 조경 공사를 새로이 하고 등등 요란했었다고 한다. 한국의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경험으로 볼때에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들이다.

 

매우 소중한 경험인 아리랑요양원 방문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는 타쉬켄트에서 가장 크다는 꾸일륙시장에 들렸다. 여행기를 읽어 보면 이 시장에는 고려인 상인이 있다는데 만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 시장에서는 한국의 김치와 똑같이 맛있는 김치를 팔고 있었다. 시장에서 김치를 판다는 것은 김치를 사가는 고려인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시장을 나와서 버스와 택시를 타고서 숙소에 돌아오니 저녁 5시였다. 오늘은 이국땅에서 고려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매우 보람 있는 하루였다.